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7일 주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보편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의무 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겨 지낸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는 이 미사에 기쁘게 참여하며 우리도 주님 안에 깊이 머무르는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하느님께서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라며,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먹게 해 주시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몰랐던 양식을 먹게 해주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8,2-3.14ㄴ-16ㄱ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4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16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16-17
형제 여러분, 16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과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탈출 17,2; 민수 20,3 참조). 탈출기에 나타난 싸움의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서로 “말다툼”(요한 6,52)을 벌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결과입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스스로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저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사변적 언어 표현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찢긴 몸과 쏟아진 피를 내 생명의 뿌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면서도 꼭 성체성사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이며, 삶이 그 믿음으로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드러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삶의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 삶과 생명을 이어 가게 하는 실제입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공허와 상처와 좌절의 자리에 그분의 살과 피를 들여놓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 대신 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 (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욕망을 끊어내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해답이 바로 '올바른 성체성사'입니다. 올바른 성체성사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머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체가 좋다면, 성체조배는 더 좋습니다. 하느님 자녀 됨의 마음을 더 오래,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자는,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는 것입니다. 빵을 주신 분을 영혼의 안방에 모시지 않고 빵의 단맛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자는, 결코 생명의 식탁에 영원히 앉을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 조금은 특별한 조각을 보았습니다. 광장의 한 모퉁이에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에는 한 노숙자가 누워 있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어떤 교구에 설치하려 했을 때, ‘품위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바티칸에 노숙자들을 위한 샤워실과 쉼터를 마련하고, 성탄과 부활에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에 따라 교회는 이 작품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황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외면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교회는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벤치 앞에 서서,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가 바로 저 자리에 계시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도 이와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성체는 단순히 받아 모시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정신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꽃동네입니다. 꽃동네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 의지할 곳 없는 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존엄을 지켜 줍니다. 꽃동네의 봉사자들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이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꽃동네의 사랑은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멕시코와 필리핀, 아이티와 페루와 같은 지역에도 공동체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이 부족한 곳에서는 함께 밥을 나누고, 병든 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들을 돌보며,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족이 되어 줍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그들이 나누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성체성사에서 비롯된 사랑이 국경을 넘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빵을 나누듯이, 그들도 한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의 의미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다시 먹이심으로써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자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며 기도했고, 그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빵을 나누며 우리는 하나의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그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신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파티마의 벤치에 누워 계신 예수님, 꽃동네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체를 제대로 모신 신앙인이 됩니다.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생명의 빵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람 밥 세상>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나를 살리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으로 삽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게 스미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을 품습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게 머무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께 머뭅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가 되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이 됩니다
당신이 된 내가
먹힘으로써
벗을 살리니
당신이 된 나를
먹음으로써
벗이 삽니다
당신이 된 내가
먹힘으로써
벗이 되니
벗은
먹음으로써
당신이 된 내가 됩니다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이
먹힘으로써
벗을 살리고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을
먹음으로써
벗이 삽니다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이 된
벗이
또
다른
벗에게
먹히니 먹고
먹으니 먹힙니다
살리니 살고
사니 살립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안토니오 마리아 지아넬리 (Anthony Mary Gianelli)
활동년도 : 1789-1846년
신분 : 주교, 설립자
지역 : 보비오(Bobbio)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이탈리아 제노바(Genova) 교외 체레토(Cerreto)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지아넬리(Antonius Maria Gianelli, 또는 안토니오)는 그곳에서 수학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이때 특별한 관면을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제 서품의 법적 연령에 미달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사목 활동과 교육 사업에 투신하다가 선교 활동에도 헌신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뛰어났고 또 고해신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 알폰수스 리구오리(Alfonsus Liguori)의 선교회를 세웠고, 또 마리아 수녀회(Sisters of Our Lady of the Garden)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병자를 돌보게 하였는데, 미국과 아시아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1838년 그는 보비오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951년 10월 21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 의해 시성되었다
복녀 안나(성 바르톨로메오의)(Anne of St. Bartholomew)
신분 : 수녀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626년
같은이름 :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안나는 '자비심을 갖다' 또는 '자비를 베풀다'란 뜻이다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의 안나(Anna)는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Teresa of Avila)가 위대한 하느님의 종이라고 칭찬하였던 그녀의 특별한 동료였다.
안나는 아빌라에서 4마일 떨어진 알멘드랄(Almendral)에서 농사짓던 페르디난도 가르시아(Ferdinand Garcia)와 마리아 만자나(Maria Manzanas)의 딸이다. 20세까지 그녀는 양치기로 일하다가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에 입회 허가를 받아 카르멜회 수녀가 되었다.
성녀 테레사는 마지막 7년 동안 늘 안나를 곁에 두고 모든 여행도 함께 하였고, 카르멜의 개혁 사업에 있어서도 안나 만큼 성녀를 협력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수차례에 걸쳐 안나는 검은 수건을 써야한다고 했으나 그 때마다 거절하여 늘 평수녀로 살았다.
성녀 테레사가 마지막 숨을 쉰 곳도 안나의 품속에서였다.
그 후 6년 동안 안나는 아빌라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때 프랑스에서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 설립을 종용하자, 테레사의 후임자인 예수의 안나 수녀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포함하여 5명의 수녀를 파견하였다.
그 후 안나는 퐁투아즈(Pontoise) 수녀원의 원장, 그 다음에는 투르(Tours)의 원장이 되었다.
또 네덜란드에 카르멜 수도원을 세웠을 때 안나는 몽스(Mons)로 갔으며, 1612년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에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1612년에 안나가 사망하자 2천 명의 주민들이 시신에 달린 묵주에 친구하러 줄을 설 정도로 그녀에 대한 공경은 놀랄 만큼 빨리 일어났다.
1917년 5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