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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2026년 6월 9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작성자이선정스테파노|작성시간26.06.09|조회수3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9일 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에프렘 부제 학자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게 하시고, 그 성읍의 한 과부를 부르시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7-16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칭(名稱)’과 호칭(互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칭은 주체가 ‘나’입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려는 이유를 발표하고, 친구들이 투표해서 반장으로 선출되면 그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반장’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저는 신용 협동조합 ‘업무 이사’를 했습니다. 명칭은 업무 이사이지만 하는 일은 신학교 매점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서품받은 후에 저의 명칭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보좌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작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8년의 보좌 신부 기간을 지낸 후에 교구는 저를 본당 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명칭은 주임 신부,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있을 때는 ‘교육 담당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가 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을 때는 ‘성소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주가톨릭 평화 신문에서 일할 때는 ‘사장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나의 행실과 행동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때로는 나의 외모와 말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신학생 때 친구들은 저를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은 싸움에 능했고, 관우와 장비처럼 도원결의했던 동지는 아니었지만, 제갈공명과 더불어 유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판매부 사장도 하였고, 타종 반에서 삼종기도를 치기도 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외적인 활동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직책이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과 행실이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 행동과 삶이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광인(狂人)’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은 상급자의 행동과 행실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천사,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악마, 욕심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칭’에 대해서 궁금해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옳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를 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호칭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힙니다. 소금과 빛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에프렘(Ephraem)

신분 : 부제, 교회학자, 성서학자

활동지역 : 에데사(Edessa)

활동연도 : 306?-373년

같은이름 : 애프램, 애프렘, 에프라임, 에프램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 태생인 성 에프라임(또는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Jacobus, 7월 15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325년의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성 야고보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시리아의 문헌에 의하면 350년의 페르시아 침입 때 그의 기도 덕분으로 니시비스가 해방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363년에 요비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재차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로마 땅인 에데사 근교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는 신자들에게 설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70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가서 성 바실리우스(Basilius)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372년과 373년 겨울의 냉혹한 기근을 덜어주는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에데사에서 운명하였다.

성 에프라임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 큰 저서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하여도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으신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그는 공식 예절에 찬미가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례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업적은 일찍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의 니시비아어 찬미가와 절기에 따른 찬가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황이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한 것은 시리아 교회 출신으로 서방 교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성 보구밀로(Bogumil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그네젠(Gnesen)

활동연도 : +1182년

같은이름 : 보구밀루스

성 보구밀루스(또는 보구밀로)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베르테의 도브로브(Dobrow) 태생으로 파리(Paris)에서 공부한 후 고향에 도브로브 성당을 세웠다. 그는 그 후 그네젠의 교구장으로 선출되어 1167년에 착좌하였다. 그는 가족의 영지를 희사하여 코로노바(Coronawa)에 시토 수도원을 세웠는데, 지혜롭고도 열성적인 그의 지도력에 성직자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교구가 크게 발전했다고 한다. 연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한 후 카말돌리회에 들어갔고, 우니에도브(Uniedow)에 있는 한 은둔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성녀 올리바(Oliv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팔레르모(Palermo)

활동연도 : +9세기경

같은이름 : 올리브, 올리비아

성녀 올리바는 시칠리아(Sicilia)의 팔레르모와 카르타고(Carthago)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사라센인들의 침략 때문에 13세 때에 고향을 떠나 튀니스(Tunis)로 갔다. 처음에 그녀는 귀족 출신임을 인정받아 튀니스 근교의 어느 동굴에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비록 동굴에서 살았지만 그녀는 뛰어난 신앙을 지녔기에 여기서도 여러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이윽고 사라센인들이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지하 감옥에 가두고 빛과 음식을 차단하였다. 뛰어난 용모 때문에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끓는 기름통 속에 던져졌지만 죽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는 수 없어서 그녀의 목을 베었는데, 이때 그녀의 몸에서 비둘기 한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녀는 올리브(Olive) 또는 올리비아(Olivia)로도 불린다.

 

 

복자 요한 도미니치(John Dominici)

활동년도 : 1376?-1419년

신분 : 추기경

지역 :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요한 도미니치(Joannes Dominici)는 18세 때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교육이 부족하고 또 말을 더듬기 때문에 한 때 많은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놀라운 기억력과 항구심은 자신의 모든 약점을 극복하는 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놀라운 설교가와 지도자격인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서 주해서와 두 편의 논문을 작성했고 토착어로 된 찬미가를 지었다.

12년 동안의 파리 대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치자 자신의 모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베네치아(Venezia) 지방을 다니며 설교활동을 하다가 피에졸레(Fiesole)와 베네치아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개혁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가 수도원의 총장을 역임할 때에는 청소년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1406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Gregorius XII)를 선출하는 회의에 참석한 이래 교황의 고해신부 겸 고문이 되었다. 1407년 산 시스토(San Sisto)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당대의 큰 이단들을 예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2년에 승인되었고, 이어 18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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