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2일 금요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사제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찾고자 애쓰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너희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이니,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한국에서는 소풍과 수학여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안전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서열화됩니다. 그러나 소풍과 수학여행에서는 달랐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서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친구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소풍을 가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응원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성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소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풍과 수학여행은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의 공간도 아니고, 규율의 공간도 아닌, 관계가 살아나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사랑입니다. 평가하기 전에 사랑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학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길 위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소풍과도 같고, 수학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평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불러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마음, 부족해도 품어주시는 마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소풍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잘 다루고, 또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봉사할 것입니다. 그 모든 모습이 소중합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점수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신앙은 평가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비교하기보다 격려하며, 평가하기보다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당신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느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넘겨주셨으니
믿음으로
믿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희망을
넘겨주셨으니
희망함으로
희망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넘겨주셨으니
사랑함으로
사랑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빛을
넘겨주셨으니
빛남으로
빛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넘겨주셨으니
기뻐함으로
기뻐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움을
넘겨주셨으니
고움으로
곱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움을
넘겨주셨으니
부드러움으로
부드럽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곧음을
넘겨주셨으니
곧음으로
곧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품음을
넘겨주셨으니
품음으로
품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눔을
넘겨주셨으니
나눔으로
나누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돌봄을
넘겨주셨으니
돌봄으로
돌보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살림을
넘겨주셨으니
살림으로
살리게 하렵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John)
활동년도 : +1479년
신분 : 수사, 신부
지역 : 사아군(Sahagun)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성 요한(Joannes a Sancto Facundo)은 에스파냐의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를 다녔고, 사제로 서품된 뒤에는 그 지방의 교구 사제로 활동하였다. 1463년 그는 중병에서 회복된 후 그곳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유명해졌다. 그는 어느 사악한 영주의 미움을 받아 독살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는 1601년 6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오누프리오 (Onuphrius)
활동년도 : +400년경
신분 : 은수자
지역 : 이집트(Egypt)
같은 이름 : 오노프리오, 오노프리우스, 오누프리우스
이집트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은수자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공경 받던 분이 성 오누프리우스(또는 오누프리오)이다.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파프누티우스(Paphnutius)란 어느 원장이 그를 만난 증언록이 남아 있다. 그를 만난 날 밤 파프누티우스 원장은 은수자 오누프리우스와 함께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저녁 음식이 기적적으로 차려졌다. 이때 오누프리우스는 파프누티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제가 죽으면 장사지내줄 사람을 보내준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윽고 오누프리우스가 운명하자 파프누티우스는 산언저리에 그를 묻었는데, 그 자리는 즉시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오노프리우스(Onophrius)로도 불린다.
성 레오 3세 (Leo III)
활동년도 : +816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성 레오 3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I) 서거 직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성 수산나(Susanna) 성당의 추기경 사제였던 그는 자신의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수많은 도전으로 시달렸다. 성 마르코(Marcus) 축일의 행진 도중에 반도들에 의해 피납된 그는 혀가 잘리는 등 거의 산송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적같이 급속도로 회복되어 모든 이들이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재임 기간에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대관하였다. 이 결과로 그는 교회 재건과 교황청과 국가들 간의 관계 회복을 성공적으로 성취시켰다. 그는 교황으로서 20년 간 재위했고 로마 순교록에 올라있다. 그는 1673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Gaspar Berton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777-1835년
같은이름 : 가스발, 가스팔, 베르또니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는 1777년 10월 9일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부유한 법률가이자 공증인이었던 프란시스(Francis)와 브루노라 라벨리 베르토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예수회와 베로나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학교에 있는 마리아회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11살에 첫영성체를 할 때 사제가 되리라는 환시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1796년 신학교에 입학한 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북이탈리아가 20년간 점령당했을 때 그는 병원사목을 위한 복음적 형제회에 참여하여 상처 입고 병든 이들, 혁명군의 점령으로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180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된 성 가스파르는 성 바오로 본당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형태를 빌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단체는 1807년 나폴레옹의 법령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결국 그는 더 나은 시기에 그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연기하였다.
그는 또한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4월 10일)가 성 요셉 수도원에 세운 공동체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그는 당시 수녀회의 지도신부와 신학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영성 지도자로서 활동하였고 또 잘 알려진 설교가였다. 18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 피르무스 본당으로 이동한 그는 주교로부터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부탁받은 후 자신의 사제관에서 잦은 모임을 통해 젊은 신학생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굳건하게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한 사제들의 쇄신이었다.
그는 당시 교황 비오 7세가 나폴레옹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교황을 위한 기도와 지원을 위한 전 유럽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은 언제나 교회의 ‘으뜸이자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교회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는 양떼를 다시 모아야 할 필요성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교우들에게 행해지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리교육과 설교에 투신하였다.
1816년 11월 4일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의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학교를 세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참회의 공동생활을 했고, 주교의 요청에 따라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고 사제를 양성하며 선교를 위한 설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성모 마리아(Maria)와 성 요셉(Josephus)의 보호아래 수도회를 맡겼다.
성 가스파르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오른쪽 다리의 발열과 계속되는 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병원 침대에서 지속적으로 상담자요 영성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1835년 6월 12일 그가 선종한 후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베로나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1975년 11월 1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녀 욜렌타 (Jolenta)
활동년도 : +1298년
신분 : 과부, 수녀원장
지역 :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 욜렌따, 욜렌타, 졸렌따, 졸렌타, 헤레나, 헬레나, 헬렌
헝가리의 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나(Maria Laskarina)의 딸인 욜렌타는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1월 18일)와 폴란드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7월 24일)와는 자매 사이이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5세(Boleslaw V)와 결혼한 언니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7월 24일)에게 보내져 그녀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곳에서 욜렌타는 칼리시(Kalisz)의 공작 볼레스와프와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두었다.
결혼 생활 중에 그녀는 나라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수도원과 병원 등의 주요 후원자였다. 그녀의 남편 또한 그런 아내의 자선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써 ‘신심 깊은 볼레스와프’(Boleslaw the Pious)라는 별칭을 얻었다. 1279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욜렌타는 클라라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녀는 폴란드의 그니에즈노(Gniezno)에 새 수도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여생을 수도 생활에 전념하다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27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6월 12일 또는 15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그녀는 또한 폴란드의 성녀 헬레나(Helena) 또는 욜란다(Yolanda)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