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경훈님 개인홈입니다 그런대로 족보에관해서 잘나와서 이렇게올립니다 가서 봐도 손색이없네요 그럼 좋은 하루되시길http://my.netian.com/~taehc/taehc_page1.html
太(태)氏
태(太)씨는 본관이 협계(浹溪)를 대종으로 영순, 밀양, 남원, 통천 등이 있다. 고려에 귀화 변성했다는 설이 있다.
남원태씨
남원태씨의 중시조인 송암(松庵) 태맹례(太孟禮)는 협계태씨(陜磎太氏)의 중시조 태집성(太集成)의 9세손으로 목사 태이(太異)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진사로 1454년(단종2) 간교한 무리들의 참소를 입어 남원에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태맹례를 시조로 하고 그의 출생지인 남원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총1천43가구의 태씨중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었고, 특히 함경북도에 478가구나 집중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태맹례 이전, 발해가 멸망할 무렵부터 태씨가 북방에서 이주해 와서 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순태씨
시조 태금룡(太金龍)은 진국의 개국조인 태중상(太仲象)의 19세손으로 협계태씨(浹溪太氏) 중조 태집성(太集成)의 아우 웅성(雄成)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금교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고, 영순군(영순은 상주의 옛이름)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순(永順)으로 하였다.
영순태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서암(西庵) 태두남(太斗南)은 김진양(金震陽)의 문인으로 중종 ㄸ 문과에 급제, 종부시정이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고 있을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진양의 장례를 성의껏 보살폈다가 김안로에 의해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쇄언(蔘言)》이 있다.
협계태씨
시조 태집성(太集成)은 진국의 개국조인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며, 진국의 마지막 왕인 애왕 대인선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낭장을 지내고 대장군으로 서북면 병 마사가 되었다 1231년(고종18) 몽고군의 침입때 신서문에서 싸우고 이듬해 자주부사 최춘명 (崔椿明)이 항복을 거부하자 몽고 관리와 함께 가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뒤에 수사공에 오르고 협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협계로 하였다.
시조 의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 조천리에 있다. 시조의 6세손 초곡(草谷) 태응진(太應辰)은 정종 때 담양 병마도호부사를 지내고, 태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남원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전북남원·옥구·임실 등지 에 분포되어 있다.
합계태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북재(拱北齋) 태색(太穡)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종당(宗黨) 태구·태시경(太時慶)·태귀생(太貴生)·태천생(太賤生) 등과 창의하여 성을 지탱하고 군량 3백석을 명나라 군대에 보내어 명장 유정(劉綎)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 다.
선조 때의 태구련(太九連,貴連,賤生)은 임진왜란 때 칼을 잘 만들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과 그의 조방장 신호(申浩), 박종남(朴宗男) 및 충청도 수군절도사 선거이(宣居怡) 등의 환도를 동료 언복(彦福)과 함께 만들었다.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는 충남 아산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大(대)氏
대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개 성씨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에 비로소 나타난 성씨로 본관은 밀양과 대산 2본이다.
대산 대씨
대씨는 본래 발해국(渤海國)의 시조왕 대조영(大祚榮)의 성이다. 발해는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더불어 송화강(松花江)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확보, 해동의 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에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하자 대조영의 후손 광현(光顯)이 926년에 고려 태조에게 투화하여 왕씨를 사성받았다는 것은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대산대씨와 발해대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 국세 조사 때 밝혀진 것을 보면 전남 영광에 10여가구 등 12가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밀양 대씨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원래 당나라 무장으로 말갈(靺鞨)을 통관 하였고, 당제로부터 진국공에 봉해졌다. 그의 초명은 걸걸중상이었는데, 걸걸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대(大)> 자로 풀어대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은 699년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과 말갈족을 이끌고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여 발해국을 세우고 왕이 되니 이 분이 바로 고왕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물려받고 당나라 관제와 문화의 영향을 입어 해동의 성국으로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인 926년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했다. 그러자 그의 후손인 대탁(大鐸)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밀양대씨는 주로 전남 영광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영남에서 호남 으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太(태)氏
태(太)씨는 본관이 협계(浹溪)를 대종으로 영순, 밀양, 남원, 통천 등이 있다. 고려에 귀화 변성했다는 설이 있다.
남원태씨
남원태씨의 중시조인 송암(松庵) 태맹례(太孟禮)는 협계태씨(陜磎太氏)의 중시조 태집성(太集成)의 9세손으로 목사 태이(太異)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진사로 1454년(단종2) 간교한 무리들의 참소를 입어 남원에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태맹례를 시조로 하고 그의 출생지인 남원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총1천43가구의 태씨중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었고, 특히 함경북도에 478가구나 집중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태맹례 이전, 발해가 멸망할 무렵부터 태씨가 북방에서 이주해 와서 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순태씨
시조 태금룡(太金龍)은 진국의 개국조인 태중상(太仲象)의 19세손으로 협계태씨(浹溪太氏) 중조 태집성(太集成)의 아우 웅성(雄成)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금교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고, 영순군(영순은 상주의 옛이름)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순(永順)으로 하였다.
영순태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서암(西庵) 태두남(太斗南)은 김진양(金震陽)의 문인으로 중종 ㄸ 문과에 급제, 종부시정이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고 있을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진양의 장례를 성의껏 보살폈다가 김안로에 의해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쇄언(蔘言)》이 있다.
협계태씨
시조 태집성(太集成)은 진국의 개국조인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며, 진국의 마지막 왕인 애왕 대인선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낭장을 지내고 대장군으로 서북면 병 마사가 되었다 1231년(고종18) 몽고군의 침입때 신서문에서 싸우고 이듬해 자주부사 최춘명 (崔椿明)이 항복을 거부하자 몽고 관리와 함께 가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뒤에 수사공에 오르고 협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협계로 하였다.
시조 의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 조천리에 있다. 시조의 6세손 초곡(草谷) 태응진(太應辰)은 정종 때 담양 병마도호부사를 지내고, 태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남원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전북남원·옥구·임실 등지 에 분포되어 있다.
합계태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북재(拱北齋) 태색(太穡)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종당(宗黨) 태구·태시경(太時慶)·태귀생(太貴生)·태천생(太賤生) 등과 창의하여 성을 지탱하고 군량 3백석을 명나라 군대에 보내어 명장 유정(劉綎)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 다.
선조 때의 태구련(太九連,貴連,賤生)은 임진왜란 때 칼을 잘 만들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과 그의 조방장 신호(申浩), 박종남(朴宗男) 및 충청도 수군절도사 선거이(宣居怡) 등의 환도를 동료 언복(彦福)과 함께 만들었다.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는 충남 아산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大(대)氏
대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개 성씨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에 비로소 나타난 성씨로 본관은 밀양과 대산 2본이다.
대산 대씨
대씨는 본래 발해국(渤海國)의 시조왕 대조영(大祚榮)의 성이다. 발해는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더불어 송화강(松花江)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확보, 해동의 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에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하자 대조영의 후손 광현(光顯)이 926년에 고려 태조에게 투화하여 왕씨를 사성받았다는 것은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대산대씨와 발해대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 국세 조사 때 밝혀진 것을 보면 전남 영광에 10여가구 등 12가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밀양 대씨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원래 당나라 무장으로 말갈(靺鞨)을 통관 하였고, 당제로부터 진국공에 봉해졌다. 그의 초명은 걸걸중상이었는데, 걸걸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대(大)> 자로 풀어대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은 699년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과 말갈족을 이끌고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여 발해국을 세우고 왕이 되니 이 분이 바로 고왕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물려받고 당나라 관제와 문화의 영향을 입어 해동의 성국으로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인 926년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했다. 그러자 그의 후손인 대탁(大鐸)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밀양대씨는 주로 전남 영광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영남에서 호남 으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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