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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묵상

2026년 6월 19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작성자이선정스테파노|작성시간26.06.19|조회수5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로무알도 아빠스

 

말씀의 초대

여호야다 사제는 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를 죽이고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시며, 그의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은 다음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1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3 아탈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9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사제가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사제에게 갔다.
10 사제는 주님의 집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11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주님의 집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님의 집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12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3 아탈야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주님의 집으로 가서 14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15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가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여호야다 사제는 이미
“주님의 집에서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16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탈야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17 여호야다는 주님과 임금과 백성 사이에,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게 하였다.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계약을 맺게 하였다.
18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바알 신전에 몰려가 그것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그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들은 또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여호야다 사제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웠다.
20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방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세가 점점 들어가시는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곰곰이 따지고 보니 도둑들, 날강도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천신만고 끝에 출산해서, 그 오랜 세월 애지중지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 숱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드신 부모에게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참담함이었습니다.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도둑들이 목청을 높이고 활개를 칩니다. 그들은 아들, 딸이요, 며느리, 사위에다 손주, 손녀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자연스레 유산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질 텐데, 그걸 못 견디고 조속한 분배를 요구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가려고 기를 씁니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따로 없습니다.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보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대체 그 보물은 어떤 것일까요? 엄청난 은행 잔고? 잘 나가는 주식? 목 좋은 곳의 부동산? 아파트? 남부럽지 않은 건강, 사랑하는 사람? 재능? 자리?

사실 우리가 보물로 생각하는 대상들은 진정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보물의 특징은 영원성, 불멸성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썩어 내려앉고, 허물어질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물은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따뜻함과 친절함을 보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보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에게 내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건넸습니까? 그로 인해 그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로 인해 미소를 되찾고,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은 것입니다.

 

 

 

칭찬이 독이 되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빛이 눈을 통해 새어 나온다고 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깊겠느냐?"(마태 6,23) 그런데 빛이 어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빛이 어떻게 어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빛이란 내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곧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 그래서 무엇을 빛으로 삼아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의 전부를 결정한다. 하늘을 빛으로 삼으면 그 사람 안이 환해지고, 세상 것을 빛으로 삼으면 빛이라 여기던 그것이 도리어 어둠이 된다. 빛이 어둠이라는 것은, 내가 빛인 줄 알고 좇는 그것이 실은 나를 삼키는 탐욕이라는 뜻이다. 옛 영성가들은 이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 불렀고, 풀어 말하면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이다.

이 어둠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어느 반려견 훈련 프로그램에 순하기로 소문난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왔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겁을 먹고 드러누워 배를 보일 만큼 소심한 개였다. 그런데 그 착한 개가 유독 가족만은 물었다. 물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릎에 올라 재롱을 떨었다. 가족은 이 개가 본래 착한데 어떤 상처 때문에 그런다고 믿으며, 개가 화내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다. 심지어 개가 좋아하는 화분은 개가 없을 때만 몰래 닦았다. 보다 못한 훈련사가 말했다. 그것은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하며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고.

이 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랑도 받고 싶고 지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어서 가족을 두렵게 만들어 지배하고, 다시 애교로 사랑을 받아 냈다. 화분을 제 것으로 여겨 손대지 못하게 으르렁대다가, 자기 뜻대로 따라 주면 다시 예뻐했다. 이만큼만 받들어 주면 착한 개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가족은 개를 키운 것이 아니라 개를 섬기고 있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사가 이런 개에게는 순종하기 전까지 결코 잘해 주지 말라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어설픈 애정이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 개에게 "앉아"를 시키면 한참을 버틴다. 자기보다 낮다고 여기는 사람 앞에 앉아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칭찬이란 자기보다 높은 이에게 들어야 기분 좋은 법이니까.

성경은 이 어둠을 일찍부터 고발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봉헌물로 바치라 명하신 전리품 가운데, 그는 값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이 나 몰래 자기 천막 땅속에 묻어 두었다.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여호 7,21 참조)라는 그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 작은 어둠 하나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아이 성 앞에서 무너졌다. 빛인 줄 알고 끌어안은 금덩이가, 실은 그를 삼킨 어둠이었던 것이다. 게하지도 그러하다. 스승 엘리사가 한사코 거절한 나아만의 선물을, 게하지는 몰래 뒤쫓아 가 받아 챙겼다. 그러자 나아만에게서 떠난 나병이 게하지에게 옮겨붙었다(2열왕 5장 참조). 소유욕이라는 어둠은 결국 제 몸에 병을 새긴다.

삼구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칭찬하면 안 된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셨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끝내 빛으로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진주가 들어가도 짓밟힐 뿐이다. 그런 이를 어설피 잘해 주어 성당으로 끌어들이면, 그는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한다. 자기가 잘나서 받는 줄 알지, 결코 순종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아도 합당하지 않게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까지 당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유다에게도 당신 살과 피를 떼어 주시고 그 발을 씻어 주셨다. 그 유다는 끝내 스승을 발로 짓밟았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는가. 그가 원하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에게 주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내어 주셨기에, 이제 그의 멸망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본받을 자리도 여기다. 어둠을 빛이라 우기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와 잘해 줄 필요는 없으되, 그가 진정 원할 때는 끝까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가. 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두고 평하는 말을 엿듣게 했다. 한 사람은 줄곧 헐뜯기만 했고, 한 사람은 줄곧 칭찬만 했다. 또 한 사람은 헐뜯다가 끝에 가서 칭찬으로 맺었고, 마지막 사람은 칭찬하다가 끝에 가서 헐뜯음으로 맺었다.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느낀 상대는 누구였겠는가. 줄곧 칭찬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엔 헐뜯다가 마지막에 칭찬해 준 사람이었다. 가장 미운 사람은 누구였는가. 줄곧 헐뜯은 사람이 아니라, 좋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헐뜯은 사람이었다.

까닭은 이렇다.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을 향한 기대를 담는다. 시종 좋은 말만 하거나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짚은 뒤에 건네는 칭찬은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 준다. 다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을 살찌우는 칭찬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칭찬은 상대를 나를 부리는 가스라이터로 키울 뿐이다. 우리가 칭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사람이 참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 모습이다.

여기 합당한 칭찬의 본보기가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이다. 까다롭고 오만한 강박증 환자가 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다 칭찬을 한 가지 해 보라는 청을 받는다.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의사 말도 듣지 않던 자기가 약을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게 무슨 칭찬이냐 되묻자 그가 답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여인은 그것이 생애 최고의 칭찬이라 한다. 돈과 교만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탐욕에서 끌어내 주었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연 것이다. 누군가를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벗어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보다 큰 칭찬은 없다.

그러니 공부를 잘한다, 돈을 잘 번다, 얼굴이 곱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조심하여라. 그런 말은 나를 길들이려는 계략이거나, 나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에 더 깊이 빠뜨려 어둠으로 끌고 가려는 속삭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주고받아야 할 참된 칭찬은, 어둠을 빛이라 여기던 사람이 참 빛을 향하도록 돌이켜 세우는 칭찬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 안의 빛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빛나고, 그 빛이 눈을 통해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탁상용 일정표가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매년 일정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도 있고, 사제관에도 있고, 핸드폰에도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형제님 한 분의 도움으로 구글 드라이브 일정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자동으로 연결되니 어디서든지 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 편리한 시대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탁상용 일정표가 정겹습니다.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가는 그 느낌 속에 지나온 시간과 만났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의 일정표를 보면 대부분 신문 홍보와 신문사 행사 일정이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 미사 일정도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일정도 있었고, 동북부 ME 지도신부로 봉사하면서 봉사자들과의 일정도 많았습니다. 코로나 시절에는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모임과 캠프 일정이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일정들 속에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의 일정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의 일정표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미사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3달 정도의 미사표를 정리해서 주면, 제 일정표에 먼저 기록합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와 같은 전례 일정도 있습니다. 사순 특강과 대림 특강, 성모의 밤과 같은 본당 행사도 있습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 일정도 있고,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의 일정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미 잡혀 있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일정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와 장례미사입니다. 어떤 일정은 저를 지치게도 하지만, 어떤 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교구 사제들과의 만남과 피정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와준 일정도 많았지만, 사실은 제가 더 큰 위로와 힘을 받은 시간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을 깊이 흔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학생은 공부 일정표를 만들고, 회사원은 업무 일정표를 만들고,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정의 숫자가 아닙니다. 그 일정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일정표는 땅에만 기록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기록되는 일정표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시간, 아픈 사람을 찾아간 시간,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 용서하기 위해 참아낸 시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춘 시간이 바로 하늘에 기록되는 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런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입니다. 욕심과 욕망의 불을 끄는 삶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옳은 일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손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됩니다. 우주는 너무 넓어서 빛조차 수만 년을 달려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속도와 선행의 속도는 빛보다 빠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은 희생과 진심 어린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하늘에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닙니다. 하늘에도 기록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입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 속에 기도의 시간이 있었는지,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로무알도(Romuald)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연도 : 951?-1027년

같은이름 : 로무알두스, 로무알드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데오다토 (Deodatus)

활동년도 : +679년?

신분 : 주교

지역 : 느베르(Nevers)

같은 이름 : 데오다또, 데오다뚜스, 데오다투스, 디디에르, 디디엘, 디에

고향에서는 디에(Die) 혹은 디디에르(Didier)로 알려져 있는 성 데오다투스(또는 데오다토)는 프랑스 전역에서 널리 공경을 받는 성인이지만 기록상으로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는 655년경에 느베르의 주교가 되었고, 657년에는 성 아만두스(Amandus)와 성 엘리기우스(Eligius), 성 우앙(Ouen), 성 팔라디우스(Palladius) 그리고 성 파로(Faro)와 함께 상스 시노드(Synod of Sens)에 참석하였다. 7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그는 스스로 사임하고 보주(Vosges)로 가서 고적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불확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는 여러 명의 성인들과 유대를 맺었고, 그의 성덕은 매우 빛났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성화를 이기다 못해 이곳을 떠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갔으며, 여기서 이미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은수자들과 합류하였다. 성 데오다투스는 곧 그들의 지도자로 뽑혔고, 국왕 킬데릭의 도움으로 성당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공동체가 점점 커지자 이곳은 에벨샴 수도원이 발전하는 모태가 되었다.

자신의 관상생활과 현실적인 직무에 조화를 기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그는 또 그곳을 떠나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금의 생디에(Saint-Die)에 정착하자 곧 제자들이 몰려들어 또 다시 수도원을 세워야만 했다. 이때의 규칙은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의 것을 채택했다. 그는 성인이 되신 히둘푸스(Hidulphus)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서로 방문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등 두 성인의 일치를 심화시켰다고 한다.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ST. Juliana Falconeria)

동정

활동지역 : 플로렌스( Florence )

활동연도 : 1270-134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팔코네리아

플로렌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Seven Founders of Servants of Mary)중의 한분인 알렉시오 팔코니에리와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플로렌스에서 안눈시아따로 불릴 정도로 교회 일에 헌신적인 분들이었다.

그러나 율리아나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사람들은 그녀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녀는 이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고, 15세 때 성모의 종 수녀회의 3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자기 집에서 재속 수도자로서 기도와 자선활동을 하며 살았는데, 130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4세의 율리아나는 기도와 자선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일단의 복장을 하였으므로, "망토 수녀회"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도회가 정식으로 승인받은 것은 120년 후이다.

그녀는 71세의 일기로 선종하였고, 1737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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