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이학지조 우탁 선생(東方理學之祖禹倬先生)
※ 앞선 글, 즉 2019.5.3일자 본인의 단양우씨 밴드게시글(포은 정몽주 편)에 이어 우탁 선생 편의 글을 올립니다.
본 편집자는 졸필에 소견이 좁기에 쓴 글이 뒤죽박죽입니다. 이에 대해 양해부탁드리며 차후 현인이 나타나 문중위상제고 차원에서 더욱 연구가 심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호기 부리듯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또한 선조님께 혹여나 누가 되지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넓으신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아래 글은 참고적으로 안동 정정재 송탑비 문구인 동방이학지조에 限한 글입니다. (2019.5.4. 白泉)
우리는 아래의 내용에 주목해야한다. 이는 문중의 위상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 이학(理學)의 시작을 우탁(1262-1342) 선생이라 보는 견해가 우리에겐 지배적인데 옛 기록은 하나같이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을 "東方理學之祖"로 대부분 기록을 하고 있다. 물론 易東을 제외한 것은 아니지만 圃隱을 돋보이게 하기위해서인지 두루뭉슬 그냥 지나치듯 기록을 했다. 그렇게된 원류와 연유는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으로 올라간다.
잠시 계보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안향의 6군자(역동 우탁(禹倬, 1262-1342), 국재 권부(權溥, 1262~1346), 동암 이진(李瑱, 1244-1321), 매운당 이조년(李兆年, 1269-1343), 이재 백이정(白頤正, 1247-1323), 덕재 신천(辛蕆 ?-1339)) -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길재, 권근으로 이어진다. 즉,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와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의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牧隱은 제자인 圃隱을 "東方理學之祖"로 추대를 했다. 제자에 대한 최대의 극찬이라고 본다.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했다고 곧이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아무튼 그러하여서 발단은 여기서부터라고 편집자는 생각한다.
우리 문중차원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조선으로 들어와 圃隱의 학맥은 이어지고 이들에의해 줄곧 "東方理學之祖 鄭夢周"가 공식화되었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易東의 위상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에 의해 易東의 위상에 대한 부흥의 단초가 있었고 19세기부터 팔도유생의 상소에서 비로소 "東方理學之祖 禹倬"을 똑똑히 기록하게 된다.
아쉬운 부분을 굳이 꼽으라면 단지 하나, 임금이나 명망있는 분이 "동방이학지조"라고 특별히 추숭하는 마음에 칭호해줬다라면 더욱 빛이 나지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중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앞뒤 문맥상 일맥상통하다고 입을모아 이야기하기에 우리는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동방이학지조 우탁 선생의 충절, 도학과 문장이 세인들의 눈을 뜨이게 하였고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족친들께오서는 한마음으로 大同하여 화합돈목하고 외부로부터 이와 관련 질문이 있을시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당당하게 대처해 주시길 당부드리며 간추린 관련 자료는 아래에 첨부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협조해주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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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1392-1398 재위)는 “우탁은 도학을 밝혀 동방 이학의 조가 되었다”고 했는데 ...(인용한 글들을 바탕으로 원문을 찾아 보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찾지 못함)
○고려사 열전(1449-1451 간행) 권제22 우탁 편과 권근(1352-1409)의 양촌집에서 "理學始行"이라는 문구가 있다.
○1569년, 선조실록에 《논어》를 강하고 기대승이 예악과 교화, 전대의 인물 등에 대해 아뢰는 글에서
"...禹倬、鄭夢周後, 始知性理之學。 及至我世宗朝, 禮樂文物, 燠然一新。 以東方學問相傳之次言之, 則以夢周爲東方理學之祖..." 라고 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처음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알게 되었는데 급기야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서 예악과 문물이 찬연히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서로 전해진 차서로 말하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조(祖)로서..."
(선조실록 3권, 선조 2년(1569년) 윤6월 7일 기유 1번째기사)
○1570년, 역동을 다시 평가한 분이 있었으니, 퇴계가 바로 그다. 퇴계의 한마디는 추모 건물 역동서원을 짓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동 최초의 서원이 예안 부포에 창건되었다.
퇴계의 <역동서원기문易東書院記文> 이 있다. - 義理之學始行 기록 보임.
○1642년, 고부 임오보 휘자 방주에서 "東方易學之祖"라 했다
○1682년, 禹倬과 李滉을 모신 丹巖書院의 賜額을 청하는 申益謙의 상소(승정원일기 294책 (탈초본 15책) 숙종 8년(1682년) 10월 미상 2/2 기사) - 義理之學始行
○1784년, 승정원일기에 "... 祭酒文僖公禹倬出, 而始倡爲性理之學, 我太祖康獻大王, 下敎若曰, 文僖公禹倬, 道學精深者是已。倬於經史, 無不博通, 而尤邃於易程傳初來, 東士莫能省解, 視爲弁髦, 倬獨發憤閉戶, 潛心探究, 久乃有得, 盡通奧旨。遂退居嶺南之福州, 屢徵不起, 敎授生徒, 講明義理, 福州卽今之安東縣, 而臣等所居也。我朝性理之學, 始自嶺南倡, 從祀諸賢, 五居其四, 而其源則出自高麗文忠公鄭夢周, 夢周亦嶺南人也。世所推稱爲理學之祖, 而倬之倡明絶學, 又在夢周之前矣。..." (승정원일기 1559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1784년) 5월 29일 계미 39/71 기사)
○1794년, 승지 이익운이 영남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학연의》·《근사록》 등 고가의 문적을 찾아 보고할 적에 앞서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영남(嶺南)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여러 문적들을 바쳤다. 안동(安東) 역동 서원(易東書院)에 있는 고려 좨주(祭酒) 우탁(禹倬)의 홍패(紅牌)도 가져가 임금이 어람(御覽)했다.(그러나 이에 대해 특별히 평을 한 기록은 없다.)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1794년) 8월 30일 갑신 11번째기사)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가정유고(柯汀遺稿) - 柯汀遺稿卷之十 - 易問下 - 筮例問
"...人有恒言曰程傳尙義理。本義主卜筮。本義非闕於義理。程傳豈不可以卜筮乎。海東易學。自勝國禹祭酒 名倬。事見麗史及陽村集。 始。時程傳初來。東方人無解之者。先生閉戶潛究。乃闡義理之學。而卜筮亦無不中。故自號曰易東。爲東方易學之祖。宋時詔購京氏易傳。天下無所得。高麗乃進之。然則七分之術。亦有傳於我東歟。禹公之後。圃隱先生 姓鄭名夢周。高麗忠臣。 之易。爲牧隱諸公所推。其詩曰細看艮卦六畫耳。勝讀華嚴一部經。其言雖掇拾乎濂翁。而當季麗佞佛之日。獨能表章易道。觝排異敎。其爲斯文之衣鉢。不亦盛乎。簡易崔氏 名岦。以文章聞於中國。著本義口訣。曰天下之理至公。其在人心之明。無有賢愚。况於華東之分乎。..."
○1810년, 팔도유생들이 문희공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다.(승정원일기 1990책 (탈초본 104책) 순조 10년 11월 24일 을해 18/21 기사) - ● 吾東理學之宗師 기록 보임
○1883년, 문희공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청원하는 상소가 있었다.(1927년 발간한 황재영(黃在英)의 대계유고(大溪遺稿)) -● 東方理學之祖 기록 보임
입수하고 확인한 1900년 이전의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차후 추가 자료가 입수되는대로 첨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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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이학지조는 누구인가" 게시글 참조(아래 링크)
https://band.us/band/55099895/post/126742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