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군사혁신을 단행하였습니다.그 이론적 기반은 4명의 프랑스 장교들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부르세,기베르,그리보발,듀테일이었습니다. 부르세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횡대대형에서 벗어나 여러개의 종대대형에 의한 분진합격을 주장하였고, 기베르는 각 병종의 혼합에 의한 독자적 작전이 가능한 사단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기베르는 보급의 간소화에 따른 기동력 증대를 꾀했습니다. 그리보발과 듀테일은 대포의 경량화를 통한 기동성 증대와 포격의 집중운용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사혁신과 더불어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군이 등장하였습니다. 국민군은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시도된 바 있으나 이들 국가는 당시 총인구가 100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국이라 대다수 병력을 여전히 용병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는 인구가 2700만에 달했으며 이는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가는 인구였습니다. 1794년에 프랑스는 75만의 무장병력을 보유하였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어느 국가의 군대보다도 방대한 규모였습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실제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 인물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습니다.
1. 병종 혼합군과 진형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 군대는 횡대대형이 기본이었습니다. 이는 머스킷의 화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고 전투 의욕이 떨어지는 병사들의 전장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산개대형, 횡대대형, 종대대형을 혼합해서 편성합니다. 횡 240열, 종 3열을 기본으로 1개 대대를 만든 다음, 3개 대대를 기본으로 해서 1개 대대는 횡대, 2개 대대는 종대로 편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대에서 120명씩을 뽑아 산병 또는 전초병으로 운용합니다. 이들은 산개대형으로 포진하여 적군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보병이외에도 포병과 기병을 같이 편성하여 독자 작전이 가능한 병종 혼합군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대식 사단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종 혼합군을 가지고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2. 산병의 교란작전과 횡대의 전진압박
먼저 산병이 산개대형을 펼쳐 적군을 교란합니다. 다음으로 1개 대대의 횡대가 전진하여 일제사격을 통해 적군을 압박합니다. 이를 통해 적군이 어느 한 지점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고, 후방 예비대를 전면에 투입하도록 만듭니다. 이는 소련 종심전투교리에서 나타나는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측면 우회기동을 통한 적 전선 균열 야기
나폴레옹은 미리 기병을 중심으로 한 병력을 적 측면에서 우회 기동하여 적의 병참선과 후퇴로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되면 적군은 정면에 포진한 병력중 일부를 빼내어 병참선과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이동시키게 되고 횡대로 늘어선 적 전선의 균열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4. 포병의 집중운용을 통한 균열 확대
적 병력중 일부를 후방으로 빼내게 되면 정면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 틈을 향해 후방에 있는 포병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합니다. 나폴레옹은 포병을 보병과 분리시켜, 포병이 단순히 보병의 지원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선의 돌파를 위한 균열을 만드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포병에 대해 보병의 총검돌격처럼 집중적으로 밀집하여 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 밀집종대의 연속 투입을 통한 전선 돌파
포병의 집중 포격을 통해 적 전선의 균열이 확대되면 그 틈을 향해 2개의 밀집 종대 대대가 연속적으로 투입됩니다. 이때는 총검을 착검하고 돌격하는 방식으로 투입되었는데 당시 머스킷 소총의 연속 발사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서 근거리에서의 총검돌격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제대를 투입하고 이어서 2제대를 곧바로 투입함으로써 적군이 1제대를 막아내더라도 2제대에 의해 붕괴되도록 만들었습니다.
6. 기병의 전과확대
그 다음으로 기병이 투입되어 무너진 적전선으로 들어가 혼전에 빠진 적군을 공격함으로써 전과확대를 도모합니다. 이렇게 되면 적 전선은 구멍이 뚫린 둑처럼 대열이 붕괴되게 되고 미리 측면으로 우회기동한 병력과 함께 적군을 포위섬멸하게 됩니다.
7. 보급의 현지조달과 기동성 확대
18세기의 유럽군대는 병력의 1/3 가량은 보급과 수송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보병들도 많은 보급물자를 가지고 행군하였고 전장에서는 창고를 건설하여 물자를 저장했기 때문에 기동성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을 현지조달을 통해 해결하고 대신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보급의 간소화와 현지조달을 통해 다른 유럽 군대가 1분에 70보의 속도로 이동하는 데 비해 나폴레옹 군대는 1분에 120보의 속도로 이동했습니다. 차량과 철도가 없었던 당시에 이는 상당한 기동성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에서는 나폴레옹이 군인의 무기 뿐 아니라 군인의 다리를 가지고 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기동성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급의 현지조달은 서유럽에서는 가능했으나 러시아 원정에서는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는 대부분이 빈촌이라 현지조달이 어려웠고 알렉산드르 1세는 모스크바를 불태울 정도로 철저한 초토 작전을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 전장은 너무 넓어서 단기간의 기동성 확보로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60만의 원정군 중 75%에 달하는 45만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추위로 사망하는 대실패를 겪게 됩니다.
8. 내선작전과 각개격파
향상된 기동성은 내선작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페인 등 다른 모든 유럽 강대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곳에 분산된 적들이 결집하기 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분산된 적군을 연결하는 지점인 내선에서 출발하여 우세한 기동성을 통해 한곳의 적을 신속하게 격파한 다음 다른 적을 격파하는 각개격파의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부관이 한번은 나폴레옹에게 '폐하는 항상 소수를 가지고 다수에게 승리하였습니다'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항상 다수를 가지고 소수에게 승리하였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동맹하는 적 세력 전체에 대해서는 소수의 병력이었지만 신속한 기동을 통한 내선작전에 의해 실제 전투를 벌이는 1곳의 적에 대해서는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개격파가 실패하였을 시는 워털루 전투와 같이 우세한 규모의 적에게 오히려 포위공격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9. 소련 종심전투교리와의 비교
나폴레옹의 전술을 살펴보면 1920년대 이후 등장한 소련 종심전투교리와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산병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소련의 전방분견대의 역할과 비교되고, 횡대의 전진압박은 소련군의 광정면 동시접촉과 비슷한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포병의 집중운용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게 포병은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집중운용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또한 종대의 연속적 투입과 기병(기갑부대)를 통한 전과확대, 보급의 간소화를 통한 기동성 증대도 그러합니다.
두개의 전술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이러한 유사점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어떻게 적전선을 돌파하여 단기간에 승리를 쟁취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들자면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위섬멸전을 목표로 하였으나 소련 종심전투는 적 신경망의 마비를 목표로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폴에옹의 전술은 당시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말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진형은 이전의 횡대 대형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숙련된 병사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프랑스 청년층의 20%가 전사하여 염전의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에 한 원인이 있습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청년층의 25%가 전사한 것과 근접하는 규모입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혁명 당시의 용기와 의욕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감한 종대돌격을 꺼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