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5일 금요일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보니파시오 성인은 673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성인은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로 축성되어 마인츠 교회를 다스리며, 동료들과 함께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성인은 프리슬란트(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시성하였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했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즉시 회개하였다. 다윗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한 하느님 앞의 신앙인이었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3,10-17
사랑하는 그대여,
10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14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26,19-2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나도 사랑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공동체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데, 살짝 늦게 일어난 한 청소년이 성전 문 앞에서 쭈볏쭈볏,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저는 활짝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크게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청소년은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야행성인지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늦게라도 미사에 나와준 것이 감사해서 강론 시간에 크게 칭찬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자주 묵상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신 분,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미사 좀 늦었다고 대노하고 격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전 6시, 9시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도 잘 왔다고 칭찬하시며, 넉넉한 하루 품삯을 건네시지만, 게을러터져서 정오, 오후 3시, 5시에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도 어여삐 보시며 똑같은 품삯을 건네시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오늘 에수님께서는 하느님,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사실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님은 혈육을 취하신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하느님을 너무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내 가정, 내 공동체, 나 자신의 사라사욕만을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자판기같은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전 세계, 모든 만민, 모든 생명체를 두루 보살피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신데, 내 고장, 내 혈육, 내 가문, 내 나라만 애지중지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복을 베푸시는 편애하시는 하느님으로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나만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는 크신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복음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히 알던 주님과 성모님의 정체성을 거룩한 빛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어, 우리 존재가 그분들 발치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낡은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성체 조배를 하며 뜨거운 눈물로 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다 내어주시니, 이제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요?" 그때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아주 부드럽고도 단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살과 피,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 너는 그저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사랑의 선언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드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머무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찰싹 달라붙어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무의 수액인 성령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저절로 기쁨과 사랑의 열매를 밀어내 주십니다.
세상의 거짓된 율법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네 힘으로 짐을 지고 가라"며 윽박지르지만, 우리를 진짜 사랑하시는 분은 "짐은 내가 질 테니 너는 내 품에 안겨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에 본당 교우들과 함께한 성지순례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특별히 본당 성경반 교우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수녀님, 부제님, 평신도가 함께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이 있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국 교회에도 ‘청년 성서 모임’, ‘성서 40주간’, ‘성서 100주간’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신앙인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우리는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도 성경을 묵상하며 살아온 분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서 깊은 믿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례를 하면서 또 하나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공항을 이용할 때 프리체크(PreCheck), 라운지, 글로벌 엔트리(Global Entry)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긴 줄을 서지 않고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프리체크, 기다림 속에서도 편안히 쉴 수 있는 라운지, 입국 절차를 간편하게 해 주는 글로벌 엔트리. 같은 공항, 같은 비행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정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과 참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영적 프리체크’와 같습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또한 ‘영적 라운지’와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머물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적 글로벌 엔트리’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윗이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단순한 문자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성인 역시 이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이라는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여정은 달라집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삶의 길이 분명해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본당의 성경반과 교회 안의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의 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지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길을 찾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쉼을 얻고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오늘의 성인
성 보니파시오(Boniface)
신분 : 대주교,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 크레디톤(Crediton)
활동연도 : 675?-754년
같은이름 :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빈프리트, 윈프리드, 윈프리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의 크레디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빈프리트(Winfrid, Wynfrith)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불과 7살 때에 엑서터(Exeter)의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고, 14세 되던 해에는 너슬링(Nursling)의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서 윈버트(Winbert)의 지도하에 공부하였다.
그는 너슬링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30세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생활과 설교자로서의 생활이 성공하자 프리슬란트(Friesland)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716년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그는 718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가 계시는 로마(Roma)로 갔으며, 여기서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보니파티우스로 개명하고 3년 동안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도와 프리슬란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가 722년 가장 이교도적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토회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활동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교황은 보니파티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니파티우스는 카를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그는 튀링겐(Thuringen)에 가서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744년에 그와 성 스투르미우스(Sturmius, 12월 17일)는 풀다(Fulda)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에서 가장 큰 중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고, 피핀을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754년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두스의 사후 이방 관습에 다시 떨어진 프리슬란트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가 프리슬란트의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 중에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게르만족의 사도' 또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그의 축일은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74년부터 전 교회에서 기념하고 있다.
성 도로테오 (Dorotheus)
활동년도 : +362년경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티레(Tyre)
같은 이름 : 도로떼오, 도로떼우스, 도로테우스
순교자 성 도로테우스(또는 도로테오)는 티레의 사제였고, 또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 교구의 주교였다는 설도 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박해가 다소 누그러지자 그는 양떼에게로 돌아왔고,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 참석하였다. 학식이 풍부한 그는 그리스와 라틴 시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저서들도 여러 권 있었다고 한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를 일으키자, 그는 잠시 발칸 반도 동부 트라키아(Thracia)의 오디소폴리스(Odyssopolis)로 피신하였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