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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에 대하여

Re:반 삼위일체론자들을 위한 성경적고찰

작성자박용진|작성시간11.01.28|조회수765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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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신비한 관계(삼위일체)에 대한

역사적-성경적 고찰"

 

(이설 자료집-2/반 삼위일체론 반증)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목회부

"신성의 신비한 관계(삼위일체)에 대한

역사적-성경적 고찰"

 

(이설 자료집-2/반 삼위일체론 반증)

 

 

 

 

 

2009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목회부

이설자료집(2)

 

반 삼위일체론 반증자료집 발간에 즈음하여

 

재림교회는 현재 28개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교리들은 재림교회의 초기 선구자들이 처음부터 견해를 같이 했던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도 그랬습니다. 교리들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온전한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초기 지도자들의 견해가 절대불변의 진리였던 것처럼 생각하고 주장하는 무리들의 소리가 교회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재림교회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인도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미국에서 다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생겼으며, 최근 한국에도 들어왔습니다(스쿠시/한국 이름은 고형진, 한국어 능숙, 전남 나주에 거주). 그는 여러 교회와 목사들에게 반 삼일체론에 대한 자료를 발송하여 그 주장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가 다니던 교회는 두 무리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삼육대학교 신학연구소에 의뢰하여 그들의 주장의 성경적, 역사적 사실유무를 가름하여 반증하며,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교리가 얼마나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정당한 가를 재확립하고자 이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믿음을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세우는 연구를 해주신 삼육대학교 부설 신학연구소 소장 김상래 교수와 동 총무 김일목 교수의 노고와 멀리 미국에서 이에 동참해 주신 김명호 목사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이 자료가 우리의 믿는 바를 더욱 든든히 세우는 디딤돌 같이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확신합니다.

재림교회에 대한 신뢰심을 무너뜨리고자 쐐기를 박으며 파고드는 사단의 준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진리는 줄곧 무풍지대를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진 바람이 부는 세상을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곧 재림하실 것이며, 재림교회는 그날까지 굳건히 걸어온 길을 걸어 갈 것이며,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홍성선/한국연합회 목회부장

 

목 차

 

 

발간사

 

제1장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역사에 나타난

삼위일체 이해/김일목 교수 ----------------------- 7

 

제2장 신성의 신비한 관계(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고찰/김상래 교수 ------------------------ 41

 

제3장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의미/김명호 목사 ------------------- 61

 

제4장 루스벨이 신성의 제 2위이신 예수를 시기한 이유와

영원 전부터 삼위로 계시는 이유/홍성선 목사----------- 77

 

 

“신성의 신비한 관계(삼위일체)에 대한

역사적-성경적 고찰”

 

 

 

 

제 1 장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역사에 나타난

삼위일체 이해

 

김일목(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서 론 :

최근 한국재림교회 안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재림교회의 기본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과 성령의 신격을 부정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거의 무한한 시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출생하”신 아들이며, 그는 “아버지의 물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출생하신 바 되었”고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한다.

그 “아들은 출생하셨기 때문에 기원이 있”고 “시작이 있는 분”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성령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개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어 가진 하나의 영”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임재/생명/본질의 핵심/마음/능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주장하기를,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한결같이 삼위일체 반대론자들이었”으며, “심지어 화잇 자매 자신도 삼위일체를 믿는 감리교회에서 나와서 재림교회에 입문한 후로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말하기를 엘렌 화잇은 “삼위일체 교리는 비 성서적이므로 적극 반대하였”으며,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 전체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재림교회가 삼위일체를 믿게 된 것은 “선지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이단이라는 평판이 두려워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정통 기둥 교리”를 받아들임으로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의 재림교회가 천주교회를 닮아가거나 성경으로부터 떠나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재림교회는 초기 역사적 재림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사실인가?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다른 논고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재림교회 역사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고찰함으로써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1. 삼위 하나님에 대한 재림교회의 기본 신앙과 그 반대자들의 등장

 

 

1) 삼위일체에 대한 재림교회의 기본 신앙

 

재림교회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재림교회 기본교리 제2장, 제4장, 제5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 곧 함께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이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 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러나 재림교회가 처음부터 이러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재림교회는 그 초창기에 반(反) 삼위일체적인 입장(anti-trinitarians), 아리안주의(Arianism), 혹은 준(準) 아리안주의(semi-Arianism)적인 입장을 가졌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성경연구와 교리적인 발전을 통해 현재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trinitarianism)을 갖게 되었다.

2) 삼위일체 반대자들의 등장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재림교단 안에서는 초창기 반 삼위일체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1995년 Utrecht에서 있었던 대총회에서, Fred Allaback은 No New Leaders No New Gods라는 책자를 돌리며, “재림교회는 엘렌 G. 화잇이 돌아가신 오랜 후까지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으며, 성령은 개체를 가진 다른 신성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2000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총회에서도 반 삼위일체주의와 준 아리안주의가 초창기 재림교인들의 신념이었다는 이유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운동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으며, 그 주장은 한국에서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요지는 ‘엘렌 화잇은 초기 선구자들의 반 삼위일체 견해를 모두 받아들였으며, 죽을 때까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삼위일체적 견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엘렌 화잇의 증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고친, 진정성이 의심되는 진술이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성경이 아닌 천주교 전통에 기초한 이설로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 토대에서 떠난 배교행위’라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세계적으로 퍼져 가고 있으며, 이러한 반 삼위일체 운동으로 인해 지역 교회들이 점차 이 문제로 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반증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삼위일체 반대자들의 핵심 주장에 대한 반증

 

주장1) 엘렌 화잇은 죽을 때까지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엘렌 화잇이 “삼위일체 교리는 비 성서적이므로 적극 반대하였”으며, “삼위일체를 믿는 감리교회에서 나와서 재림교회에 입문한 후로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 반증: 초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재림교회 두 핵심 창설자들인 조셉 베이츠(Joseph Bates)와 제임스 화잇(James White)도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크리스챤 커넥션(Christian Connexion) 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삼위일체를 비성서적이라고 하여 거절”한 기독교의 한 분파로 제임스 화잇은 그 교회의 안수 받은 목사였다. 따라서 이들이 재림운동에 합류했을 때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그 교회의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례교인 이었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는 삼위일체를 신봉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살아계시고 진실하신 한 하나님, 그리고 그 신성에 세 분의 신격이 계심을 믿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신격은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아리안주의 혹은 준 아리안주의 입장을 가졌다. 오랫동안 리뷰지의 편집장을 역임한 우라이야 스미스(Uriah Smith)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첫 번째 피조된 존재”(the first created being)로 믿었다가, 후에 그의 견해를 바꾸어 예수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성부로부터 “출생한”(begotten) 존재라고 믿었다. J. N. 앤드류스(Andrews)도 성부 외에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시작이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므로 영원한 세월 전 어떤 지점에 시작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다. R. F. 코트렐(Cottrell)도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열국을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에 취하는 것과 같은 악한 의도의 한 증거”라고 하였고, J. N. 러프버로우(Loughborough)도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유로 “첫째, 그것은 상식에 어긋나며, 둘째, 성경과 반대되며, 셋째, 그 기원이 이교와 우화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외친 E. J. 와그너(Waggoner)도 삼위일체를 부인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가 영원의 날들 가운데 너무나 오래 전이어서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그것은 시작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삼위일체를 반대한 재림교인들은 J. B. 프리스비(Frisbie), D. M. 캔라이트(Canright), E. J. 와그너의 아버지 J. H. 와그너(Waggoner), 그리고 C. W. 스톤(Stone) 등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초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삼위일체를 이교 사상으로 간주하고 거부하였으나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엘렌 G. 화잇이다.

엘렌 화잇의 초기 진술에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글들이 몇 군데 있으나, 그녀의 전반적인 글들은 압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명백한 진술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72년] “그분(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생명만이 타락한 인류를 속량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충분한 가치를 가진 유일한 희생제물이셨다... 그분은 생명을 버릴 권세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

 

[1878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the eternal Son of God)과 대조되는 그들 자신의 노력의 무가치함, 연약함, 그리고 무능함은 그들로 겸비하게 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하며, 나아가 그들로 그들의 사업에 있어서 힘과 능력을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인도할 것이다.”

[1887년] “이 명령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the eternal Son of God)로부터 나온다.”

[1893년]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그분과 아버지가 같은 속성들을 소유한 한 본질이심을(he and the Father were of one substance, possessing the same attributes) 주장하시는 것으로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이시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오시지만, 별개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yet is a distinct personality).”

 

[1896년] “악은 세기들을 거쳐가며 축적되어 왔고, 성령, 신성의 제 삼위 되신 분(the Third Person of the Godhead)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저지되고 물리칠 수 있었다.”

 

[1897년]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무한하고 전능하신 분이었다. … 그분은 영원 자존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시다(He was equal with God, infinite and omnipotent. . . . He is the eternal, self-existent Son).”

“죄의 권세를 쥐고 있는 왕자는 다만 신성의 제 삼위되시는 분, 곧 성령(third person of the Godhead, the Holy Spirit)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

 

이러한 확증은 그 이듬해 출판된 시대의 소망(1898)에서 더 널리 보급되었으며, 더욱 영구적인 형태로 굳어졌다.

 

[1898년]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From the days of eternity the Lord Jesus Christ was one with the Father).”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In Christ is life, original, unborrowed, underived).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The divinity of Christ is the believer's assurance of eternal life).”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을 부르신다고 말하는 힘 있는 천사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들렸을 때에 구주께서는 자기 속에 있던 생명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the Saviour came forth from the grave by the life that was in Himself). ”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대표자이시나 인간적인 개체로 계시지 않으시며 따라서 자주(自主)하신다(The Holy Spirit is Christ's representative, but divested of the personality of humanity, and independent thereof).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때문에 방해가 되어 모든 장소마다 당신이 친히 계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지상의 그분의 후계자로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장소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접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유익을 얻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구주께서 성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실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지 않으신 것보다 그들에게 더 가까이 계실 것이었다.” “죄는 신성의 제 삼위(the Third Person of the Godhead)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으며,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실 것이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1899년] “하나님께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성령(the Holy Spirit, who is as much a person as God is a person)께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00년] “그리스도께서는 선재하시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Christ is the pre-existent, self-existent Son of God).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영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신 때는 결코 없었음(there never was a time when He was not in close fellowship with the eternal God)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무한한 능력의 전지하신 분들(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powers infinite and omniscient)로서 하나님과 진실로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자들을 받아주신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의 별개의 개체들(three distinct agencies)이 인류를 위해 함께 일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다(Christ is equal with God, infinite and omnipotent).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실 수 있으셨다.”

 

[1901년] “영원 지존하신 삼위일체,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The eternal heavenly dignitaries--God, and Christ, and the Holy Spirit)께서는 제자들을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 무장시켜 저들과 함께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하시며 세상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1905년] “우리는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e three highest powers in heaven,--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과 협력해야 하며, 이들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을 간직하신 분이시며(The Father is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bodily)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아들 하나님은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을 나타내신 분이시다(The Son is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manifested).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을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혜사는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을 가진 성령(the Spirit in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이며,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룩한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분이시다. 하늘에는 이와 같이 살아계신 세 분이 있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ere are 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 in the name of these three great powers--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침례를 받게 되며,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애를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양순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셨으며(From all eternity Christ was united with the Father) 주님께서 친히 인성을 쓰셨을 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당신의 성육신(成肉身)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칭호를 얻으셨다(In His incarnation He gained in a new sense the title of the Son of God).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하였다. 인간의 아들이면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셨다(While the Son of a human being, He became the Son of God in a new sense).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나시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간으로 출생하심으로 인류와 연분을 맺으셨다.”

 

[1906년] “성령께서는 개성을 가지고 계신다(The Holy Spirit is a person).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그리고 우리의 심령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또한 신성에 속한 개성을 갖고 계셔야만 한다(He must also be a divine person).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만물이 있기 이전에 존재하신 것이 틀림없다(If Christ made all things, He existed before all things). 이 문제에 관하여 하신 모든 말씀들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이어서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The words spoken in regard to this are so decisive that no one need be left in doubt).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또한 가장 고상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이셨다(Christ was God essentially, and in the highest sense).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He was with God from all eternity)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주관하시며 영원토록 찬양을 받을 분이시다.”

 

이상의 증언들을 통해서 우리는 엘렌 화잇이 확실한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가진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엘렌 화잇의 주장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라이야 스미스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피조된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그것을 출판하기 20년 전에 나왔다. 또한 성령 하나님도 신성의 개체를 가진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게인(Erwin Gane)은 엘렌 화잇이 “삼위일체를 믿는 유일신론자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엘렌 화잇이 죽을 때까지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주장 2) 엘렌 화잇의 복음전도라는 책은 삼위일체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재림교회가 “1946년에 삼위일체 사상을 옹호하기 위하여 복음전도를 편집하였다”고 주장한다. 재림교회가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문구들을 선택하여 마치 선지자가 삼위일체를 옹호한 것처럼 (복음전도를) 편집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 반증: 이런 유의 주장은 1898년 시대의 소망이 출간되었을 때에도 이미 제기되었었다. 특별히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530쪽)는 엘렌 화잇의 진술은 그 당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일부의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젊은 신학자 M. L. 앤드리어슨(Andreasen)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는 그 문장이 엘렌 화잇이 직접 쓴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편집자나 비서들이 고쳐 쓴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래서 1909년 캘리포니아 엘름스헤이븐에 석 달을 머물면서, 엘름스헤이븐 집에 있던 엘렌 화잇을 방문해 친필 원고를 읽을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엘렌 화잇은 기꺼이 수락하고 원고를 내주었다. 그녀의 친필원고를 보고나서 앤드리어슨은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후일 그는 회고하기를 “당시 나는 화잇 부인의 육필 원고에 적혀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시대의 소망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재림성도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삼위일체 이론을 포함하여 믿기 어려운 주장이 많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앤드리어슨은 1948년 로마린다 대학 채플 설교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재림성도들에게 큰 신학적 우려를 불러일으킨 시대의 소망에 나오는 문장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라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여러분에게는 별로 혁명적으로 들리지 않겠지만, 우리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문장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잇 자매가 그 구절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육필 원고를 살펴보니 출판된 그대로였다.”

 

그런데 지금도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엘렌 화잇의 글에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말씀들은 그녀의 비서들이나 편집자들이 개작하거나 조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엘렌 화잇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록하는 것을 알았다. 엘렌 화잇의 비서들이 하는 일이란 “단지 동의어만 제안하여 말을 바꿀 뿐”이지 “그녀의 생각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복음전도에 나타난 편집상의 개정도 엘렌 화잇의 본래의 진술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6년 4월 3일, 앤드류스 대학에서 있었던 “엘렌 화잇과 당면 문제들”(Ellen White and Current Issues)이라는 심포지엄에서 팀 포이리어(Tim Poirier)는 “엘렌 화잇의 삼위일체적 진술들: 그녀가 실제로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삼위의 신성,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 그리고 성령의 신격에 관한 엘렌 화잇의 출판된 증언들과 행간에 그녀가 손으로 쓴 기록들이 들어있는 인쇄 원본, 그리고 그녀의 친필원고 원본들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엘렌 화잇 저서들에 나타난 견해들이 참으로 그녀의 것이며 편집자들이나 비서들이 바꾼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엘렌 화잇의 복음전도가 삼위일체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주장 3)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들어온 것이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보다도 오히려 천주교의 유전에 기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이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킨 세력(천주교)에 의해서 큰 배도의 시기 동안에 ‘서서히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반증: 삼위일체 교리는 위의 주장처럼 이교 종교들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으나,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분명히 성경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그 사상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정교한 삼위일체 교리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은 “신학이 삼위일체 교리를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두 가지 애매한 구절이나 증언들을 가지고 확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난해한 성경구절은 더 분명한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조화시킬 때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다. 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덜 분명한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성경 해석의 원칙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교나 로마 가톨릭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본래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원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이었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이 후에는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변적 추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대 기독교 신자들의 하나님 체험에 기초한 매우 구체적이며 신앙적인 교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분의 신성과 죄로부터의 참된 구속, 그리고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진지한 묵상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 교회의 헬라 교부이며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Polycarp: 서머나 감독)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레니우스(Irenaeus, ca. 130--ca. 200)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은 성부와 성자, 성령의 대하여 증언한다고 주장했다”고 주장한다. 이레니우스는 삼위일체 사상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부 하나님은... 전 우주의 창조자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정해진 시간이 되자, 육체를 입으시고... 한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죄를 멸하시고,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정해진 시간이 되어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새로운 형태로 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시야 안에 있는 온 땅의 인간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되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경험에 직접적으로 근거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공식화 되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참된 신성을 고백했는데, 그 고백은 그 성격이 전적으로 신앙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아리안주의 논쟁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그 회의에는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는데, 서방교회에서 온 사람은 7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동방교회에서 왔으며, 여기서 로마의 주교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심지어 로마 주교 자신은 직접 참석하지도 않았고 그를 대신해서 두 명의 사제만 보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가 로마 가톨릭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은 재림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에게서 “영원토록 출생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분”으로 믿고 있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 교리와 차이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성자의 영원 출생설이나 하나님의 무감각성(impassibility), 불변성(immutability) 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구원경험에서 삼위일체를 이해했던 본래의 신앙고백 차원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삼위의 내적 관계를 묻는 추상적인 탐구로 빗나간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의 중세 가톨릭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중세 가톨릭의 신학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거의 단절되어 철저히 내적 비밀에 대한 사변적인 탐구”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안의 신비를 다루는 무의미한 사변” 혹은 “신앙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부수적 교리”로 여겨지고 있다.

 

엘렌 화잇의 글을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림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런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르다. 그녀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바탕에 있는 철학적 전제를 거부했다. 그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을 철학적인 용어가 아닌 관계적인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1899년, 그녀는 기록하기를 “하나님은 개성을 가지고 계신 분”(God is a person)”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1905년, 그녀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다음과 같이 관계적인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쌍방의 개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적과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개성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일체이다(The unity that exists between Christ and His disciples does not destroy the personality of either. They are one in purpose, in mind, in character, but not in person. It is thus that God and Christ are one).” 또 다른 결정적인 증언은 같은 해(1905)에 기록한 다음의 말씀이다. “하늘에는 이와 같이 살아계신 세 분이 있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ere are 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이다.

 

엘렌 화잇이 말한 “하늘에는 살아계신 세 분”(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이 있다는 개념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하나님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비록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핵심 진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진리는 성경과 관계없는 철학적 전제들로 인해 왜곡되었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에 대해 신학 역사가인 올슨(Roger Olson) 박사는 지적하기를, “어거스틴의 하나님은 비록 삼위일체이기는 하지만 거룩한 단순성, 불변성, 그리고 무감각성이라는 헬라 철학적 신학에 포로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그 하나님은 사랑과 동정심 많은 하늘 아버지라기보다는 위대한 우주적 황제를 더 많이 닮았다”고 하였다. 최근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많은 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변적이고 비실제적인 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는 세 신격의 영원한 사귐, 교제, 일치, 연합이라는 가르침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삼위일체를 관계적 관점에서 설명한 엘렌 화잇의 통찰은 최근 신학자들의 연구보다 1세기나 앞서 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선지자적인 통찰을 가졌음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확인해준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가 로마 가톨릭에서 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3.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교리 정립

 

엘렌 화잇의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여러 진술들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 내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재림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했다. 사람들은 출판물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을 계속해서 피했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아들이라는 사상도 가끔씩 출판물에 등장했다. 1900년대 이후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에 대한 사상을 크게 보급시킨 사람은 W. W. 프레스콧(Prescott)이다. 그는 1902년 리뷰 앤드 헤랄드(Review and Herald)지의 편집장이 되자마자 “복음서 기별 연구”(Studies in the Gospel Message)라는 권두언을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기사와 다른 기사들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성, 영원성, 그리고 개성을 강조하였다.

1919년 7월 1-19일에 성경대회가 있었다. 여기에는 선발된 교회지도자들, 편집장들, 성경교사들, 그리고 역사 교사들 36명이 참석하여 회합을 가졌으나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인정하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확실한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처럼 1900년대 초반 30년까지 재림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1)1931년 “기본 교리들에 대한 진술”(The 1931 "Statement of Fundamental Beliefs)

 

역사를 통해서 재림교회는 성경 외에는 어떤 신조도 채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래서 매년 출간되는 연감에는 기본 교리 혹은 신앙에 대한 진술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1년에 입장이 바뀌었다. 이것은 1930년에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 행정자들이 대총회에 재림교회가 믿는 바를 진술하는 내용을 연감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러한 진술은 정부 관리들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사업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진술의 초안을 작성할 네 명의 위원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22개의 기본 교리에 대한 진술을 만들었고 그리하여 그 “기본 교리들”에 대한 “비공식적인” 진술이 1931년 재림교회 연감에 포함되게 되었다. 그 기본 교리의 3항과 4항은 다음과 같다.

 

“신성 혹은 삼위일체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이시며,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전지하시며, 지혜와 사랑이 무한하신 영원하신 아버지와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그를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를 통해 구속받은 무리들의 구원이 완성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성의 제 삼위이시며, 구속 사업에서 위대한 재창조의 능력이 되신 성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 28: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며, 영원하신 아버지와 같은 본성과 본질을 가진 분이시다. 그분의 신성을 간직한 채, 그분은 인간 가족의 본성을 그 자신 위에 취하셨다.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사셨고, 우리의 모본으로서 의의 원칙들을 그의 생애에 구현하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관계를 증명하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아버지께로 승천하셔서 거기서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요 1:1, 14; 히 2:9-18; 8:1, 2; 4:14-16; 7:25.”

이상의 진술은 성경적 삼위일체의 교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2) 1980년 기본 교리들에 대한 달라스 진술(The 1980 Dallas Statement of Fundamental Beliefs)

1980년 달라스에서 대총회 총회가 개최되기 전에, 전 세계 지회들에 27개 기본교리의 초안이 보내졌다. 10개의 지회들로부터 온 194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각 분야의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그 제안들을 실행 소위원회들에 보내어 연구하였다. 대총회 총회에서는 각 지회들에서 온 많은 제안들을 수렴한 개정안을 가지고 토의한 후 마침내 재림교회 기본교리로 결의하였다. 신성에 관한 제2항은 다음과 같다.

 

“성부, 성자, 성령 곧 함께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이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불멸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그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면서도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지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히 경배와 숭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신 6:4; 마 28:19; 고후 13:14; 엡 4:4-6; 벧전 1:2; 딤전 1:17; 계 14:7)”

 

이처럼 기본 교리 제2항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재림교회의 입장이 잘 나타나있다.

 

 

4. 재림교회 역사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 이해에서 얻는 교훈

1) 삼위일체에 대한 재림교회의 교리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어린 아이가 하루아침에 어른으로 성숙하는 것이 아니듯이,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의 역사는 신학의 발전도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재림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립하는데 50년 이상이 걸렸다.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러한 재림교회 신학의 발전적이고 교정적인 속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재림교회의 초창기의 전통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림교회의 신학은 언제나 그리고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하려고 노력해왔다. 과거의 전통이 성경과 일치할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성경과 다를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과거의 전통도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어떤 전통이라도 결코 성경을 대신하거나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준 삼아야 할 유일한 전통은 교단의 과거 전통이 아니라 재림교인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2) 재림교회의 삼위일체 이해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엘렌 화잇의 명백한 진술들이 삼위일체 이해에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끌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성경을 탐구하도록 백성들을 격려하였으며 적절한 때에 신학적, 교리적 통찰을 제공하였다. 특별히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같이 철학적, 사변적 접근이 아니라, 상호 관계적인 차원으로 이해한 그녀의 진술은 신학적으로도 큰 공헌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가톨릭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도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회의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비실제적인 교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엘렌 화잇은 삼위 하나님은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시라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관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만약 삼위일체를 이처럼 상호 관계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말씀은 “단지 서술적일 뿐만 아니라 정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그 사랑은 상호 무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면 삼위 하나님은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분이 복수(複數)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가 없는 것이다.

 

상호 무아적인 사랑 가운데서 삼위 하나님은 자신보다 다른 존재들을 더 사랑하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구약성경(88회)과 신약성경(325회)에 나오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분은 자신을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로 나타내시며, 자신의 사명을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내신다. 그래서 스웨트(H. B. Swete)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second Self)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자신을 철저히 감추시고 오직 성부와 성자를 드러내시는 성령의 모습은 삼위 안에 있는 무아의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자도 언제나 성부를 높이고 성령을 의지하신다.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고(빌 2:5-8),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복종하셨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아버지를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7). 이러한 성자의 모습 역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무아의 사랑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도 성자와 성령을 의지하고 높이신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증언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성부 역시 성자와 성령을 무아적으로 사랑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갈리(Norman R. Gulley) 박사는 “타락하지 않은 지성적 존재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상상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단의 정신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품성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삼위 하나님 안에 나타난 무아의 사랑과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며,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3) 삼위일체 대한 바른 이해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은 유대교, 이슬람,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던 초창기 재림교도들 등, 반 삼위일체 신앙전통은 “언제나 율법주의적 구원관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전적으로 기초되어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못하기에 죄인이 선하고 순종적이 될 때에만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주어진 1888년 이후에,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신성을 인정해야 함을 인식하면서 반 삼위일체적 견해를 떠나서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참 종교의 핵심과 본질”일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총체”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를 신적 존재 내의 구별을 부인하는 유대교와 하나님의 단일성을 거부하는 이교로부터 원칙적으로 구별시키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전 구원의 주된 원천”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전 구속 계시의 핵심”진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며, 모든 특별계시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1888년, 엘렌 화잇은 이미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증언을 하였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이다...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영감적인 성경의 증언을 부인할 것 같으면 그 점에 대하여 그들과 토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단호한 이론일지라도 그것이 그들을 설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류이다. 또한 성령의 신성과 개성을 부인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성경에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31, 3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중보하시는 동안(히 7:17-8:2),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또 다른 보혜사”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롬 8:26-27). 실제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중보의 은혜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전 12:3).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상실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이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임을 확신할 수 있다.

 

 

결 론

 

재림교회는 그 동안 성소론, 종말론, 칭의론, 속죄론 등 많은 교리들에 대한 연구를 주의깊이 해 왔으나 삼위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연구하는 데는 등한히 온 경향이 있다. 따라서 최근 일어나는 반 삼위일체론은 재림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한국연합회 목회부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호남합회의 광주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연구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은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금번 집회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올바른 이해를 가질 뿐 아니라 교회를 그 견실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세우도록 주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제 2 장

신성의 신비한 관계(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고찰

 

 

 

김 상 래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부설 신학연구소 소장

 

 

 

 

 

 

 

들어가면서

 

 

 

● “오직 성경”을 그 기본 신조로 삼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931년 삼위일체를 기본교리로 인정하는 성명을 최초로 발표한 이래로 일관되게 그것이 성경적 진리임을 고수하여 왔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교회 내에서는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다.

● 그러나 지난 2000년 토론토 대총회에서 그것이 재림 운동 창시자들의 견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삼위일체 부인 운동이 고개를 들었고, 마침내 한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일은 미국인 선교사 고형진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고 주로 그가 머무는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하 측량>이란 책을 발행하였으므로 이제 그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이에 우리는 성경과 예언의 신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재확인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2) 성령의 인격성(personality)과 신성, (3)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에 대한 순서로 살펴보고자 한다.

● 그 모든 순서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한 엘렌 화잇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모두로 하여 시작하고자 한다.

(1) “살아계신 세분의 하늘 트리오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특별증언 B. No, 7. 62, 63 (1905), 복음전도, 615.

(2) “영원하신 하늘의 지존자들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The eternal heavenly dignitaries-God, and Christ, and the Holy Spirit).― 원고 145, 1901년, 복음전도 615.

(3)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e three highest powers in heaven—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특별증언 B, No. 7. 51 (1905), 복음전도 616.

 

 

 

 

 

I.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측량>의 주장과 성경적 반증 증거

 

<측량>의 주장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제로 출생하신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아버지 하나님이(마 3:16, 17; 17:5), 예수님 자신이(요 10:36), 그리고 사람들이(마 14:33; 16:15-16; 27:54; 요 11:27 등), 귀신들이(막 3:11; 5:7; 눅 4:3; 8:28 등) 모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많은 성경절들이 예수를 “독생자”로 묘사한다(요 1:14; 3:6; 요일 4:9 등).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고전 1:24, 30). 지혜는 창세전에 났다. 잠언 8:22-25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잠 8:22-25)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시작이 있다”(p, 27)는 뜻이다.

● 그러나 “그 때가 거의 무한한 시간 전이었기 때문에 유한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실상 시작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p, 28).”

●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을 나으셨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므로 알 바도 아니며 알 수도 없다”(p, 30). 그러나 “출생하셨다”는 것은 “창조되었다”는 것과는 다르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루스벨은 지음을 받았다(겔 28:13, 15). “출생하셨다는 것이 창조한 것과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루스벨을 통일시하는 것이다”(p, 30).

● 예수께서는 비록 시작이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그분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아들이 있으면 그 아들이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아버지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완전한 신성을 가지셨다. 두 분 모두 같은 신성의 본질을 가지셨으므로 두 분께 같은 존경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존경하고 경외할 때 우리는 최고의 존경을 하나님 아버지께도 돌린다”(p, 29).

● 그러나 분명히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셨다. 요 14:28에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고 하셨다. 여기 ‘크다’는 헬라어 단어 메이존(μείζων)은 “나이가 더 많다는 의미이다”(p, 32).

● “아들은 만물의 창조 이전에 출생하셨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아들인척을 하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도 아버지인척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출생하신 아들이시다.…만약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역을 맡아 수행하신다면 그분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시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다(p, 28).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영원 전에 출생하신바 되었으며 루스벨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서 창조된 것이 아닌 그분의 아버지의 물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출생하신바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뒷받침 하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증언이었으며 또 성경의 증언이다(p, 33).”

 

 

<측량>의 주장에 대한 반증

● <측량>의 주장은 예수를 첫 피조물이요 ‘한 신’(a god)이라고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보다 더욱 간교하고 미묘하다. 왜냐하면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지닌 분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1)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신성을 지닌 분이시지만 아버지에 의해 출생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신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2) 그래서 그분은 태초부터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과연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 출생하신 분이신가?

 

1) 성경의 증언

(1) 잠언 8장에 나타난 ‘지혜’에 대한 노래에 대해: “이 절에는 신격의 제 2위가 하는 사업과 분명한 유사성이 있다(참조 PP, 34). …그러나 이 절은 비유적이므로 원래의 기자가 의도했던 이상으로 비유를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력을 행사해야 한다.…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창조되었거나 하늘 아버지가 낳았다는 견해에 대한 지지를 여기서 발견하고자 노력해 왔다. 상징적이요 비유적인 성경절들로부터 교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은 일로 간주될 수 없다. …교리적 신조의 근거는 언제나 문자적인 성경의 진술에서 찾아야 한다(재림교성경주석 6:642).”

(2)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3)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한 다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고 그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고 격려하셨다. 즉 예수를 보지도 못했으나 그를 향해 도마처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니이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허락하신 것이다.

(4)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2) 예언의 신의 증언

(1)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In Christ is life, original, unborrowed, underived).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다”(시대의 소망, 530).

(2)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또한 최고의 의미에서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유의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복된 분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셨으며, 아버지와 하나이시나 구별되는 인격이시다”(R&H, April 5, 1906).

(3) “그리스도께서는 선재하시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께서는 당신의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으신 때는 결코 없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신다.”(Signs of the Times, August 29 1900, 복음전도, 615).

(4) “그는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와 동일하시다.…그는 영원하고 자존하시는 아들이시다”(Manuscript 101, 1897, 복음전도 615).

(4) 예수께서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선언하셨다. 화잇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하나이시다”(PP, 34)고 설명하였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의 의미

(1) 성경이 예수님을 “독생자” 혹은 “맏아들”로 묘사하면서 그분이 출생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 그분의 신적 본성과 영원한 존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2) “독생자”라는 헬라어 헬라어 모노게네스(monogenes)의 의미는 시간 속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슷하거나 유사한 것이 전혀 없는 “유일한” 혹은 “독특한”이란 뜻이다. 이는 신성의 구별된 인격체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맏아들”(prototokos)이란 단어도 어떤 시작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를 의미한다.

(3)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절을 아무리 많이 인용하여도 그것이 인간의 구속을 위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신성의 본질에 관한 것인지만 구분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예수께서는 신성의 본질상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그러나 인간 구속을 위해 “실제로” 성육신 하시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예수께서 인간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사실이 단지 그런 역을 맡으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성경과 예언의 신으로 확인되는 “예수께서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되심”의 몇 예들

(1) 호렙산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보증이었다. 이와 같이 그가 “사람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하셨다. 온유하고 겸손한 베들레헴의 아기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딤전 3:16)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나는(I AM) 선한 목자라”, “나는(I AM) … 산 떡이”다, “내가(I AM)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요 10:11, 6:51, 14:6; 마 28:18)라고 하셨다. 나는(I AM) 모든 허락의 보증이다. 내니(I AM)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보증이 되시고 하늘의 법칙을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의 보증이 되신다(DA, 24).

(2)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의 신원: ⓵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18:1-2). ⓶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6-17). ⓷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19:1). ⓸ “하늘의 두 기별자들은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 그분을 그에게 홀로 남겨 두고 떠났다”(PP, 139).

(3) 얍복강가의 언약의 천사: “야곱은 이제 그가 더불어 싸우는 상대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하늘의 사자와 씨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가 거의 초인간적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얻지 못한 원인이었다.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언약의 천사 그리스도였다”(PP, 196).

(4) 호렙산의 여호와의 사자: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출 3장, 4장 1-26절)니라. 그분은 언약의 천사로서 과거에 조상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던 분이셨다”(PP, 248).

(5) 여리고성 앞의 여호와의 군대장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명하셨던 동일한 명령이 이 신비스러운 낯선 사람의 참 성격을 드러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 앞에 서셨던 분은 지존하신 그리스도이셨다”(PP, 487).

 

 

 

 

II. 성령의 개체성과 신성에 대한 <측량>의 주장과 성서적 반증 증거

 

 

<측량>의 주장: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능력이다.

 

●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성경의 증언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존재의 핵심인 것이다. 그분의 귀중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죽시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말씀/임재/생명/본질의 핵심/마음/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개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진리는 미혹케 하는 이론인 삼위일체설의 가면을 벗긴다”(p, 41).

 

● <측량>의 주장은 성령의 개체성(personality)과 신성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측량>의 주장에 대한 반증

● <측량>의 주장은 예수를 첫 피조물이요 ‘한 신’(a god)이라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 성령의 인격성(personality)에 대한 증언

(1) 성령은 개성을 갖고 있다. 그분은 가르치시고(눅 12:12), 죄를 책망하시고(요 16:8), 교회 일을 지시하시고(행 13:2), 도우시며 중보하시고(롬 8:26), 영감을 주시고(벧후 1:21), 성화시키신다(벧전 1:2). 이런 활동은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는 없다. 오직 한 인격체만이 이것들을 할 수가 있다.

(2) 고전 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성령의 인격성을 확실히 증거한다. 그분은 “생각”을 지니신 분이시라 그 생각을 하나님이 아시고, 또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

(4)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5)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6) “성령과 우리는 ...한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

(7)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8) “하나님께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성령께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원고 66, 1899년.

(9) “성령께서는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증거가 생길 때 거기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증거하여 주신다는 증거가 따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개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그리고 우리의 심령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또한 신성에 속한 개성을 갖고 계셔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원고 20, 1906년.

● 성령의 신성(divinity)에 대한 증언

(1)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 4).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5-26).

(3)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시 95:6-9)→“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히 3:7-9).

(4) “죄의 권세를 쥐고 있는 왕자는 다만 신성의 제 삼위되시는 분, 곧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by the power of God in the third person of the Godhead, the Holy Spirit) 저지될 수 있다.― 특별증언 A. No. 10. 37 (1897)

(5) 성령은 다양한 신성의 속성을 지니고 계심. “진리의 성령”(요 16:13), “성령의 사랑”(롬 15:30)

 

 

 

Ⅲ. 삼위일체 구절들에 대해 “곡해된 풀이”라고 하는 <측량>의 곡해된 해석

 

여기서는 <측량>에서 “곡해된 성경절 풀이”라는 제목으로 예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데 인용되는 성경절들에 대한 해석 중 몇 가지를 선별하여 역 비판하고자 한다.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측량의 주장>: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8:16; 10:48; 19:5) 침례를 준 것은 예수의 명령을 받는 사도들이 그 명령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는 명령으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이 구절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침례를 베풀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에 필수적이다”(61)라고 해석하였다.

 

<해설> (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명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라는 뜻이라면 왜 사도들은 침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지 않았는가? 왜 꼭 예수의 이름으로만 주었는가? 그것은 결코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만” 침례를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도행전에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15번 가량 나오는데, 이 표현은 당시에 제자들이 하는 모든 활동에 적용되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 2:6; 4:30; 16:18 참조)으로 하였다. 설교할 때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행 9:27, 29참조)였다. 그래서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 5:28, 40 참조)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행전에서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의 권세로” 혹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제자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공식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의 명하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했다는 말은 “예수의 말씀대로”라는 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침례에 적용하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의 말씀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10:48)는 표현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마태복음 28:19의 명령을 달리 이해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 판단 오류이다. 특히 행 8:16의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라는 구절에 나타나는 “오직”은 헬라어 원어 순서상으로도 “주 예수의 이름”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침례를 받음이라”를 수식한다. 즉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직 침례만 받을 뿐이러라”는 뜻이다. (2) 이러한 이해는 화잇의 증언이 지지한다. “하늘에는 이와 같이 살아계신 세 분이 있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침례를 받게 된다”(There are 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 in the name of these three great powers—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those who receive Christ by living faith are baptized."(Special Testimonies, Series B. No. 7, pp. 62-63, 복음전도, 614). (3) 또한 이것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이 구절에 ‘아버지’와 ‘아들’이 없다고 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은 성령으로만 침례를 받으면 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 앞 절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라고 한다.

 

●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측량의 주장>: “이 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오직 한 번 쓰이며 특정한 한 분을 가리켜 쓴 것을 볼 수 있다.…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오늘날의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사귀기를 원하는 것이다.”(62).

 

<해설> 이 부분에 대한 <측량>의 설명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특정한 한 분에게만 쓰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하려는 의도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탄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입장마저도 버리는 것인가?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를 언급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롬 1:7; 기타 모든 바울서신의 서두)라고 표현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지 아니한다. 여하튼 이 구절은 어떤 왜곡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관계와 인격성을 명료하게 증거한다.

 

●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측량의 주장>: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왜 아버지께서는 ‘이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요’라고 하지 않으시는가?”(p. 63).

 

<해설> 이러한 비판은 <측량>의 비판이 균형을 잃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떤 단어가 문자 그대로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면 현대적 언어를 사용한 어떤 성경 설명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이런 논리라면 타 교단에서 우리에게 ‘왜 성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라고 하지 않는가’도 물을 수 있다.

 

●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측량의 주장>: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녀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영존하신”에 대해서는 “그러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면 시작이 없었다는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이러한 설명은 여하튼 <측량>은 예수께서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그래서 시작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와 영어로 “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설명하며, “전능하신”은 아버지 하나님께 사용되는 용어라고 설명한다.

 

<해설> SDABC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영존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SDABC, 7:153). 그러나 <측량>은 그것을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적용하여 “영원한”이란 단어의 의미를 “시작이 있은 이후 영원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영원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그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수식받는 명사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이다. 그런 존재를 수식하는 “영원한”을 근거로 “영원한 아버지”를 수식하는 “영원한”을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메시아 예언 중에 나오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명료한 구절을 “시작이 있는 영원한 아버지”라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가?

 

 

 

나오면서

 

● 조지 R. 나이트는 “삼위일체 회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위일체 부인 운동이 다시 고개를 드는 현상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2000년에 개최된 토론토 총회에서 삼위일체 부인 운동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깊은 실망’을 맛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이 왜 진리인지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재림운동 창시자들의 견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론대로라면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고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저녁 6시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나는 전통은 중세교회에나 어울리는 것이며 성경에 기초를 둔 운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맞섰다.…우리에게 중요한 유일한 전통은 재림신도들이 성경을 따르는 무리라는 사실이다.”(어찌 우리 잊으랴, 293).

● 나도 같은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한 성경절들을 다시 읽어본다. 그 뜻이 너무나 분명하다.

(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9)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3)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4)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1-2).

●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화잇의 진술을 다시 읽어본다. 너무나 명료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고 복잡한 설명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1) “살아계신 세분의 하늘 트리오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특별증언 B. No, 7. 62, 63 (1905), 복음전도, 615.

(2) “영원하신 하늘의 지존자들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The eternal heavenly dignitaries-God, and Christ, and the Holy Spirit).― 원고 145, 1901년, 복음전도 615.

(3)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the three highest powers in heaven—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특별증언 B, No. 7. 51 (1905), 복음전도 616.

● <여호와의 증인>들은 바벨론을 비롯한 모든 이방 세계의 신관이 삼신이라며 삼위일체 개념은 이방 신관의 영향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세상의 홍수 설화와 창세기의 홍수 기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비평적 학자들은 온 세계에 홍수설화가 퍼져 있기에 창세기의 홍수 기사도 바벨론 영향을 받은 설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성경의 기록대로 실제로 홍수가 있었기에 전 세계에 홍수 설화가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것들은 영감 없는 부패한 기록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의 영향으로 성경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하나님의 통일된 관계가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 부패한 이방의 삼신 개념들인 것이다.

● 1974년 처음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여 찬미를 배웠다. 1972년에 개편된 당시 찬미가 1장은 제목이 “거룩 거룩하다”였다. 영어 제목으로는 holy holy holy임에도 말이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성경에서 “거룩”은 반드시 세 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거룩”의 삼중송(trishagion)이다. 보좌 주위의 스랍들도(사 6:3), 네 생물들도(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그 때부터 1988년 개편될 때까지 나는 남들이 “하다”라고 할 때, 일부러 목청을 높여 “거룩”이라고 불렀다. 이후 성경을 연구하다가 저 유명한 제사장의 축복 기도에서는 “여호와”가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5). 그리고 흔히 감사의 시라고 불리는 저 유명한 시편 136편의 서론에서도 하나님의 호칭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3). 이제 나는 성경에서 이렇게 한 이유들이 좀 더 잘 이해된다. 나는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께 영광 돌려보내세”가 없는 예배를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가 아닌 침례를 어떻게 줄 수 있는지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하늘 위의 천군과 땅에 사는 성도들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 찬송 드리세 영광 찬송 드리세”라고 찬미할 때 거룩한 임재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며 사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제 3 장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이

위일체라는 의미

 

 

김 명 호 / 은퇴 목사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序 ;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 용어입니다.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교리인데, 삼위일체를 시인하는 여부로 이단 판단을 하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런데 일반 교인들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또 설명을 하려고 해도 아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성경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 복수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복수(複數)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원어에는 “엘로힘(!yhiOla>)”인데 복수입니다. 단수(單數)는 “엘” 또는 “엘로아흐”입니다. 엘로힘이라는 말이 구약성경에 약 2,600번 이상 쓰였습니다. 이 중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신도 엘로힘이라고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神像(창35:2; 출20:23; 신7:25), 신들(출23:13; 출23:24; 출23:32; 출23:33 등].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주로 신(神)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불레셋 사람들의 신(엘로힘)은 다곤이며, 모압 사람들의 신은 몰록입니다. 이처럼 이방신을 가리킬 때도 엘로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킬 때에도 엘로힘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엘로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밝혀놓은 것입니다. 여호와는 성경의 하나님(엘로힘)의 고유명사 이름입니다.

이 엘로힘이란 어형(語形)은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이 삼위일체 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명임을 확증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을 지칭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 신들에 대하여서도 같은 말을 사용한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복수로 계시(存在)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복수로 계시(存在)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唯一)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 이 말씀에서 이름을 가지신 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 셋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라는 단어가 복수(複數)가 되어야 문법적으로 옳지요. 그러나 이 말씀에 ‘이름’은 단수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하나뿐인 공동(公同)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뿐인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다 여호와이시며,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 아니면 여호와라는 이름을 취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닌데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면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삼위가 스스로 계시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이 그렇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것도 다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욥11:7,8]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 우리는 계시해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이해해야 합니다.

[신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나타내주지 않은 것을 알려고 무리한 추측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신학(교리)적 용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머리는 셋인데 몸뚱이가 하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체라는 말은 동등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부부일체(夫婦一體)라고 할 때에 남편과 아내의 몸뚱이가 하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데, 인격이 동등하고 계획과 목적과 행사가 동일하다는 뜻으로 쓰는 말입니다. 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도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몸뚱이가 하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백성에게 임금이, 제자에게 스승이, 자녀에게 부모가 가진 권위와 위치가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성경에 계시된 아버지, 아들, 성령은 그 존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령이 다 스스로 계셨기 때문에 그 존재에 있어서 동등한 것입니다.

 

 

2. “우리”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창3:22.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여호와께서 본래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일종의 위계질서(位階秩序) 같은 구분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계획 속에서 구원을 위하여 각각 맡은 업무(?)로 인하여 우리에게 그런 구분으로 계시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래는 모두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여호와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서 다시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사단은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선악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존재가 되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하신 분은 다 선악을 아시는 여호와이심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중 하나, 우리 중 둘이라고 하시는 복수 존재로서 여호와이심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나님(엘로힘=복수) 여호와가 유일하신 여호와이십니다. ‘오직 하나인 여호와’, 더 자주 쓰는 말로 표현하면 ‘유일하신 여호와’인데, 이 말씀은 절대 단일 존재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은 ‘우리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 복수 존재, 곧 우리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해 주신 그분들만이 여호와, 즉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는 유일하시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에 그 세분 외에는 여호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이 말씀은 창조하는데 여호와와 함께 창조한 다른 존재가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이 말씀대로라면 함께 한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한 분들이 있다고 분명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여호와 외에는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한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한 존재가 있다면 그분도 여호와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가 아니면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계시하고 있으며, 성령께서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계시합니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지은 것 중에 하나도 말씀 하나님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요1:14). 육신이 되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분명히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은 것 중에 하나라도 예수님 없이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창조에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욥 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도 창조에 함께 하신 분이시니 여호와가 아니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일에는 여호와 외에 함께 한 이가 없이 여호와 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우리”는 다 여호와시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온 우주에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개체로 계시는 분뿐입니다. 그래서 유일하신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유일하신 여호와라는 말씀은 절대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실 수 있는 스스로 계신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분들만이 유일하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인(유일한)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여기 창조자라는 원어는 복수(複數)입니다(보레이카 *ya,r]/B ;단수는 보르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온 우주에 그분들 외에는 자존자(自存者)가 없는, 자존하신 분으로서는 유일하신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는 세 개체이십니다. 그래서 창조자들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이 아니지만 삼위가 계시는 것은 확실한데 또한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고 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고 연구하여 만든 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곧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 세 분인데 그 세 분이 모두 스스로 존재하셨다, 온 우주에는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신 분은 이 세 분뿐이다’ 라는 뜻이 삼위일체라는 말의 뜻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리적으로 한 신성이 세 개체로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 여호와께서 세 개체로 계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3. 세 개체가 한 이름을 가지심

 

1) 아버지 여호와

[신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이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이의를 달 여지가 없습니다.

 

2) 아들 여호와

[사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자가 여호와라고 계시합니다.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구원자 여호와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칭호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적어서 읽는 발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 여호수아에게는 이렇게 풀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구원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3:11은 구주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라고 계시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시라는 사실은 자세히 살피면 성경에서 확실히 찾을 수 있습니다.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인데 그것을 “자기 영광의 보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광의 왕이심이 틀림없습니다.

 

[시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이 말씀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가 영광의 왕이라고 계시합니다. 그분은 전쟁하러 나갔다가 개선하고 돌아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들어오도록 문들이 열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분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장면이 확실합니다. 전쟁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시는 여호와 그분은 영광의 왕이시며 돌아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 여호와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단과 싸워 이기시고 구원의 일을 다 이루시고 돌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영광의 왕 여호와는 예수님이십니다.

 

(편집자 첨부) : 엘렌 화잇은 승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편 24편의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확실히 드러내셨다. 시대의 소망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과 사명 성취보고의 장면을 읽어보라.

시대의 소망, 833-835

“온 하늘은 구주를 하늘 궁정으로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승천하실 때에 그분이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고 그분의 뒤에는 부활하실 때에 죽음에서 놓임을 받은 많은 포로들이 뒤따랐다. 하늘 천사들은 찬양과 천국의 노래로 환호하면서 즐거운 행렬에 가담하였다.

저희가 하나님의 도성에 가까이 이를 때에 수행하던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기다리던 파숫꾼들은 즐거움으로 화답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그렇게 화답하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숭고한 찬양의 화답을 듣고자 함이었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다시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고 묻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을 듣는 것이 전혀 싫증나지 않기 때문이다. 호위하던 천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7-10)

 

그 후에 하나님의 도성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천사의 무리들이 영광스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문들을 통해 들어간다. 그 곳에는 보좌가 있고 언약의 무지개가 그 보좌를 둘러 있다. 거기에는 그룹과 스랍들이 모여 서 있고 하늘 군대의 지휘자들과 하나님의 대표자들이 그 앞에 모인다. 루스벨이 그 앞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비난했던 하늘의 의회와 사단이 거기서 자기의 나라를 세우려고 생각했던 죄없는 세계의 대표자들이 모두 그 곳에 모여 구주를 환영한다. 그들은 열렬하게 구주의 승리를 축하하며 저희 왕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소망, 833-835).

 

3) 성령 여호와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임하신다고 계시합니다. 비로 임하시는 여호와는 누구시겠습니까? 그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것으로 계시하시지 않았습니까.

 

[사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위에서부터 부어주어서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게 하고 아름다운 밭은 삼림이 되게 하는 것은 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령이 위에서부터 부어지면 그렇게 된다고 계시합니다. 비가 오는 것을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의 표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 늦은 비로 임하시는 여호와는 성령이심이 확실합니다. 성경의 이런 계시에 의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세 개체, 신약성경에 의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해 주신 삼위가 계시고, 이 삼위는 본질적으로 그 존재성에 있어서 다 “스스로 계신 분(自存者)”이기 때문에 일체이신 것입니다. 그 외에 능력, 목적, 사상 등이 일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언의 신의 증언들 중에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참고하도록 옮겨보았습니다.

 

[영원 지존하신 삼위일체 ― 영원 지존하신 삼위일체,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 무장시켜 저들과 함께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하시며 세상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원고 145, 1901년

The Eternal Dignitaries of the Trinity.-- The eternal heavenly dignitaries God, and Christ, and the Holy Spirit--arming them [the disciples] with more than mortal energy, . . . would advance with them to the work and convince the world of sin.-- Manuscript 145, 1901.

 

성령의 개성 ― 하나님께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성령께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원고 66, 1899년-(아본데일학교 학생들에게 한 연설에서)

성령께서는 하나의 개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심령에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증거가 생길 때 거기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증거하여 주신다는 증거가 따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

성령께서는 개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그리고 우리의 심령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또한 신성에 속한 개성을 갖고 계셔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원고 20, 1906년.

Personality of the Holy Spirit.-- We need to realize that the Holy Spirit, who is as much a person as God is a person, is walking through these grounds.-- Manuscript 66, 1899. (From a talk to the students at the Avondale School.)

The Holy Spirit is a person, for He beareth witness with our spirits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When this witness is borne, it carries with it its own evidence. At such times we believe and are sure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 . .

The Holy Spirit has a personality, else He could not bear witness to our spirits and with our spirits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He must also be a divine person, else He could not search out the secrets which lie hidden in the mind of God. "For what man knoweth the things of a man, save the spirit of man which is in him? even so the things of God knoweth no man, but the Spirit of God."-- Manuscript 20, 1906.

 

제 삼위 되시는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 죄의 권세를 쥐고 있는 왕자는 다만 신성의 제 삼위 되시는 분, 곧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 특별증언 A. No. 10. 37 (1897)

The Power of God in the Third Person.-- The prince of the power of evil can only be held in check by the power of God in the third person of the Godhead, the Holy Spirit.-- Special Testimonies, Series A, No. 10, p. 37. (1897)

 

지극히 높으신 세 분의 능력과 협력 ― 우리는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협력해야 하며, 이들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만드실 것이다.― 특별증언 B, No. 7. 51 (1905)

In Co-operation With the Three Highest Powers.-- We are to co-operate with the three highest powers in heave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 and these powers will work through us, making us workers together with God. -- Special Testimonies, Series B, No. 7, p. 51. (1905)]<이상 전도법 616쪽>

 

 

4. 아버지 여호와와 남편 여호와

 

우리는 아버지 여호와가 계신 것을 확인하였습니다(신32:6). 그런데 또한 남편 여호와가 계신다고 성경은 계시합니다.

[사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아버지 여호와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버지 하나님을 그의 백성의 남편이라고 부른 곳은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교회의 남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남편 여호와는 예수님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일하신 여호와이신 것을 성경이 분명히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설명 외에도 예수님이 창조주이신 여호와이시며, 성령도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할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자세하고 복잡한 설명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만큼만 말하려고 합니다.

이사야 44:24과 함께 이 설명들을 익숙하게 이해하면 삼위일체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제 4 장

루스벨이 신성의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툰 이유와

“오직 하나인 여호와”가 영원 전부터 삼위로 계시는 이유

 

 

 

홍 성 선 / 목사, 한국연합회 목회부장

 

 

 

 

(1) 루스벨이 신성의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툰 이유

 

성경에 기록된 선과 악의 싸움에서 마귀(루스벨)가 삼위와 싸웠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는데 “미가엘과... 용”(계 12:7)이 싸웠다고 하였다.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용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계 12:9)이며, 루스벨(계명성, 사 14:12)이다. 왜 루스벨은 아버지도 성령님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다투었는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딤전 6:16)이시다.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볼 수 있는 형상이시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루스벨은 피조물 중에 최고로 영예롭게 지음을 받은 자였으며,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는 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3-14)이었다.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형상이 보이지 않았으나 아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광체와 형상이셨으므로 루스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영광스러운 형상과 비교하여 보며, 자기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루스벨은 피조물이었고 아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 시기의 대상일 수 없었고, 비교의 대상일 수도 없었다. 오묘한 일이지만 루스벨의 마음속에 아들 하나님에 대한 질투심이 생겼다. 그는 무역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무역은 점점 흥하였으나 불의하였다(겔 28:15-16). 그의 불의한 무역은 그의 “성소” 곧 그의 내면의 정신과 마음을 더럽게 오염시켰다(겔 28:18). 겉으로는 여전히 선하고 영광스러운 천사인척 하였지만 내면에 흐르는 야심은 어느새 하나님의 보좌 곧 “북극 집회의 산”(사 14:13)에 좌정하여 하나님 노릇을 하고자 하는 반역의 길을 가고 있었다. “집회(集會)의 산(山)”은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이는 산”이라고 풀어 말할 수 있는데, 사단이 동참하고 싶었던 “회의 자리”는 다름 아닌 삼위 하나님이 의논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를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회의”(렘 23:18)라 하였다. 루스벨은 형상이 “영화로우므로”(겔 28:17)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아들과 같은 줄로 착각을 하여 “마음이 교만하여”(겔 28:17)져서 본질적으로 자존자이며,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삼위의 회의자리 곧 하나님의 보좌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루스벨의 탐심과 질투심은 용납될 수 없는 반역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루스벨이 예수와 다투게 된 성경이 말해주는 이야기 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요 1:14) 우리 죄인들 가운데 계실 때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셨으므로 더러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또한 “죄 있는 육신”들이므로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같지 아니하다.

 

 

(2)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삼위로 계시는 이유

 

1)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의 속성을 여러 모양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시 106:1, 116:5, 출 34:5-6). 그러나 이 모든 선한 “형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말이다. 하나님이 삼위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인 여호와”의 존재구조는 영원 전부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나룰 수 있는 관계는 최소한 둘 이상이면 되는데 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는가? 혹시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삼위가 아니라 이위(아버지와 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인간 가족의 모형이시기 때문이다.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는 성경에 많이 계시되지 않은 영역이므로 잘 모르지만 지구와 사람을 창조하신 창세기 1장과 2장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가족의 이상적 “형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 창조를 의논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고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 창조하자고 의논하셨다. 그리고 의논하신대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창 1:27)셨다. 여기서 “우리”는 그 본성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사랑이 가능한 최소한의 관계인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과정을 창세기 첫 두 장에서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사람은 잠재적으로 삼위의 형상이었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면 그러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녀를 낳아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가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인 삼위의 “우리” 모양과 같아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우리”라는 사랑의 형상인 삼위 모델로 이루어졌다. 삼위만이 이러한 사실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창세기 첫 두 장에서 검증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엿새 동안에 한번 “좋지 않다”고 하셨고 한번 “심히 좋다”고 하셨다. 언제 무엇을 창조하신 후에 “좋지 않다”고 하셨는가? 아담(남자, 남편)을 창조하신 후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셨다. 아담이 한 남자로 창조된 것은 사람 외의 모든 만물이 창조된 후이며, 여자는 창조되기 전이다. 이때 왜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는가? 아담이 살아가는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배필을 지으시는 과정 중에 짐승들의 이름을 짓게 하는 장면이 지나가는데 모두 동류(同類)의 짝이 있었으나 사람으로 창조된 아담만이 사람이라는 동류의 짝이 없이 혼자였다. 이것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은 아직 혼자였기 때문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 “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으며, 사람을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하셨던 것이다. 이 설계도대로 여자 하와를 지으셨고, 그녀를 “아담에게고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창 2:22-23)하였다. 이제 사랑을 나룰 수 있는 “우리”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삼위와 같은 모습의 “우리”가 되려면 하나의 관계가 더 있어야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우리”의 형상이 완성되었는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날 자녀로 인하여 인간 가족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 “우리의 모양”이 완성될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이 영원히 자존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단일신론은 이점에서 결정적으로 성경적 진리가 아님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단일신으로 “독처”하신다면, 하나님 자신이 좋지 않은 상태로 계시는 것이며, 그런 좋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독처”하신 적이 있었다 해도 하나님이 좋지 않은 상태로 계신 때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시며, 영원히 사랑이시며, 영원히 심히 좋으신 분이시다. 품성은 관계다. 품성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좋은지 나뿐지 판단할 수 없다. 무엇이 좋다든지,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관계 속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三位)라는 관계를 통하여 사랑이시며 좋으신 하나님이셨다.

십계명은 하나님 품성의 사본이다. 그 십계명은 관계의 계명이다. 신인(神人) 간의 사랑관계(제 1-4계)와 인인(人人) 간의 사랑관계(제5-10계)에 대한 계명이다. 그러므로 십계명도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우리”라는 사랑의 관계 간의 계명인 것이다.

 

3) 영원한 공생사회의 모델

하나님은 지구를 사회로 창조하셨다.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로 창조하셨다. 지구는 아담과 하와, 육지와 수중과 공중의 암수로 이루어진 생물들, 산들과 강물과 바다들에 사는 생물들 등 다양한 가족들로 구성된 사회다. 하나님의 우주가 물론 그러하다. 그런데 그러한 거대한 “우리 사회”가 평화로운 공생을 추구해 나가는데 있어서 바라볼만한 모델 사회는 무엇인가? 교회라는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델을 흔히 기독교 초기 사도시대의 유무상통하던 시대로 여긴다. 그리고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견해 차이와 심한 다툼까지 있었다. 유무상통하던 사도시대보다 더 바라볼만한 이상사회의 모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완전한 하나 됨과 완전한 사랑이셨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공존 공영하는 사회의 영원한 모델이다. 영원한 공생원리의 근원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창조주 자신이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일치를 보이지 못하는 존재라면, 우리 사회가 바라볼 평화로운 공생의 모델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첫째, 성령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의 평화로운 공생관계를 보자.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보내실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요 14:17)이라 하셨다. 이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예수 시대는 갔다. 이제는 나 성령시대이다. 전에 예수가 뭐라고 말했든 이제부터는 내 말을 듣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렇게 말한다면,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과 성령을 따르는 자들 사이에 평화로운 공생은 불가능하고 서로 싸우다 공멸하는 관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 “성령이 오시면...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16:13-14).

 

임의성의 한계와 무한계는 신과 인간의 차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초월자이시면서도 임의로 하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그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며, 또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하였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가르치고 세워놓으신 것을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 더욱 가치 있게 하여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할 것이었다. 이러한 두 사이에는 다툼과 공멸함이 있을 수 없고 평화로운 공존과 공생함이 영원하게 될 것이다.

매우 특이한 성경 절이 하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2-33절이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 시니라.” 성령님은 이전에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벧후 1:21)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항상 일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떠나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자신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이미 기록된 말씀과 같은 말을 하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추구할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평화로운 공생관계를 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전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역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마칠 즈음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 4-10).

예수님은 줄곧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추구하셨고 스스로 자기 영광을 챙기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으로 자기의 보람과 영광을 삼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초월적 존재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요 1:1-3, 사 9:6)이시지만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고만 하셨습니다(요 5:30). 예수님은 세상에 성육신 되어 탄생하시는 날부터 인류구원을 위한 거룩하신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까지 내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 탄생 때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아버지께 영광이요”(눅 2:14)

* 생애 중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요 2:11, 마 15:31)

* 죽음 때 -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마 27:54).

 

셋째,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광을 위하심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므로 당신이 기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계명을 지키리라”(요 14:13-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내 이름으로” - 예수님의 선하신 속성을 따라, 예수님의 정신으로 구해야 하고(출 34:5-7), 이렇게 할 때는 “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계명의 정신과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 18:15-19, 교회요람 244, 참고).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할 때 예수님의 정신과 그분의 계명의 정신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하는 것이 거절되거나 보류될 수 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5-56).

* 흠정역 - “너희가 너희의 영이 어떠한지 모르는도다.”

* 한글 KJV -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내게 구하면” -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께 구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인간 자식들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딤전 2:5)이시기 때문이다. 인간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해 주시려는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져서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요 15:13-14).

“내 계명을 지키리라” -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지적 존재자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원칙과 완전히 일치하는데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사랑의 봉사 곧 당신의 품성을 인식함으로써 솟아나는 봉사를 원하신다. 그분은 강제적 굴종을 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부조, 33, 34)

 

성령님은 예수님의 생애와 삶이 인류의 소망이 되고 구원의 공로와 은혜가 되도록 하므로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자 하셨으며, 예수님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과 이루라 명하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으며,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하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고, 아들이 잘되는 것으로 기쁨과 영광을 삼고자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의 잘되는 일은 다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자녀들의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다 부모의 근심과 슬픔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상호간에 추구하는 정신은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거주 가족들에게 평화로운 공생과 사랑의 영원한 법칙이며 모델입니다.

 

그러나 루스벨의 정신과 야심은 전혀 삼위 하나님 간의 정신과 반대였다. “하나님의 형상”과 곧 사랑의 형상과 본질적으로 반대였다. 전적으로 이기적인 자기추구였으며, 근거 없는 교만이었다. 본질적으로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창조주의 자리와 영광을 추구할 수 없는 주제에 감히 자기를 “북극 집회의 산에 좌정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기리라”(사 14:13-14)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영광만 챙기려는 이기적 정신의 길은 공멸의 길이다. 영원히 평화로운 공존 공생의 길은 삼위 하나님의 길이다. 반 삼위일체 교리 즉, 단일 유일 신론의 하나님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공생원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처럼 조화로운 세계를 창조하였지만 죄는 조화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세계를 파괴하고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귀는 지금도 마지막 남은 교회의 세계적 연합과 하나 됨을 파고하려는 이설의 쐐기를 박아 틈을 내고 와해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죄로 인하여 평화와 조화가 파괴되고, 하나 됨이 파괴된 우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생애와 구속을 통하여 완전한 조화와 완전히 평화로운 공생과 사랑의 한 가족으로 하나 됨이 회복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atonement) “하나 됨”(at-one-ment)을 의미한다. “하나 됨”이 완성될 때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한” 자들에게 “의가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다(미 6:8, 벧후 3:13). “거기서 죽지 않을 특권을 얻은 사람들은 창조력(創造力)의 경이, 속죄애(贖罪愛)의 오묘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쁨으로 명상한다.”(대쟁투, 677).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대쟁투, 678).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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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용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1.28 위의 파일을 풀어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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