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2일 월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또는
[홍]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말씀의 초대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 남왕국 유다만 남게 된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탓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시며,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기 전에 제 눈의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7,5-8.13-15ㄱ.18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는 5 온 나라를 치러 올라왔다.
그는 사마리아까지 쳐 올라와 그곳을 세 해 동안 포위하였다.
6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
7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8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13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18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노하시어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운이 좋다.” 혹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고, 뜻밖의 도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운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걷고, 또 걷고,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오솔길이 되고, 큰 신작로가 되고, 마침내 고속도로가 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희생, 용서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원망했고, 시대를 탓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무너졌고, 희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시간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상을 따르며 세상의 욕심에 흔들렸음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눈물의 자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목적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에 있어도, 달라스에 있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했습니다. 산행을 가면 저는 늘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 했고, 식사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로미테 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산장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를 맡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뒤처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형제님 한 분은 달랐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산 아래까지 내려가 약을 사 왔습니다. 저 역시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아무 불평 없이 저와 함께 산 아래까지 내려가 새 신발을 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 다른 산장으로 옮겨야 할 때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였습니다. 걷다 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성공이라는 산장에 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산장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적할 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의 길은 남을 판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길입니다. 원망과 비난 속에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때로는 험하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서로 손을 잡아주고, 기다려 주고,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로소 보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나를 봅니다
나를 보려
나를 봅니다
내가 보는
나를 봅니다
너를 보려
나를 봅니다
너를 보는
나를 봅니다
네가 보는
나를 봅니다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너를 봅니다
너를 보려
너를 봅니다
네가 보는
너를 봅니다
나를 보려
너를 봅니다
나를 보는
너를 봅니다
내가 보는
너를 봅니다
비로소
네가 보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피셔(John Fisher)
활동년도 : 1469-1535년
신분 : 추기경, 순교자
지역 : 로체스터(Rochester)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피셔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알바노 (Alban)
활동년도 : +209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알바누스, 알반
성 알바누스(Albanus, 또는 알바노)는 영국 본토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는 로마노-브리튼 사람으로 베를라미움에 살았는데, 이 도시는 지금 그의 이름을 따서 세인트 알반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는 도망해 온 신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다가, 그 자신이 체포되어 초자연적인 빛을 발하면서 순교하였다. 성 베다(Beda) 존자의 기록에 의하면 알바누스가 참수를 당할 때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전한다. 순교의 전설적인 곳은 홀머르스트 힐인데, 이곳에는 성 베다의 성당과 경당이 세워진 곳이다
성 바울리노 (Paulinus)
활동년도 : 353-431년
신분 : 주교, 저술가
지역 : 놀라(Nola)
같은 이름 :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는 로마(Roma)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Aquitaine)으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등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신분 : 인본주의자, 순교자
활동연도 : 1477-1535년
같은이름 : 도마, 토머스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