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리스도 인류의 구주
1. 문 : 구약 시대에 사람에게 직접 나타나신 여호와는 누구입니까?
답 : 성육신 전의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시다.
1)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음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요 1: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 4:12).
지구 창조 이래 성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은 없다. 구약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만난 것인가? 그들이 만난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다.
2) 아브라함을 만난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창 18: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 18:1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 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 18: 22, 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33).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6~58).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는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 당시의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있느니라”의 헬라어 원어는 “에고 에미”(ἐγώ είμι)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나는 나다” 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 곧 여호와란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3) 모세가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이시며 곧 그리스도이심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시니라…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2~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성부)이 파송한 사자(사신)이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사신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대표자로서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의 사자로 역사하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신약 시대에 인성을 입고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4) 기드온을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이시며 곧 그리스도이심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2~14).
기드온을 만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성부)이 파송한 사신(사자)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부 하나님(여호와)이 파송하였으므로 성부 하나님 자신이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구약 시대에도 일하셨다. 아버지 하나님과 신성은 같으나 개체가 구별되었으므로 여호와의 기별자(사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대사 곧 “여호와의 사자”라고 칭하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천사란 용어이나 일반 피조물인 천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을 항상 강조한다. 여기에서 천사의 의미는 본성적인 것이 아닌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다.
5) 마노아가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이시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yail]P, 펠레, 기묘자 - 개역 개정판]니라.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삿 13:17~19).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1,22).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yail]Pi, 필리)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마노아를 방문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성부)이 파송한 사신(천사)이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기묘”(yail]P, 펠레)라고 하였다. “기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중에 하나이다. “기묘, 기묘자”는 히브리 원어 “필리, 펠레”(yail]Pi ,, al,P,)로서 어원은 동일하며 그 뜻은 경이로운, 기이한, 불가사이한 등이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사망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마노아는 하나님을 대면하였지 어떤 피조물인 천사를 본 것이 아니었다.
마노아를 방문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성자) 하나님이시며 후일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대표자로서 구약 시대에도 자신을 낮추고 구속 사업을 수행하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구약적인 이름이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명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자신은 여호와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사자로 스스로 낮추시고 충성하시며, 사단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본성을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다.
6) 여호와의 사자( &a;l]m 말리크)
여호와의 말라크(사자, 천사)는 특별한 천사의 존재를 나타낸다. 이 사자의 특징도 다른 사자들과 같이 동일한 일반 영역의 기능들을 가진다. 여호와의 사자는 불타는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자기를 가리켜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다(출 3:6).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의 속박에서 구해낼 군대의 지도자가 되라는 사명을 주었다(삿 6:11-14). 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 그들이 장차 아들(삼손) 하나를 얻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었다(삿 13장).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에게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하늘의 존재로, 그의 배후에서는 천사의 개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따라서 천사가 나타나는 것을 본 자가 그의 속성(이름)을 시험하고 간파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참조: 삿 13:17).
여호와의 천사는 거의 언제나 이스라엘이나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나타난다. 사실상 그는 여호와의 실재적 현현이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의인화된 도우심이다(출 14:19 민 22:22 삿 6:11-24 왕하 1:3 이하).
우리는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언급이 인간과는 상관없이 여호와를 언급할 때는, “여호와”라는 말이 사용되며, 인간이 그를 목격하는 곳에서는 “여호와의 천사”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 표현은 여호와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예: 창 18장; 출 23:20-23).
여호와의 거룩하심은 이스라엘을 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의 사자만이 이 백성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H. Bietenhard, DNTT). 오직 그의 사자만이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과 중보하는 사역을 수행한다(슥 1:12 3:1-5).
그의 신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 외에도 그를 본 자들은 하나님을 본 것처럼 놀라워하며(삿 13:21-22), 그는 일인칭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창 16:10 출 3:2, 6; 삿 2:1).
그는 기능면에서의 유사함, 특히 앞에 언급된 중보 기능에 근거하여 볼 때,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된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 울 수 있다(삿 13:6, 9; 참조: 삿 13:3). (참조: A. BOWLING; DDTT).
2. 문 :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성부 하나님과 다른 개체(인격체)입니까?
답 :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며 구별된 개체로 자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1) 여호와 하나님의 구별된 개체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들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 24,25. 개역 개정판).
소돔과 고모라에 직접 심판을 집행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은 땅에 계셨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을 만난 후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집행하셨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시다.
반면에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땅에 내리신 -여호와는 심판의 주관자이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의 본성은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개체는 구별되셨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일한 칭호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는 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각각 구별된 개체(인격체)로 계신다.
2) 구원의 주관자 성부와 구세주 성자는 한 본성의 여호와이심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요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
스가랴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구별하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반면에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실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 세상에 메시야로 -여호와를 파송하셨다. 그러므로 한 여호와 하나님이 복수 개체로 자존하신 것을 구별하여 표현하였다.
“-만군의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로 파송된 “-여호와”는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시다.
3. 문 :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왜 “여호와의 사자”라고 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낮춘 이름이다.
1) 창세로부터 구주의 활동
“여호와의 사자”는 구속 사업을 전담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즉 인류의 구주로 직접 활동하신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계 13:8). 인류가 죄를 지은 후에 구주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구약 시대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도 여전히 구속 사업을 수행하셨다.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 가운데 나타나신 것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지도자 모세를 선택하기 위함이었다(출 3장).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하신 것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표상인 이삭의 출생 곧 이적적인 생명의 탄생과 메시아의 조상의 계보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창 18장).
기드온을 방문하신 것도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속박에서 구원하기 위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함이었다(삿 6장). 마노아의 가정을 방문하신 것도 이스라엘을 불레셋의 속박에서 구원할 지도자 삼손의 기적적인 출생을 위함이었다. 이 모든 경우와 인물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나타내는 예언적 표상들이다.
2) 고난당하는 구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만 자신을 낮추시고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자” 또는 “종”으로 일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여호와의 종”, “나의 종”(사 42:1), 고난당하는 “의로운 종”(사 53:11), 말라기 선지자는 “언약의 사자”(말 3:1), 사도 바울은 주님을 고난 받는 종, 사도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반역한 교만한 사단과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과 희생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피조물인 사단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종”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우주를 다스리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다.
4. 문 :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우주 세계에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 하신 분은 신성의 둘째 위를 가지신 그리스도뿐이다.
1) 구약시대에 활동하신 여호와는 그리스도이심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아담 시대로부터 마지막 역사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부조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시대의 소망 3권 248).
“지상의 최초의 거주자들이 그들의 성소를 택했던 곳은 에덴동산의 나무 밑이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조상과 교통하셨다”(시대의 소망, 290).
아담,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직접 활동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신 구주이시다. 인성을 입으시고 영원히 인류와 하나 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알게 된다.
2) 요한복음에 증거 된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7~9).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곧 성자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에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직접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인류 창조 이래 성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본 모든 사람은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ἐγώ είμι)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표준 새 번역).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ἐγώ είμι) 줄을 알고”(요 8:28).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ἐγώ είμι)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다”(요 13:19).
위의 말씀에서 “내가 그”는 헬라어로 ἐγώ είμι(에고 에미)이다. 영어로는 “I am He”가 아니고 “I AM”(내가 곧 나)이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즉, 여호와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로 믿지 아니하면 멸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생명”(요 14:6)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스스로 있는 자”의 특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소유하신 본질적인 생명을 얻어야 영생하며 그것이 곧 구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내가 있느니라” 헬라어는 에고 에미(ἐγώ είμι) 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셨다는 뜻이다. “영원토록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연합하셨다. 그가 인성을 쓰셨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셨다”(영문, 가려 뽑은 기별 1권, 228).
3) 인류의 구주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보여 주시려고 오셨다. 신 ․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신성의 둘째 위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한 “여호와의 사자”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신약에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는 “여호와의 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주님의 지상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성을 입으셨다.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시고, 죄의 값을 갚아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하시고 부활 후에 승천하여 신성을 회복하셨다.
4)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대표자 그리스도
“하늘에 거룩한 세 분이 살아 계신다. 이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세 분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산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이 침례를 받는다. 이 세 권세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려고 순종하는 백성들로 더불어 협력할 것이다”(영문, 복음전도, 615).
“There are 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 in the name of these three great powers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ose who receive Christ by living faith are baptized, and these powers will co-operate with the obedient subjects of heaven in their efforts to live the new life in Christ.”(special Testimonies, Series B, No. 7, pp. 62, 63. 1905, EV, 615).
“거룩한 세 분은 인류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갖고 계시며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데 다 같이 협력하신다”(영문, 건강에 관한 기별, 222).
5. 문 :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합니까?
답 :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한다.
1) 요한복음 1장 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 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
Ἐν αρχἦ ἦν ὁ λὸγος, καὶ ὁ λὸγος ἧν πρὸς τὸν θεὸν,
καί θεὸς ἦν ὁ λὸγος.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ἦ πρὸς τὸν θεὸν.
그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태초의 시작 시점을 알리는 헬라어 관사 “호”(ὁ)가 없다. 그러므로 이 성경절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말씀(로고스, λὸγος)이 계셨다는 뜻이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도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이시며,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항상 밀접히 함께 계셨기 때문에 헬라어 원어 프로스(πρὸς)를 사용하여 긴밀한 결속과 친교를 나타낸다. 만약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었음을 나타내려 했다면 “곁에”라는 뜻의 헬라어 파라(παρα)나 “함께”라는 뜻의 메타(μετ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신 때가 결코 없었다”(복음전도, 615).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본성적으로 하나이시다. 여기에서 서로 구별되는 두 신격 즉, 말씀과 하나님이 확인된다. 그분들은 본성과 뜻과 역할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분들은 모세에게 창조주로 나타나셨으며, 그리스도는 이제 요한을 통하여 세상의 구주로 나타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하나님” 단어 앞에 정관사 (the)가 없다. 헬라어에서 정관사가 없을 경우 그것은 그 단어가 나타내거나 그 단어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신성의 본질을 소유했으며, 그분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신적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다.
문법적으로 “하나님”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속성이나 질을 강조하는 자리 즉, 동사( 엔, ἦν)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식 무관사 질 명사라고 부른다(Colwell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 λὸγος )으로 부른 것은 우주의 창조주와 유지자, 이성과 지성의 원천, 위대하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란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로고스(λὸγος)란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헬라 문화에 익숙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를 헬라적인 사상이 아닌 히브리적인 사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말씀이셨으며 아버지와는 구별된 개체를 가지신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다. 결코 열등한 분이 아니다. 말씀과 아버지와의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동등한 친교였다. 신성에는 완전한 연합이 있고 동시에 신성의 개체들 사이에는 친밀하고 완전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뚜렷한 하나님의 개성을 가지시고 존재하셨으며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탁월한 영광이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하늘의 모든 지적 존재자들을 호령하시는 사령관이셨고 천사들의 숭배와 존경을 당신의 권리로써 받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7).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소망, 530).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모든 만물이 다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본이시다. 단 하나의 존재라도 그분의 행위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창조도 일어나기 전에 말씀(λὸγος)은 이미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문법적인 분해와 이해
jEn ajrch'/ h\n oJ lovgo",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위 원문에서 끝 부분에 나오는 데오스(하나님, qeo;"]]]])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하나님(영어- a god)로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즉 말씀이 신들 중에 하나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되면 유일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성경 전체에 말씀에 맞지 않게 된다.
만약 예수님이 신들 중에 하나라면 그리스도교는 유일신교가 아니고 각기 차등이 있는 두 신이 따로 존재하는 이신교(二神敎)가 되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도 여러 신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이신 하나님을 계시한 말씀이다. 사도 요한은 신성(神性)의 개체(個體)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주의 깊게 기록한 것을 성경을 곡해하려는 사람들이 그릇되게 이용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법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헬라어 문장에 있어서 서술적 명사는 보통 관사를 가지나 서술적 명사가 동사 앞에 나오면 관사가 떨어진다. 이것을 “콜웰의 법칙”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마지막 부분(kai; qeo;" h\n oJ lovgo")에서 하나님(qeo;")은 서술적 명사이며 말씀(oJ lovgo")을 설명하는 낱말이다. 콜웰의 법칙대로 한다면 “호 로고스”(oJ lovgo")가 먼저 나오면 데오스(qeo;")도 “호 데오스”(oJ qeo;" )라고 해야 된다. 이렇게 써도 문법적으로 맞다. 그런데 요한이 이렇게 안 쓴 이유가 있다. 만일 여기서 “호 데오스”(oJ qeo;" )라고 하면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 하나님이 동일 개체가 된다. 즉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그 하나님이라”가 된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 하나님은 한 개체가 된다.
그래서 한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개체인 말씀 하나님 곧 예수님을 뚜렷이 드러내려고 짐짓 그렇게 쓴 것이 틀림이 없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의 다른 개체임을 증거 하려고 의도적으로 쓴 말씀이다.
2) 요한복음 1장 1, 2, 14절
요한복음 1장 1,2절을 14절의 내용과 비교해 본다. 요한복음 1장 1~5절은 “말씀”의 신적인 선재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14절은 인간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본성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은 “계셨다.” 헬라어 시제는 과거의 지속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그분은 항상 계셨다. 그러나 14절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시점을 말해준다. 14절에서 “되었다”고 번역된 단어는 3절에서 “지은바 되었다”고 번역된 단어와 같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그것은 창조 행위였으며, 그분의 영원한 속성에 첨가된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나 또한 육신이 되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로 바뀌었다.
* 영원하신 분(요 1:1) * 땅에 속하신 분(요 1:14)
“계셨고.” “되셨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시니라.” “육신이 되시니라.”
3) 그리스도의 신성(요 5:18, 10:30,33)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 모독죄로 죽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하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0,33).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을 신성으로 이해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그러나 개체는 연합이 아닌 구별됨을 보여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은 아버지와 하나임을 주장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고 칭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의의 신성(본성)은 생각과 뜻과 목적과 목표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4) 독생자(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칭하신다. 우리말 표현으로 보면 독자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번역상의 표현 문제일 뿐이며 실제로 태어났다는 시간적인 의미가 원어에는 전혀 없다.
“독생자”의 헬라어 원어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이다. “모노게네스”는 하나를 의미하는 “모노스”(μὸνος)와 종류와 유형을 나타내는 “게노스”(γἐνος)의 합성어이다(μὸνος +γἐνος). 그 뜻을 직역하면 “유일한 것”, 또는 “유일하고 독특한 것”, “유일자”이다.
독자 출생을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는 “모노겐나오”(μονογενναω)이다. “모노겐나오”는 하나를 의미하는 “모노스”(μὸνος)와 낳다를 의미하는 “겐나오”(γενναω)의 합성어이다(μὸνος +γενναω). 그러므로 “모노게네스”와 “모노겐나오”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다르다.
“모노게네스”는 헬라어 신약성경에 아홉 번 사용되었다. 그 중에 다섯 번은 예수님께 적용하였다(요 1:14,18, 3:16,18; 요일 4:9), 그리고 나머지 네 번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눅 7:12, 8:42, 9:28; 히 11:17). 새국제역성경(NIV)은 “모노게네스”를 “하나 밖에 없고 유일한”(one and only)으로 번역하였다. “모노게네스”의 의미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은 히브리서 11장 17절이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μονογενή)를 드렸느니라”(히 11:17).
이삭을 “모노게네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에게는 장자 이스마엘이 있었다. 또한 이삭 외에도 일곱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창 16:15,16, 25:1,2). 이삭은 유일한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이삭뿐이었다. 오직 이삭만이 유일하며 독특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모노게네스”는 육신적인 출생이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세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용어이다.
예수님께 이 용어를 적용한 것은 독특한 분으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한 것이다. 그 의미는 유일한 분, 독특한 분, 비교할 수 없는 분, 유일한 세상의 구주로서의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와 창조주로서의 선재성과 구세주를 의미한 것이다(사 9:6 참조).
5) 먼저 나신 자(골 1:15,18).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 15).
“먼저 나신 자”의 헬라어 원어는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이다. 이 용어의 시간적 의미는 “먼저 태어난 자”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사용할 때는 “가장 뛰어난 자”, “으뜸”, “우두머리”란 뜻이다.
골로새서 1장 18에서 “그는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먼저 나신 자”가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이다. 만약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가 “제일 먼저 태어난 자”란 시간적인 순서의 의미라면 예수께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약(왕하 4:5)과 신약 시대에(요 11:44; 마 17:3; 막 9:4; 눅 9:30; 유 9) 이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시간적으로 제일 앞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고전 15:23)를 모든 부활을 있게 하시는 분 곧 “부활의 주관자”, “부활의 근본”이란 의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을 때 다윗을 “장자를 삼고 세계 열 왕의 으뜸이 되게”(시 89:23,24) 하겠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장자”라는 말을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에서는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로 표현하였다.
다윗은 그의 형제 중에서도 막내였다.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 보다 먼저 있던 믿음의 조상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제일 먼저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야 31장 9절의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여기에서 “장자”의 용어도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이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야곱)의 장자가 아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시간적인 제일 먼저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로토토코스”(πρωτὀτοκος)는 시간적인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용어를 그리스도께 적용할 때, 모든 창조를 시작하신 분 곧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란 뜻이다.
6)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prosdecovmenoi th;n makarivan ejlpivda kai; ejpifavneian th'" dovxh" tou' megavlou qeou' kai; swth'ro" hJmw'n Cristou' jIhsou,”
위의 성경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라고 말한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격이 같은 두 명사가 접속사(카이, και)로 연결될 때 첫 명사에는 정관사(the)가 붙으나 둘째 명사에는 정관사가 붙지 아니한다. 이 때 둘째 명사는 처음 명사와 항상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문법을 그린빌 사프(Granville Sharf)가 발표하여 “샤프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붙고 “카이”(και, 그리고) 다음의 “구주”에는 정관사가 없다. 그러므로 “크신 하나님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말 성경은 문법에 맞게 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이와 같은 문법에 해당되는 베드로후서 1장 1절의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이 성경절은 “우리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된다. 공동번역은 “우리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문법에 맞게 정확히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시다.
7) 창조의 근본(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근본”의 헬라어 원어는 “아르케”(ajrch)이다. 이 용어는 시작이란 의미이다. 본 성경절은 문법적으로 능동태와 수동태로 해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격은 그 자체가 능동과 수동을 결정하지 않고 의미상으로만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근본”을 수동으로 해석하면 창조의 시작 곧 “피조물”이 된다. 반면에 능동으로 해석하면 창조를 시작하신 분 곧 “창조주”가 된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능동과 수동을 구별할 뚜렷한 증거가 없을 때 성경 전체 사상과 조화시켜서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 곧 창조주로 칭한다. 그러므로 이 성경 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를 시작하신 분 곧 창조주이심을 말한다.
8) 하나님의 본체 (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과 한 신성이시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본체”의 헬라어 원어는 “모르페”(morfhv)이다. 이 용어는 어떤 사물의 본질적인 것 곧 결코 변하지 않는 형상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할 때 불변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불변적인 형상은 신성 곧 신의 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적인 형상 곧 “스케마”(σχήμα)는 변할지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본성)이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에서 “취함” 또는 “강탈”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하르파그모스”(aJrpagmov")이다. 이것은 “하르파조”(aJrpavzw , 붙잡다, 빼앗다, 잡아채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강탈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성부와 한 신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강탈하려고 도전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비워(신성)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바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비어[비워]”의 헬라어 원어는 “케노오”(kenovw)이다. 자의적으로 비운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통이 빌 때까지 그 안에 가득한 물건을 꺼내는 것. 그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쏟아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다. 마치 통 속에 담긴 것을 다 쏟아 버리듯이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다.
주께서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께서 인간으로 생애 하는 동안 인성이 당하는 고난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마치 자신 속에 신성이 없는 것처럼 전혀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와 똑같은 인성으로만 생애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죄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인성으로 온전히 승리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을 빌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되지 않은 능력을 당신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시험을 대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써 승리하셨다.
그 분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괴로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과 그의 봉사의 본질을 명백히 드러내셨다. 그분의 생애는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24).
9) 인간의 수준을 유지함
“사단은 그의 시험으로 세상의 구주를 속여서 그분으로 하여금 신성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생명의 왕께서 신성에다 인성을 입으신 채로 그분이 책임을 진 구속의 계획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하늘 궁정에서 존경을 받은바 있는 분이셨고, 절대적인 힘을 익히 알고 계셨다. 그런 분이 인간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다는 것은 마치 타락한 본성을 가진 낮은 수준의 인간이 향상 되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흑암의 왕의 권세를 누르고 승리하기 위하여 그의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억누르기 위하여 그의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는 참으로 처절한 시련을 당하셨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인성의 약점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최대의 힘을 기울였다”(리뷰지. 1875. 4. 1).
“인간으로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신성과 인성을 연결시킬 하늘의 전류로 충전되기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탄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끊임없는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으셨는데 이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363).
10)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 나타남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잠시 동안 그가 입으신 인성으로 가려졌지만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인성은 신성을 대신하신 것이 아니었고 신성도 인성을 대신하지 않았다. 이것은 경건의 비밀이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밀접하게 그리고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되었지만 그 양성은 확연히 구별되는 개별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그는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셨다. 그가 신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신성은 그대로 있었다. 예수께서 비록 슬픔과 고난과 도덕적인 더러움에 둘리어 있고 하늘의 율례를 위탁 받은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하였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 관하여 하늘에 있는 인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지상 사업이 끝이 났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취할 준비가 되었다. 예수께서 육체 가운데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실 때가 있었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이었고 조롱하는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분의 신성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가?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몇 사람은 있었지만 이같이 특별한 기회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그를 거절하였다. 그들이 눈먼 것은 깨달은 죄를 회개치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내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춰나갈 때 그것이 너무 강렬한 것이어서 그의 순결하고 완전하신 인성은 그것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인정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위엄이 번쩍일 때 그들의 적개심과 증오심은 갈 곳이 없게 되어버렸다.
굴욕의 휘장에 가려졌던 진리는 분명한 증거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말씀 곧 ‘너희가 내가 누구인지 알리라’는 말씀으로 인도하였다. 그분의 영광의 빛이 비침으로서 사람들과 마귀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계시되고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았다”(사인즈, 1899. 5. 10).
11)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에 명시된 생명은 육의 생명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갖고 계신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은 이 생명을 갖고 계신다. 육의 생명은 각 사람이 받은 것이지만 그것은 영원하지도 않고 죽지 않는 생명도 아니다. 이는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시 가져가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다스릴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빌려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의 생명을 취하여 갈 수 없다. 그는 내가 ‘내 생명을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은 빌려 오거나 다른 근원에서 가져온 생명이 아닌 본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인간 속에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이 생명을 노력해서 돈 벌듯이 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것은 이 세상을 위하여 열려 있는 생명의 샘이다”(사인즈. 1912. 2. 13).
“아무도 주님을 떠나서는 독립적인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고 말씀하셨으므로 죄인은 불멸의 생명을 갖지 못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뜻은 분명하다. 이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맞는 죽음보다도 더욱 완전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곧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97).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함으로써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숨은 잠시 부지할지 모르나 생명은 소유할 수 없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아의 굴복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당신께서 지적해 주시는 숨은 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산상보훈 61).
12) 그리스도는 창조자 곧 창조주(잠 8:22~30).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움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의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였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22~30).
솔로몬은 잠언 8장에서 지혜를 의인화하였다. 이 성경절들은 지혜를 의인화하여 찬양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도 있다.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에 관한 진술을 사단에게 적용 하듯이 잠언 8장의 이 성경절들 역시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있다.
“창조자”(잠 8:30)의 히브리어 원어는 “아몬”(@wOma:, Amon)이다. 이 용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그 하나가 우리말 성경의 번역인 “창조자”이다. 영어로는 artist, architect, master workman, master craftsman 등으로 번역되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말 난외주처럼 “양육 받는 아이”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fondling, minion, foster child 등으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master craftsman”(名匠 - (NKJV), “master workman” (주관자 - (RSV), “architect”(건축가 - (GNB)로 번역하였으며, 난외주에는 똑같이 “little child(작은 아이)”로 적고 있다.
한 단어가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할 때 성경 전체의 사상과 조화되는 의미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 번역처럼 “창조자”가 바른 번역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창조주”가 아니요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도 “창조자”(전 12:1, 사 43:15)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사 43:15). 성경 번역에는 “창조자”와 “창조주”를 같은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잠 8:30)와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주가 되어”라는 말은 같은 뜻이다. 지혜를 의인화하여 그리스도께 적용한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와 그 뜻이 일치한다.
특별히 “가지셨으며”(잠 8:22)를 70인역(LXX)이 “만드셨으며”의 뜻인 헬라어 엑티세(ἐκτισε)로 번역하므로 이것을 근거로 아리우스파에서는 그리스도의 피조 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우리말 성경처럼 “가지셨으며”의 뜻인 “엑테이사토”(ἐκτἡσατο)로 번역하였다(불가타, 아퀼라, 테오도숀). 또한 일부 학자들은 “엑티세”(ἐκτισε)라고 해도 “만드셨으며”(creating)라는 뜻이 아니고 “지명하셨으며”의 뜻이라고 말한다. 히브리 원어는 “카나”(hn:q)로서 “바로 세우다, 소유하다”의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세우다, 지명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역 즉 창조주로 일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창조주로 증거 하는 것이시다.
13)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칭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들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속사적인 상황에서 붙여진 칭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시므로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 생애 중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사 9:6)의 히브리어 원어는 “엘 깁보르”(rwOBG laE)이다. 이 원어는 다른 성경절에서 “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그리스도는 능하신 하나님이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므로 아버지와 등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만 전능하신 분이고, 아들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으로 차등을 두어 등급을 매기지 않았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신 10:17).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리로다.”(시 24: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위의 말씀에서 “전능”과 “능하심”은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신성의 등급을 가려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능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이류 하나님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한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등하시므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개체는 분명히 구별된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
그는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 인류의 구주로서 또한 인류의 모델로서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신성에 인성을 덧입으시고 사람으로서 의로운 삶 곧 의를 이루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는 아담이 잃어버린 지구의 장자권을 회복하신 둘째 아담이시다(고전 15:45~49). 그는 인류의 대표자로서 “맏아들”(롬 8:29)이시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본성은 하나이시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비우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지상 생애 동안 인성으로만 사셨다. 그러나 인성으로 생애 하는 동안 자신의 신성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지상 생애 동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신 것은 신성의 차등 때문이 아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과 의로운 생애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것이다. 주님의 생애는 사단의 교만과 죄악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였다. 주의 생애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의를 이루기 위해 대신 희생하신 것이다.
14) 성육신의 위대한 신비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4,15).
(1) 그리스도교 논쟁과 시도된 해결책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열띤 논쟁의 주제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의 몸에 인간과 하나님 곧 두 인격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오직 한 마음 한 영, 즉 신성을 가진 한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신성과 인성이 합쳐지고 결과적으로 제3의 본성이 생겨났다고 말하므로 그리스도를 온전한 인간도 온전한 하나님도 아닌 분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451년 칼케톤(지금의 터어키의 이스탄불 부근)에서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종교회의는 칼케톤 신조라고 부르는 성명서를 작성하였다.
여러 결정 중에서도 특별히 그 회의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며, “한 인격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며, 본성 간의 구분이 연합으로 인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필립 샤프, 그리스도교 신조들 2권, 62,63)라고 확증하였다.
이것이 올바른 신조인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포함하는 근본 사상들을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인다.
(2) 재림교회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
재림교회는 이 신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과 양립되기에 그것에 동의해 왔다. 그 성명서의 신학이 성경이 분명하게 진술하는 것을 뛰어 넘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의 지침 안에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나님이며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한 몸에 한 하나님과 한 인간이라는 두 인격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가지신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한 인간을 경배하게 된다. 우리는 “두 본성은 신비스럽게 한 인격 안에서 섞여(연합) 있다”(엘렌 화잇, Life Him Up, 76)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신성은 “인간화 되지 않았으며 인성은 두 본성의 섞임 혹은 연합으로 인해 신성화되지 않았다. 각 본성은 각기 고유한 특성과 속성을 계속 유지하였다”(원고 16, 182). 하나님의 아들은 참으로 성육신할 때 인성을 취하셨다.
(3) 두 본성의 연합이 함축하는 것
두 본성이 여전히 구분 된다는 사실은 성육신에 두 의지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사실은 예수께서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없지만 인성은 그를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신성이 전지할지라도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지식의 제한이 있었고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과 사명을 이해하였다(눅 2:52 참조). 두 본성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한 인격이기에 신비적인 요소는 여전히 남는다.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에 인성이 체험한 것을 신성도 체험하였다. 여기서 몇 가지 주의 깊이 생각해 보자. 신성은 인성의 느낌, 감정, 투쟁, 유혹을 경험하였다. 예를 들면, 인성이 목마를 때 신성은 독특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이 목마르고 주리고 유혹받는 등의 의미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인격의 전체성(Totality)은 그러한 감각을 체험하게 하였다.
한편, 신성이 치유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때 인성은 그 능력이 다른 이들에게 접촉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병든 여인이 예수의 겉옷을 만지고 나았을 때, 예수께서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막 5:30)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그 여인을 치유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하나님의 능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체험하였다.
그것은 두 본성이 연합한 결과였다. 그 연합이 함축하는 다른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주의 위대한 신비가 의미하는 것을 예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안헬 M. 로드리게즈, ‘그리스도의 위대한 신비’ 참조).
6. 문 :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답 : 그리스도를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칭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깨닫게 위 해 인간의 지식을 이용한 것이지 가장 타당해서 쓴 것은 아니다.
1) 성부와 성자 관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관계를 인간의 부자 관계로 이해하면 문제가 된 다. 인간 부자 관계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이며, 아들은 아버지 보 다 못하기 때문이다.
신성을 인간의 부자 관계로 다루면 그리스도는 아들 하나님으로써 아버지보다 못하며 또 영원하지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아들이기 때문이다. 신성에 관한 표현은 인간의 제한된 지식을 사용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은 동등하며 개체만 완전히 구별됨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 곧 아버지 하나님과 한 신성이며 동등한 분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요 5: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예수께서 가라사대…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리스도께서 아들의 직분을 얻으신 것도 인류의 창조와 구속을 위한 것이며 창세전에 스스로 취한 것이다.(엡 1:4~6). 스가랴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 아들의 직분을 취하셨으며, 인류의 범죄 후에 하늘에서 아버지와 “평화의 의논”(슥 6:13)이 있었다고 말하였다(슥 6:13).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시지만, 아들의 위를 택하신 것은 오직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언제부터 아들의 위를 취하셨는가? 인류를 창조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신 때부터이다. 가깝게는 인류가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구주로서의 구속 사업을 행할 때부터이다(사 9:6).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창조와 구속을 위하여 아들의 위를 택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본래 아들 하나님이 아니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취하신 것이다. 사단과는 대조되는 창조주의 본래 모습이다.
2)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 자신을 낮추심(빌 2:5~8).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높였다. 그리스도 자신도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셨으나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는 인간으로 사셨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의롭게 사는 모본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성육신하신 인간 예수로서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단과 대조적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사는 인간의 모본이셨다. 사단의 교만과 그리스도의 겸손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의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슥 13:6).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입으신 인성을 영원히 벗지 않으신다. 우리 주님은 우주 세계에서 대 쟁투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을 벗지 않으실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입으신 희생의 상처 자국을 영원히 간직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케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사도 바울은 만물이 회복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할 때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도 함께 복종하신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부활의 근본이요 인류의 대표자로서 영원히 인성을 벗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표자 곧 둘째 아담으로서 또한 인류의 모본으로서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놀라운 아들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인가!
3) 낳았다는 뜻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행 13:33,34).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히 1: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5).
예수께서 스스로의 권능 곧 자신의 신성으로 부활하심으로 본래 아들 하나님임을 증명하셨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성결의 영”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한 또 다른 표현이다. 공동번역은 “신성”으로 번역하였다.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공동번역 롬 1:4).
여기에서 “낳았다”는 메시아적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히 1:6), 부활(행 13:33,34), 대제사장의 즉위식(히 1:3,5)을 의미한다.
4) 그리스도가 아들이 되심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참으로 아 들이라고 불렀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두 개체의 관계가 분명 아버지와 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구속사적인 사건 때문이다. 예 수님은 처음부터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요 구속을 위하여 아들이 되신 것이다. 즉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역할을 분담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계시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런 분을 우리에게 주어질 때 아들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 때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눅 1:35)고 하셨다. 탄생하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이름을 소유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셨다(눅 3:38). 그런데 아담이 사단을 아버지로 택하여 가버렸다(요 8:44). 그러므로 이 지구에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졌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아서 본래 아들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신 분이 아들의 위를 취하셔서 세상의 구주로 사람으로 오셨다(사 9: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 지어다”(히 1:6).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주님은 인류의 장자 곧 맏아들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 2:11). 예수님은 일어버린 첫째 아담 대신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셨다. 잃어버린 본래 아담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 된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사람은 본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았다(시 8:5). 그래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들의 위를 취하시고 천사보다 잠깐 동안 못하여지셨다(히 2:9).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의 값을 대속하시고 인류를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29~33).
예수님은 비록 사람으로 오셨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해하였다(요 10:29~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함께 사용된다.
7. 문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사단은 어떻게 도전하였습니까?
답 : 사단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그리스도 의 성육신 이후에는 그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공격하였다.
1) 사단은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함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사단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의 교만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지위를 탐내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켰다. 성경은 두로와 바벨론 왕들에 대한 반역을 루스벨(사단)에 대한 비유적으로 기술하여 우주의 대 쟁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단(루스벨)은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다. 그는 천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수석 천사 곧 천사장이었다. 하나님 면전에 있던 “아침의 아들 계명성”(사 14:12)이었다. 루스벨(루시퍼)은 완전하게 창조된 아름다운 존재였다.
죄의 발생은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정당화 할 수도 없다. 그 뿌리는 루스벨의 교만과 탐심에서 찾을 수 있다. 교만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반역이다. 루스벨은 그를 창조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부여한 높은 지위에 만족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이기심을 품고 하나님과 동등 되기를 탐하였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단 7:27).
루스벨은 하나님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앉아 우주의 대왕 곧 하나님이 되고자 시도하였다. 루스벨의 반역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적하여 일어선 우주 세계에서 처음 있는 대 사건이다. 다니엘 선지자는 “지극히 높은 자”(단 7:17,22)가 예수 그리스도 라고 증거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이다. 그는 성자 하나님과 동등 되려고 시도하였다.
사단은 왜 삼위 하나님 중에 그리스도께 도전했을까? 루스벨은 자기를 직접 창조한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았으며,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호위하던 천사장의 직분 때문에 그리스도와 가장 가깝게 교제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지혜와 영광을 가장 많이 입었다. 그의 형상과 영광이 그리스도와 너무나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등 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피조물일 뿐 하나님은 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은 삼위 하나님을 본성(신성)에 도전한 것이다. 루스벨이 갈망한 것은 하나님의 지위였지 그분의 품성은 아니었다. 그가 그처럼 원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였지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루스벨의 반역은 그가 대적 사단으로 변신한 시작이었다. 루스벨은 피조물이므로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피조물인 루스벨이 하나님의 신성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지위와 영광을 탐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는 대적하는 자 곧 사단이 되었는데, 그가 암암리에 취한 행동으로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눈멀게 되었다. 루스벨의 반역에 가담하여 타락한 천사들은 사단의 일원이 되었다(계 12:7). 하늘 왕국의 평온은 깨어졌으며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으로 큰 용, 옛 뱀, 마귀로 묘사된 사단과 그의 타락한 부하 천사들이 패배한 후에 “땅으로 내어 쫓”겼다(계 12:9).
2)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함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사단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하려고 끊임없이 활동하였다. 그는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뱀을 매개체로 자신의 교만심을 불어 넣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그가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교만심과 이기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더욱 악랄하게 발전하였다.
사단은 이 땅에서 더욱 악의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주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금식이 끝난 후에 광야에 나타난 빛나는 모습의 존재는 사단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자였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시기하면서 그 신성을 증명하도록 시험하였다.
사단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으며,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을 사용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면 믿겠다고 시험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인성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단과의 지상에서의 선악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성을 결코 사용하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성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을 사용했다면 구속 사업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 끊임없이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공격하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순간까지 그의 신성은 시험을 당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순간까지 사단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대 쟁투에서 승리하셨다.
8. 주요 성경절들
1)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음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2) 아브라함이 만난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임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요 8: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 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3) 여호와의 사자 - 여호와 - 기묘 -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의 사자 = 여호와
[출 3:2~4]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삿 6:12~14]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여호와의 사자 = 기묘
[삿 13:17,18]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기묘 = 예수 그리스도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 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4) 여호와는 복수 개체임
[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비를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슥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5)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요 5:18]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니.”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 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잠 8:22~30]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움을 입기 전 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의 진 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였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 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 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 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6) 아들 하나님의 칭호
[요 5:18]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 러라.”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 2:5]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슥 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의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고전 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케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7)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사단의 공격
[겔 28:12,15]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 도다.”
[겔 28: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사 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마 27:4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