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의 복음묵상

2026년 6월 14일 (녹) 연중 제11주일

작성자이선정스테파노|작성시간26.06.14|조회수6 목록 댓글 0

2026년 월 6일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이 할 일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삶을 있게 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모세는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계약에 충실하면 주님의 축복 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불경스러운 인류를 의롭게 하시려고 돌아가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분의 죽음으로 인류는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남은 일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주신다. 악한 영을 몰아내는 능력이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능력이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이 함께한다. 그들은 기적을 베풀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다(복음). 

 

제1독서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9,2-6ㄱ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은
2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3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하게 되었다면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6-11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6-10,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5,1 참조). 이들은 고통과 질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난 이들이며(4,24–25 참조), 시대와 사회의 상처가 만들어 낸 불의이고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9,36).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은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정도의 의미로, 다른 이의 처지를 자기 안에 끌고 와 그 고통과 불행에 함께하는 깊은 자비를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자비는 대개 인간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향합니다. 이는 곧 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지 미리 밝힙니다. 교회의 첫 선포는 논리적 설명이나 사변적 논쟁이 아닌, 구체적 치유와 돌봄이었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묘사할 때, ‘시달리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민수 27,17; 참조: 에제 34장)의 심상과 연결되며,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목자의 자리, 곧 돌봄과 보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도와 율법, 그에 따른 심판만 남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구실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종말론적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이웃의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이고 구원이겠지요.(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착한 목자 되기: 행복한 성체 되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찬미 예수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에르리메노이'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처받고 길을 잃어 쓰러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채찍질도,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그들의 찢어진 상처를 보듬고 기를 살려 일으켜 세워 줄 '착한 목자'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를 보십시오. 그는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싸리나무 아래 쓰러진 채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1열왕 19,4 참조). 위대한 예언자도 기가 꺾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두 번이나 다정하게 깨우셨습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1열왕 19,7 참조).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기가 꺾인 이를 먼저 먹이시고,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에야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 19,6).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제, 즉 목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주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자신이 정화된 다음에 남을 정화시키고, 먼저 자신이 거룩해진 다음에 남을 거룩하게 하며,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된 다음에 남을 하느님이 되게 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89항 참조).

그렇습니다. 순서가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그다음에 남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꺼진 초가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심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야, 나는 내 불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백 개의 초에 빛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타인의 기를 살려주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인의 기를 살려주고 상처를 끌어안으려면, 아주 명확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먼저 뼛속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아, 내 기가 우주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남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를 가장 뼈저리게 증명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붉은 모반과 상악동 암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목자가 된 방송인 김희아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얼굴의 모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는 조롱과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얼굴에 암까지 찾아와 뼈의 절반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하느님께 제발 이 붉은 점을 없애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시며, 자신보다 더 아프게,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사랑하시는구나! 이 점은 흉터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사랑의 표식이구나!'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께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바닥났던 자존감은 하늘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의 모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 행복해지자, 그녀는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리는 완벽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야단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이를 안아주며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딸! 이만하기 다행이네.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하네. 그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엄마의 그 굳건한 평화와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먼저 넘어져 피가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감사하지요?"

야단치고 걱정만 하는 세상의 보통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기가 꺾일 뻔한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작은 일로 행복을 뺏길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감사를 통해 증명함으로써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의 피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고 그 압도적인 행복을 누려야만, 세상에서 기가 꺾인 이웃들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은 결코 기쁨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 안의 기를 살리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이 입증하고 모든 성인이 실천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망상활성계(RAS)라는 정보 필터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과 불만에 집중하면, 뇌는 온 세상에서 불행한 증거들만 수집하여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대로 "이만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뇌는 즉시 내 삶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들을 찾아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이미 감사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기만 합니다. 이 감사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이 바로 '잠들기 전 감사 일기 쓰기'입니다. 인간의 뇌는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입력된 감정과 정보를 수면 기간 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영혼의 무의식에 새겨넣습니다.

 

하루 종일 남을 흉보고 세상의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가 잠이 들면, 우리 영혼은 밤새도록 독극물에 절여집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내 삶에 주어졌던 감사의 조건 5가지를 손가락을 꼽으며 찾아보십시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미운 사람을 향해 한 번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기를 쓰기 어렵다면 누워서 손가락으로 꼽기만 해도 됩니다. 이렇게 감사의 문을 닫고 잠이 들면, 밤새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 영혼은 맹수에게 찢긴 양이 아니라, 세상을 포효하며 호령할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기운차게 깨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할 때, 이 '가엾다(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이 성체의 사랑을 매일 먹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작은 상처에 기가 꺾여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이 성체의 사랑을 내 삶의 현실로 번역해 내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넘어져서 피가 나면 "주님,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합니다"라고 웃어넘길 수 있도록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성체로 우리는 그럴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체조배로 그 믿음을 회복하고 키워가십시오. 밤마다 감사의 일기를 쓰며 영혼의 주파수를 천국에 맞추십시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행복해지십시오. 우리 자신이 행복한 성체가 되었음을 믿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찢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룩하고 행복한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성체로 살아가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숫자에는 상징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3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 삼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셋째 딸은 따지지 않고 며느리 삼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셋째 아들입니다. 반면에 4는 죽음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숫자 4와 한문의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음이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상징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오늘은 ‘40’이라는 숫자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40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준비, 회개와 변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이루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씻어내는 심판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노아는 40일이 지난 후에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물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40과 관련이 많습니다. 40년은 이집트에서 왕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40년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기도하였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물은 심판과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군사들은 물로 심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40일 동안 걸어가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했지만, 그 무너짐은 회개를 통한 변화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신 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40이라는 시간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같은 40이라는 시간이라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왕,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모두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똑같은 40년이었지만 그 결말은 서로 달랐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하느님보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사울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다윗도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눈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의 주인공이 되었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다윗의 삶은 회개를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솔로몬 역시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성전을 건축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졌고, 결국 이방의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아쉬운 삶이 되었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왕은 모두 같은 40년을 살았지만, 그 삶의 방향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쩌면 이 ‘40’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받은 은총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불평하며 살 수 있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 이 ‘은총의 40’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정화되고, 회개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울처럼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다윗처럼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시작만 좋은 삶이 아니라,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구원의 방주’가 되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엘리사(Elisha)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연도 : +9세기경BC

같은이름 : 엘리세오, 엘리세우스

성 엘리사(Eliseus)는 엘리야(Elias)의 계승자로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셨다’라는 뜻이다. 엘리사는 대략 기원전 850-800년경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지야, 요람, 그리고 여호아스 재위 기간에 활동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수많은 기적을 행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구약성서에는 그에 관한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신명기계 역사서인 열왕기 상하권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큰 단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17-19장과 21장, 열왕기 하권 1-2장에, 엘리사 이야기는 열왕기 하권 2-9장에 나타나며 그의 죽음 이야기가 13장 14-21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엘리사 개인에 관한 설화적인 이야기들과 사마리아의 역사적인 격동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아벨 므홀라 출신으로 사밧의 아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1열왕 19,16-21). 열왕기에 등장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적에 대한 것이다. 또 각 이야기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지 않는 독립된 이야기로 나타나며, 엘리사의 생애에서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일어났는지 등의 시간적인 연계성도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다만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며 이 기적들은 특별하게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또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엘리사는 ‘예언자’라는 명칭과 함께 자주 ‘하느님의 사람’으로 지칭되었다.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들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엘리사가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엘리야와 함께 예언자로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엘리사는 야훼 신앙을 저버린 오므리 왕조를 거슬러 계속해서 투쟁을 하며 오므리 왕조의 멸망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예후를 세우고, 다마스쿠스의 하자엘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엘리사의 사회적 역할의 장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바뀌어 나타나며, 그는 왕궁과 밀접히 연결되어 특별히 국방 부분에 많이 연계된다.

엘리사는 그 시대에 온전한 성실로 야훼 신앙을 지킨 하느님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가 행한 것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은 그의 확신 있는 행동의 능력을 보여 준다. 거칠고 단호한 몇 개의 설화는 야훼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고 이스라엘 역시 대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아주 힘든 시기에 그를 휩싸고 있던 신념과 확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신명기계 역사 속에서 민간설화에서 기억하는 대로 크나큰 능력을 가지고 초기 이스라엘에서 혼합주의 경신례의 위협을 거슬러 야훼 신앙을 고수하며 오로지 야훼만을 신봉하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엘리사는 죽었을 때도 살아 있을 때처럼 야훼의 생명을 전하는 도구로 묘사되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던 엘리사가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낳게 한 이야기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이야기와 함께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루가 4,27).

 

 

성 메토디오 (Methodius)

활동년도 : +847년

신분 : 주교

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같은 이름 : 메토디우스

시칠리아(Sicilia) 섬의 시라쿠사(Siracusa) 출신인 성 메토디우스(또는 메토디오)는 고향에서 공부한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궁중 관리가 되었다. 이것은 그의 재능을 인정한 황제 미카엘 2세가 강력히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년을 봉직한 그는 수도자가 되었고, 키오스(Chios) 섬에 수도원을 세웠으나 총대주교 니케포루스(Nicephorus)의 요청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서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성상과 성물 공경의 합법성을 더욱 강력히 주장하자 그의 선임자인 니케포루스(Nicephorus)와 테오필루스 황제는 그를 고문하고 감옥으로 보냈다.

7년 동안 옥살이 하는 동안 황제가 죽고 그의 아내인 성녀 테오도라(Theodora, 2월 11일)가 섭정에 오르자 이번에는 정세가 일변하였다. 성녀 테오도라는 성상 공경을 반대한 모든 칙령을 폐기하고, 성 메토디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즉시 콘스탄티노플 시노드를 소집하고 성상에 관한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칙령을 재확인함으로써, 이번에는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11월 11일)와의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종증으로 운명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