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김옥두"(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관 증언).

작성자다이애나|작성시간07.06.17|조회수682 목록 댓글 0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김옥두"

[독점공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담당.
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관 증언.

이 수기를 쓴 이기동씨는 전남 광양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관으로 활약하다가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다.

그가 악명 높던 남산의 지하실에서 조사했던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장남인 김홍일 국민회의 의원,

한화갑 국민회의총재 특보단장, 김옥두 국민회의 의원, 심재철 한나라당 부대변인 등이었다.

그는 이 수기를 통해 이들의 인간적이고 처절했던 모습만 아니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신군부에 의해 어떻게 조작됐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편집자> 이기동 광양해운 전무.

1980년 5월17일 아침. 서울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수사1과 아침회의에서 진과장은 “별도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전원 청내에 대기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와 동료 수사관들은 1층 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오늘중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것쯤은 예감하고 있었다.

79년의 10.26 궁정동 사태 이후 남산 대공수사국은 상당히 무기력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12?2사태를 거치면서 정국의 주도권, 특히 정보 분야는 보안사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남산의 대공수사국은 주어진 대공사건 처리보다는 정국의 향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날 점심식사 후 기획관으로부터 오후 5시에 전원 대공수사국 강당에 집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오후 5시. 5층 강당에 집합한 인원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안전국 요원들이 전원 합류했기 때문이다.


"아, 김대중 쪽을 맡는구나"

나는 속으로 ‘대공수사국 요원과 안전국 요원 등 수백명이 모였다면 사건 규모가 제법 크 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행정과장이 강당 단상에 올라서서 “잠시 후 국장님께서 도착할 테니 기다려라”고 말했다. 5시15분경, 김근수 국장(현 상주시장)이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나타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질 임무는 실로 중차대하다. 행정과장이 지시하는 대로 각자 임무를 수행하되 불가피한 경우 무기 사용을 허가한다”라는 짤막한 지시를 하고 총총히 강당을 떠났다. 곧이어 등단한 행정과장이 임무를 하달했다.
“오늘 작전은 밤 11시에 개시되며 지금부터 각 팀이 연행할 대상자와 해당 수사요원을 호명하겠다.”
행정과장의 호명이 계속됨에 따라 우리는 임무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연행할 대상자는 김대중씨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사들, 그리고 김대중씨의 가족을 포함한 ‘가신’들이었다.

나는 ‘아, 정보부가 김대중 선생 쪽을 맡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수사요원 거의가 강당을 빠져나갔는데도 내 이름이 거명되지 않다가 마침내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끝으로 특수반, 김대중 담당 총책임자 진○○ 과장,
수사관 김○○,
수사관 이기동,
그리고 1개 헌병 분대, 이상.”

순간 얼핏 보니 진과장의 안색이 변했다. 80년 5월 당시 상황은 ‘서울의 봄’을 맞아 3김씨가 대통령직을 향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던 즈음으로 그중 대내외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김대중씨의 연행 책임을 맡았으니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나를 쳐다보는 진과장의 얼굴에서 ‘너만 믿는다’는 무언의 암시를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착검한 상태로 강당에 도열해 있는 헌병분대로 다가가 헌병 책임자 오대위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도열해 있는 헌병들을 향해 주의사항을 지시했다.
“동교동 김대중씨 집은 협소하기 때문에 비서들과 충돌할 경우 착각할 수 있으니 사람 식별을 잘 해야 한다. 단 우리 수사요원의 명령 없이는 발포가 있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착검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이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진과장과 김수사관, 그리고 나는 승용차 편으로 헌병 1개 분대를 실은 트럭을 인솔하여 동교동으로 향했다. 김대중씨 집 근처에서 대기하던 중 밤 11시30분을 기하여 평소 김대중씨 집을 수시로 방문한 바 있는 김수사관이 초인종을 눌렀다.
김대중씨의 비서는 김수사관을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헌병 분대 (장교 1명, 사병 18명)를 이끌고 순식간에 대문을 박차고 뜰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아래채(비서실 겸 숙소)에 있던 김대중씨의 개인비서 10여명이 마당으로 몰려나와 김대중씨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착검한 헌병들이 본채와 아래채의 중앙을 일렬로 막아 차단했기 때문에 고함소리만 요란할 뿐 본채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

나는 오대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한 후 거실로 올라섰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실에서는 김대중씨가 정장차림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3명의 신문기자들과 인터뷰중이었다. 나는 김대중씨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배석한 기자들에게 “당신들은 조용히 뒷문으로 나가도록 하시오”라며 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상부의 명에 따라 선생님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모시고자 합니다. 저는 군인이 아니고 정보부 대공수사국 요원입니다.”
김대중씨는 “가자면 가야겠지만 무슨 일인지 알고나 갑시다”라고 하기에 나는 “저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황이며 단지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가시게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동안 밖에서는 부인 이희호씨가 “야, 이놈들아, 국민이 북한 김일성이 하고 싸우라고 총칼을 쥐어줬더니 선량한 백성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다니 무슨 짓들이냐” 하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를 보고 김대중씨는 “여보, 그만하고 들어오구려”라며 이씨를 만류했다.

잠시 후 김대중씨는 “어쨌든 가봅시다”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5월 18일 0시15분이었다. 각 방송사는 밤 12시 톱뉴스로 이 사건을 발표했다.
막 신발을 신은 김대중씨는 “여보시오, 내 담배 좀 가져가면 안 되겠소?” 하기에 나는 상의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국산 담배를 꺼내 권했다. 그러자 김대중씨는 “아니, 내가 피우는 담배 말이오”라고 말하며 건넌방에서 급히 나온 비서로부터 담배쌈지와 파이프를 건네 받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김대중씨는 당시 파이프 담배를 매우 즐겼다.

나는 오대위에게 밖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까지 김대중씨를 안내하고 대기중인 수사관에게 김대중씨를 정중히 남산으로 모시라고 지시한 후 이희호씨를 만나기 위해 거실로 올라섰다. 막 거실로 올라서는데 약간 열려 있는 안방 문틈으로 이씨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무언가 꺼내 황급히 핸드백 속에 넣는 게 보였다.
핸드백을 들고 태연히 방에서 나온 이씨는 아직도 볼일이 남았느냐며 자신은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이 여사님, 우선 안방에서 핸드백 속에 넣으신 서류를 저에게 건네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희호씨는 “핸드백에 무엇을 넣었다고 그래요? 화장품 좀 챙겼는데…”라며 핸드백 열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압수하고 이희호씨에게 말했다.
“조용히 집 안을 수색하고자 하니 협조해 주시고 현재 집에 갖고 계시는 현금과 수표를 모두 제게 주시면 상부에 보고 후 되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적법 절차에 따른 압수 수색 영장을 가져왔습니다.”
이씨는 약 3000만원에 달하는 현금과 수표 등을 건네주었고 나는 영수증을 써줬다.

5월18일 새벽 2시, 대공수사국 지하실 303호. 남산으로 ‘모셔온’ 김대중씨와 마주 앉았다. 담당수사관 책상 위에 놓인 노란 파일 속에는 김대중씨에 대한 서울대병원의 진단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김대중씨가 과거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고속도로에서 트럭과의 충돌사고로 인해 생긴 다리의 상태에 대한 병상 소견서였다. 이 소견서에는 ‘수술 시급 요망’ 이라는 진단 결과가 적혀 있었다.
이것 외에는 지시사항이 적힌 어떤 서류도 없었다. 지시사항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나는 김대중씨에게 “밤도 늦었고 하니 주무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는 “괜찮소. 도대체 무슨 일이오?”라고 물었다.

김대중씨, 심야에 인생역정 토로.

그러나 나 역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나는 평의자를 또 하나 가져다가 다리가 불편한 김대중씨가 두 다리를 편히 올려놓도록 했다. 아침 6시 수사관 전체회의까지는 약 4시간이 남아 있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 이리저리 궁리 끝에 나는 김대중씨에게 제안을 했다.
“아침회의가 6시에 있으니 그때 가면 모든 상황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아침 6시까지는 약 3시간30분이라는 공백이 있습니다. 그 동안 선생님께서 목포상고를 졸업하신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해 주시면 어떨까요? 선생님과 연관이 있는‘한민통 사건’이라든가 하는 문제는 지난날 저희 수사과에서 오랫동안 수사를 해오다 종결했습니다만 의문 나는 점이 많았습니다. 선생님 말씀 도중에 제가 의문점을 질문하면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김대중씨는 내 제의에 흔쾌히 응한 후 책상 위에 자신의 시계를 풀어 세워놓고, 특유의 전라도 억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관심은 6?5전쟁 당시 김대중씨의 행적과 한민통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과의 관계였다. 김대중씨는 6?5전쟁 당시 해상방위대에서 실제 활동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민통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김대중씨는 자신이 국내 활동을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반정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해외 단체를 결성할 필요를 느꼈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미국 캐나다 및 일본 등지에 사는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민통을 결성하기 위해 몇몇 동포와 협의하던 중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납치되는 바람에 한민통을 직접 결성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73년 8월15일 일본에서 결성된 한민통 공동의장(공동의장 곽동의, 배동호)에 선임된 것은 김대중씨가 국내에서 연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대중씨의 이야기는 약속대로 오전 6시5분 전에 끝이 났다. 나는 국장이 주재하는 확대 담당수사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김대중씨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 이수사관, 국장에게 가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물어보시오. 단 나는 정치인이니 상관없지만 가족 중에는 정치하는 사람은 없으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시오. 꼭 내 말을 전하시오.”
그러나 이를 어쩌겠는가. 김대중씨의 동생인 대현씨를 비롯하여 아들 홍일씨 등 가족 모두가 연행 명단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연행 여부를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모두 지하실로 연행되었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보안이 유지되어 각 언론사에서는 몇 사람이 연행되었는지 정확한 수를 알지 못했으나 김대중씨와 관련돼 남산 정보부에 연행된 사람들은 100여명에 달했다. 당시 5월19일자 일간지는 ‘김종필, 김대중씨 등 26명 연행’이라고 보도했다.

경찰 수사자료 사전 배포.

나는 김대중씨에게 일단 “말씀을 전하겠다”고 한 뒤 국장실에서 열린 담당수사관 회의에 참석했다. 이곳에 모인 수사관들은 대공수사국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베테랑 수사관들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공수사(간첩) 사건으로 이렇게 모였다면 긴장과 ‘기대’ 속에 눈빛이 빛나고들 있었을 것이다. 허나 긴장색이 역력한 국장이나 과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평생을 대공에 몸담아온 국장이 이런 분위기를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국장은 엄명을 내렸다.
“여러분, 이 사건은 좀더 철저한 수사와 진실 규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고 있는 각 피의자들의 범죄사실을 경찰이 사전조사해 각 조사실에 배포해두었으니 그 내용에 따라 진실을 규명하여 사법처리를 준비토록 하시오.”
아침회의가 끝난 후, 과장을 통하여 김대중씨의 부탁을 국장에게 전했다. 이 사건은 애당초 정보부의 의지가 담긴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303호실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간 경찰이 조사해서 보낸 피의자들의 범죄사실들을 확인해 나갔다. 그 주요 사항은 첫째, 장남 김홍일씨의 주도로 결성된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 연청)’를 통하여 전국적인 청년 봉기조직을 결성케 했다는 내용이었다. 연청은 이미 오래 전에 조직되어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청년조직으로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그 조직체의 구성과 활동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김대중씨와 지지세력이 민주화 투쟁을 위해 5월22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은 장충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할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개최시 ‘연청’이 전국적으로 가세할 것이라는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회 그 자체가 불온·불법 집회가 아닌 다음에야 범죄행위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둘째, 김대중씨가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씨를 포함, 고려대 연세대 학생회장들에게 직접 자금을 지원하여 데모를 주동케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심재철씨 등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치안본부에서 조사받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후 별도의 조사계획을 수립했다. 더불어 이후 조사가 필요하고 확인을 거쳐야 할 내용 등을 정리했다.

―서울대 복학생 이해찬씨가 중심이 되어 5월13일부터 5월15일까지 전국 각 대학에서 벌인 시위 사태의 배경 조사.

―김대중씨의 전위조직인 김종완씨의 ‘민주헌정동지회’의 불법활동에 대한 조사.

―김대중씨의 전위조직인 김상현씨의 ‘한국정치문화연구소’의 불법활동에 대한 조사.

―재야 출신 이문영 고려대교수, 문익환 목사의 ‘국민연합’의 불법활동에 대한 조사 등이 었다.

이미 관련자들이 모두 정보부를 비롯한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조사 및 신문계획이 수립되었고 곧 확인조사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수사 초기에 중간발표해버려.

5월22일. 김대중씨를 연행한 지 5일째였다. 계엄사는 ‘김대중 수사 중간 발표’라는 제목으로 ‘김대중과 관련인들에 대한 수사과정서 드러난 범죄사실’이라는 부제를 달아 각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김대중씨와 관련인들에 대한 수사를 맡고 있는 중앙정보부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단 한 줄의 수사관조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사건에 관련된 사실을 확인하는 초기 단계인데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범죄사실 발표’라니....
이렇듯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측에서는 경찰에서 입수한 허위사실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재야 시민단체의 활동을 한데 묶어 김대중씨 계열 모두를 범죄집단으로 규정하여 발표를 했으나, 당시 합수부에 장악된 정보부로서는 할 말이 있은들 누가 나섰겠는가.

조사중 김대중씨는 늘 진지한 자세로 수사관에게 예의를 갖추었고 조사가 없는 시간에는 언뜻 어두운 얼굴로 깊은 상념에 젖곤 했다. 그것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앞날을 예측하고 있음인가? 어쩌면 과거 1978년 8월 일본에서 납치되었을 때 배 위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씨는 밤늦게 잠들어도 일찍 일어나서 자신의 군용 담요를 네모 반듯하게 접어놓고 수사관이 청소를 할 때는 거들기도 했다. 특히 식사 때 경비들이 가져오는 플라스틱 식판을 항상 공손히 받았고,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휴식시간에는 광주사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세상의 흐름을 알고 싶어하는 김대중씨에게 주요 일간지를 갖다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상황과 광주사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10여일 동안 김대중씨와 밤낮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을 한 결과 김대중씨 조사를 다른 수사관에게 인계하고 싶다고 상관에게 강력히 건의했다. 그리고 김대중씨에게도 괴로운 심경을 밝혔다.
“선생님, 저는 전라남도 광양 출신으로 제 부친에 이어 대공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일해왔습니다. 좀더 편한 부서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대공수사를 천직으로 알며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외부의 뜻에 의한 정치적 사건에 참여하게 되고 더구나 선생님의 담당관이 되다보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저는 지난 며칠동안 상부에 더이상 선생님을 조사할 수 없음을 강력히 건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지만 이번 사건이 완전히 종료되면 수사관 생활도 그만둘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김대중씨는 격려의 말을 해줬다.
“이수사관, 무슨 소린가? 자네같이 정의로운 사람이 이곳에서 일해줘야 세상이 밝아지는 게 아닌가. 여러 가지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옷을 벗겠다고 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게. 언젠가는 좋은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뜻을 펼 것이 아닌가?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참고 견디게.”

어쨌든 나의 강력한 수사기피 요청으로 다음날 김대중씨에 대한 조사를 다른 수사관에게 인계하게 되었다. 김대중씨의 담당관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밤, 나는 김대중씨에게 사적인 부탁을 했다.
“어찌되었건 선생님과의 인연이 이러한데 헤어진다는 게 섭섭합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훈을 하나 써주셨으면 합니다. 가훈을 써주시면 가보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김대중씨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지금 당장 지필묵을 가져와요. 여기서 써주지”라고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무슨 지필묵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선생님! 선생님께서 흔쾌히 말씀하셨으니 하는 이야기인데요, 이후 선생님께서 편안한 위치와 입장이 되셨을 때 언제 어느 때라도 제가 부탁드리면 가훈을 써주겠다고 약속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김대중씨는 “좋아요. 앞으로 언제 어느 때라도 이 수사관이 부탁하면 꼭 써줄 것을 약속하겠네”라고 했다.

5월 말 김대중씨 조사실을 벗어난 이후 맡은 임무는 김대중씨를 방문했다는 단 하나의 ‘죄목’으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남산 정보부로 이송된 일반인들에 대한 심사였다. 하루에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시민을 심사했는데 말이 심사지 주소와 성명을 묻고 김대중씨를 방문한 이유를 한두 줄 조서에 적은 후 “범죄혐의 사실 없으므로 훈방 조치요”라는 조치의견으로 훈방 처리했다. 김대중씨를 방문한 사람들의 80%가 호남인이었다. 그러기를 10여일쯤. 6월 초에 국장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걱정이 앞섰다. 국장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있었다.
“어이, 이수사관. 홍일이 방에 문제가 있는데 사태가 심각해. 수사팀을 바꿔야겠는데 아무래도 자네가 맡아주게. 자해를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 벌어져. 지금 당장 팀을 짜서 들어가도록 해.”

나는 그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장님, 김대중씨 조사실에서도 보고를 드리고 나왔는데 또 김홍일을 맡으라고요?”
그러나 국장은 “무슨 소리야. 심각하다니까. 명령이야, 명령”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알겠습니다. 여유를 조금만 주십시오. 저녁 식사 시간대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여 허락을 받은 후 지하실로 내려왔다. 그때가 오전 11시경. 지하실로 내려온 나는 곧바로 수사관 대기실로 들어섰다. 거기에 설치된 폐쇄회로 TV를 보기 위해서였다.
수사관 대기실은 수사관의 휴식장소이기도 하지만 수사관들의 전략회의실이기도 했다. 그 방에서는 설치된 폐쇄회로 TV를 통해 보고 싶은 신문실을 명확히 볼 수 있어 피의자의 습관 등 일체의 행동을 체크할 수 있어서 신문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곳에 비치된 군용 침대에 누워 김홍일씨가 조사받고 있는 조사실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통통한 얼굴의 김홍일씨와 신문 조사관 4명이 나타났다. 얼굴뿐만 아니라 앵글조작에 따라 전체 조사실을 볼 수도 있었다. 김홍일씨는 긴장된 표정이었으며 수사관의 질문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왜 그는 갑자기 말문을 닫고 수사관에 반항했을까? 그 이유만 알 수 있다면 수사는 쉬울 텐데…. 나는 점심시간 후 김홍일씨를 담당한 김수사관을 만났다. 나는 김수사관으로부터 김홍일씨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들었다.

애당초 김홍일씨를 연행한 문수사관팀이 조사를 하고 있던 어느날, 조사실에 느닷없이 12시 정오 뉴스가 들렸다. 그것은 김대중씨를 연행한 지 5일째 되는 날 계엄사에서 발표한 ‘김대중 중간수사발표’였다. 이 얼마나 기막힌 상황인가. 수사관들도 놀랐지만 김홍일씨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환기통을 통해 라디오뉴스 들려.

경위야 어떻든 소리의 출처를 찾아 나선 수사관들은 20분이나 지나서야 그 출처를 찾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남산 대공수사국 지하실에는 지상으로 연결된 환기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주요 인사 연행에 동원됐던 승용차 기사가 철망으로 덮여 있는 지상 환기통 입구 위에 차를 정차시킨 후 운전석 문을 열어놓은 채 밖에 나와 뉴스를 듣고 있었다. 그 뉴스가 그대로 김홍일씨 신문실로 연결된 환기통을 통해 중계되고 말았다.
김홍일씨가 이 뉴스를 듣고 자신의 부친은 물론 전 가족이 자신과 같이 연행된 사실을 알았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문수사관팀은 김수사관팀으로 교체됐고 이후 김홍일씨의 강력한 저항으로 또다시 팀이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김수사관과 헤어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사가 잘못 됐구나.’

한 사건의 수사가 종결되려면 적어도 수사관과 피의자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수사관은 어디까지나 영웅심보다는 진실규명에 그 본질을 두어야 하고 피의자는 피의 사실 은폐보다는 그 정당성에 진술의 초점을 맞추는 것, 그것이 합의다.
국장으로부터 원하는 요원으로 수사팀을 만들어도 된다는 허락을 이미 받았으므로 나는 운동을 잘하는 날렵한 후배 2명 등으로 팀을 구성했다. 나는 내가 계획한대로 면도칼 몇 개를 구하는 등 신문 준비를 마쳤다. 승부를 빨리 내야 한다. 그것만이 김홍일씨나 수사팀 모두에게 편안한 일이었다.
오후 5시30분경. 김수사관팀과 사전에 약속한 대로 김홍일씨가 전혀 눈치 못채게 전격적으로 팀을 바꾼 나는 김홍일씨와 마주 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자네를 맡은 담당수사관 이기동이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광양. 지난 5월17일 밤, 동교동에서 자네 아버님을 직접 남산으로 연행한 사람이 바로 나이고 연행 이후 지난 10여일 동안 자네 아버님과 숙식을 함께 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선생님은 건강하시니 걱정 말라. 내가 이 방 담당관으로 오기 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가 아버님과 가족들의 연행에 항의하여 자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자랑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특히 호남인의 꿈이자 큰어른이신 선생께서 중요한 시기에 억울하게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네가 자해로 수사기관에 항의하려 했다면 그건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나 또한 호남인으로서 자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김홍일씨의 책상 위에 면도칼 3개를 던지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 여기 면도칼을 주었으니 동맥을 자르든 어떻게 하던 자해를 해보게. 그러나 죽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네가 동맥을 자르고 나면 즉시 병원으로 옮길 테니 걱정 말고 자르게. 자르라고!”
"김홍일, 동맥을 잘라!"
계속 말을 이어가는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내 의도가 성공하지 못하고 사고가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김홍일씨의 기를 꺾기 위해 더 다그쳤다.
“김홍일, 동맥을 잘라!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악명 높은 남산 정보부에서 김대중 선생의 장남 홍일씨가 동맥을 잘라 자살을 기도했다’라고 대서특필된다면 자네는 선생의 아들로서 할 바를 다했다고 하겠지. 한번 해보게.”
긴장된 순간이었다. 1∼2분이 흘렀는가 싶었는데 김홍일씨는 의자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졌습니다.” 단 한 마디였다.
나는 김홍일씨를 일으켜 세웠다.
“자, 정말 잘 선택했어요. 이제 당신과 우리 수사관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앞으로 사안의 진실을 밝혀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자해보다는 꿋꿋함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내가 지하실에 연행된 사람들에게 호남인임을 강조했던 것은 호남인이라는 것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남산 지하실 분위기에서는 그나마 호남인 수사관이라고 해야 호남인 피의자와 대화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김홍일씨와 40여일을 함께 보내면서 수년간 사귄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그런 와중에 아주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6월20일경. 군 합수부는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장남인 김홍일씨를 공범으로 포함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러 통로를 통해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모양새를 그럴 듯하게 갖추려면 김대중씨와 각 대학의 연계를 김홍일씨가 맡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자금 지원 ― 학생 선동 ― 대중규합 ― 민중봉기 ― 정부전복 ― 과도정부수립’ 이라는 합수부의 정해진 각본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국장은 나에게 “김홍일과 각 주요 대학 학생회의 금품수수 과정 등 진실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 김홍일씨를 조사해오는 동안 합수부의 중간 수사 발표 중 적어도 김홍일씨 부분만은 경찰에서 조작하여 계엄사에 보고한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고문으로 초점 잃은 심재철씨.
그런데 그에 대한 확증이 없어 고민중이었는데 국장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는 국장이 수사관에게 주는 신뢰의 표시였다. 나는 다음날 치안본부 특수대에 전화를 해 그곳에 수감된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씨를 직접 신문할 테니 준비하라고 전달한 후 곧바로 특수대를 방문했다.
오전 10시경 시경 소속 특수대에 도착하여 김홍일씨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심재철씨를 신문실로 데려오게 했다. 당시 신문실에 나타난 심재철씨는 아주 호리호리한 몸매에 해쓱한 얼굴을 한 앳된 청년이었다. 나는 동석한 시경간부 5명에게 “지금부터 본 수사관이 심재철군을 신문하는 동안 여기 참석한 어떤 간부도 나의 신문을 방해하는 언행을 삼갈 것이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곧바로 신문에 들어갔다.
―귀하의 소속학교와 성명은?
“저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입니다.”

―귀하는 김대중씨를 아는가?
“네. 압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귀하는 김대중씨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몇 번 방문했는가?
“네. 저는 3회에 걸쳐 김대중 선생님 댁을 방문했으며 2번에 걸쳐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이에 김대중씨 집을 대체적으로 그려보고 실제 대화한 장소를 표시하라.
심재철씨에게 종이와 연필을 주었더니 그는 서슴없이 김대중씨 집과 대화를 나눴다는 거실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였다. 심재철씨가 그린 그림은 최근의 김대중씨 집이 아니라 아래채를 사들이기 전 옛날 집 구조였고 거실도 전혀 달랐다.
나는 그에게 “심재철군. 언젠가 밝혀질 일을 거짓진술을 하면 안된다. 자넨 김대중씨 집을 방문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직접 대면한 적도 없다. 누군가가 옛 김대중씨 집을 그려서 보여주었다고 본다”라고 하자 배석한 경찰간부들이 깜짝 놀라 “수사관님. 김대중씨 집 맞잖아요?”라며 항의했다.
나는 “기다리시오. 또 질문사항이 있으니” 하고 그들의 반발을 저지한 후 심재철씨에게 “경찰보고서에 의하면 김대중 흉상이 그려진 메달 수백 개를 서울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투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고 했는데 그 메달을 그려 보라”고 했다.
그는 또 서슴없이 백지에 메달을 그렸다. 물론 그가 그린 메달은 김대중씨의 흉상이 새겨진 실제 메달이 아니라 체육대회 등에서 나누어주는 그런 메달이었다. 그는 실제로 김대중씨의 흉상이 새겨진 메달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재철씨는 김홍일씨 관련 신문에서도 김홍일씨를 서울 중구 소재 ‘서린호텔’ 등에서 3회에 걸쳐 접촉하고 학생선동 자금을 받았다고 진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잘 정리된 녹음기 소리 같았고 두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후 상의를 모두 벗으라고 명령했다.
그때 경찰간부 2명이 “그럴 것까지 뭐 있느냐”며 항의했지만 강경한 나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상의를 벗고 맨몸이 되었다. 그의 등은 가죽끈 같은 것으로 맞은 듯 길쭉한 상처가 10여개나 나란히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김홍일을 몰라본 심재철.

그 학생이 국가를 전복하려 했는가, 아니면 간첩으로 죽을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날 이후 나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수사관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후회하곤 했다. 그에게 옷을 입게 한 후 나는 배석한 경찰간부들을 질타했다.
“여러분이 공명심에 불타 권력에 아부하지만 그 언젠가 역사는 진실을 밝혀낼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조작으로 일부 출세하는 간부가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이 사실을 상부에 낱낱이 보고할 것이며 관련자들을 밝혀내 처벌토록 할 것입니다.”

남산으로 돌아온 나는 국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했지만 경찰간부들의 반발로 합수부로부터 더욱 강한 압박을 받게 됐다. 국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다음날 국장이 호출을 해서 갔더니 이런 제안을 했다.
“자네가 김홍일을 수사한 결과 정말 김홍일과 심재철이 만난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면 우선 두 사람을 대면시켜보는 것이 어떠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 어려운 확신범인 간첩을 수사할 때도 정황 증거들을 수집 분석한 후 한번 결론이 나면 그만인데, 김홍일씨를 끝까지 대학생들과 연계시켜 구속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합수부측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물러서기보다는 끝까지 조사하여 결판을 내보자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내가 국장에게 “자신 있습니다. 진실은 꼭 밝혀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국장은 즉시 대면시키는 방법을 강구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온종일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직속 상관과 숙의를 거듭했다.

당시 지하실 유치장 및 신문실에는 김홍일씨와 비슷한 30대 중반이 10∼15명 정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초조와 긴장의 밤이 지나고 다음날 10시경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피의자 중 김홍일씨와 비슷한 연령의 30대 후반 7명을 물색하여 각기 독방에 투입시켰다.
그러고 나서 나는 시경 특수대를 방문하여 심재철씨와 특수대 경찰간부 4명을 동행, 남산 대공수사국 지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사진 20여매(30대 후반의 남자 사진)를 심재철씨에게 보이며 그중에서 김홍일씨를 찾아보라고 했다. 물론 그중에는 김홍일씨의 최근 명함판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재철씨는 김홍일씨의 사진을 끝내 찾지 못했다. 나는 심재철씨에게 “그렇다면 최근 3번이나 만난 김홍일이니 직접 보면 알겠느냐?”라고 묻자 그는 “예, 직접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긴장하고 있는 경찰간부들에게 철저히 침묵할 것을 명한 후 심재철씨를 안내하여 지하실 독방을 처음부터 하나 하나 살피게 했다.
독방에 앉아 있는 7명 중 김홍일씨는 네번째 방에 유치되어 있었다. 심재철씨는 김홍일씨를 알아맞히기 위해 구치감 1호부터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을 구치감 문 쪽을 보고 앉게 했기에 심재철씨는 구치감 내의 사람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1호실 통과, 2·3호실 통과, 4호실에선 약간 멈춰서 있었다.
사실 김홍일씨는 김대중씨와 얼굴이 비슷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핀다면 쉽게 찾을 수도 있었다. ‘이곳 4호실이 김홍일씨입니다.’ 이 한마디면 진실이야 어떻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심재철씨는 4호실도 그냥 지나쳤다. 5, 6, 7호실 등 모든 방을 돌아본 심재철씨는 김홍일씨가 없다고 했다.

이제 진실 일부가 밝혀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부내의 진실일 뿐 합수부에서의 진실이 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정보부 수사요원들은 당시 정권 탈취에 눈이 먼 일부 정치장교들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홍일씨는 심재철씨와 연계되었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내란음모죄로 기소되지 않고 단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송치됐을 뿐이다. 반면 현재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맡고 있는 심재철씨는 교육부장관을 지낸 서울대 복학생 이해찬씨의 계열로 분류되어 내란음모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송치되었다.

면벽 침묵한 박성철씨.
이외에도 80년 5월부터 7월까지 수사과정에 나는 김대중씨와 관련됐다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2개월여에 걸쳐 가장 친숙하게 지냈던 박성철씨. 장군 출신인 박씨는 당시 경호팀 함윤식씨와 함께 김대중씨 경호를 맡고 있는 이른바 ‘경호실장’이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연루자로 연행된 그는 지하실에서 관련 혐의를 조사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이 부족해 수사경험이 적은 요원이 박성철씨 조사를 맡았다. 어느 날인가 박성철씨의 방에 갔더니 그는 수사관의 조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의자를 돌려놓고 앉은 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분노케 했는가? 나는 동료 수사관을 대신해 자리에 앉은 후 쳐다보지도 않는 박성철씨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박장군, 장군께서 이곳으로 오신 지 1개월이 지났습니다. 장군을 맡은 수사관이 경험이 부족해서 장군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인데 그 부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는 이곳 대공수사관으로 지난 5월17일 밤, 김대중 선생을 자택에서 남산으로 연행하여 조사한 이수사관입니다. 지금 김대중 선생께서는 바로 이 앞 방 303호실에 계시며 건강히 잘 계십니다. 지금은 김홍일씨 수사를 맡아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곧 일간신문을 보여드리겠지만 5·7 사태는 박장군과 같은 군장교들이 일으킨 또 하나의 혁명으로 보시면 되겠으나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인해 광주시민 유혈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정국이 참으로 어수선합니다만 저희 정보 수사관은 단지 상부의 명에 따라 움직일 뿐 정치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군과 이곳 수사요원은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지요. 물론 장군께서는 어떠한 범죄행위가 있어 이곳에 오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니 장군께서는 수사관의 신문에 대해 그저 사실대로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마침내 그는 돌아앉았다. 그리고 정색을 하면서 “이수사관이라고요. 고맙소. 그렇다면 최근 일간신문을 좀 보여주시오.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라고 나에게 신문을 요청했다. 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저녁 좀 늦게 제가 신문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라고 말했다. 피의자를 수사할 때는 신문을 못 보게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나는 피의자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그 관행을 깨뜨려버렸다.
그 이후 나는 신문을 들고 자주 박성철씨 방을 방문하여 시국을 논하기도 하고 일상생활 이야기도 나누는 등 편히 지내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박성철씨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송치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특별사면되었지만 1985년 1월경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신문을 통해 알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사소한 거짓말도 거부한 한화갑.

어느 날 복도를 지나는데 신문실에서 싸우는 듯한 고성이 들렸다. 한화갑(현 국민회의 국회의원, 총재특보단장)씨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한화갑씨와 담당관 윤수사관이 다투고 있었다. 내가 “한선생, 무슨 일이십니까?” 하자 그는 윤수사관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인격을 무시할 뿐 아니라 발로 차고 별짓을 다해요” 하기에 윤수사관에게 “너, 한선생을 고문했냐?”라고 물으니 그는 “고문하긴 누굴 고문해. 자꾸 거짓말을 해서 발로 좀 찼을 뿐...”라고 했다.
“무슨 거짓말해서 그러는데”라고 되물으니 윤수사관은 “글쎄, 보다시피 경찰보고서는 김대중씨의 불법 연설 녹음테이프를 재야인사들에게 200여개 배포했다고 되어 있는데도 20여개라고 자꾸 거짓말하니 성질이 날 수밖에”라고 했다. 그러자 한화갑씨는 “실제로 나누어준 게 20여개도 안 되는데 그럼 거짓말하란 말이야?” 하면서 또 싸울 기세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서로 다투다니.
나는 한화갑씨에게 “한선생, 선생은 명문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김대중 선생 밑에서 정치를 해오셨지요. 그런 정치적 감각과 학문적 식견을 가지신 분이니 한 가지 물어봅시다. 김대중 선생의 녹음 테이프가 불법인지 아닌지는 법이 판가름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배포가 금지된 테이프였다고 가정했을 때, 20여개 배포한 것과 200개 배포한 것이 현행법상 형량에 차이가 얼마나 날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한화갑씨를 설득했다.
“한선생. 이곳에서 경험 부족한 수사관과 싸우지 마시고 편안하게 계시다 가시면 됩니다. 한선생은 정치인 아닙니까. 수사관이 200개 아니냐고 진술을 강요하면 그렇다고 해버리세요. 그게 뭐 대단합니까. 어차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해결될 사건이니까요.”
그리고 윤수사관에게는 “이 사람아. 강원도에 있으면서 그것밖에 못 배웠나? 우리가 경찰 보고서대로 움직이는 경찰 하급 부서야? 한선생이 20개라고 하면 20개로 진술을 받으면 되지 왜 피곤하게 서로 다퉈”라고 하면서 윤수사관이 작성해 놓은 조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다시 조서를 작성했다. 물론 한화갑씨가 진술한 그대로 작성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한화갑씨의 방을 몇 번 드나들면서 ‘이분은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지식인인데 평생을 김대중 선생 휘하에서 고생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어느 때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느날 나는 한화갑씨에게 “한선생. 한선생께선 평생을 김대중 선생님을 받들고 계시는데 다른 직장도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직장을 갖고도 선생을 모실 수 있을 텐데요”라고 했다.
그는 “물론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요.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이 안팎으로 많았어요. 그래서 지난번 미대사관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응시해 합격했는데 이곳 (중앙정보부를 칭함)에서 탈락시켜 버렸지요”하며 미소를 지었다.

머리 맞아 피 흐른 김옥두.

지하실에도 여름이 다가오는 6월 하순, 오후 4시나 되었을까. 합수부의 정해진 각본대로 어느 정도 수사가 마무리되고 있을 즈음, 박성철씨의 조사실에서 한가히 시국담을 논하고 있을 때였다.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박장군 방에서 나와 비명소리가 난 조사실로 들어섰다. 김옥두씨(현 국민회의 국회의원)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동안 지하실에서 수사관과 조사를 받는 피의자 간에 원만하지 않은 일이 몇 차례 있었으나 사고는 처음이었다. 서 있는 김옥두씨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담당인 조수사관의 손엔 1m짜리 군용침대 막대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순간 ‘이놈이 사고를 쳤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침대막대를 뺏은 다음, 조수사관의 뺨을 두어대 때리고 나서 “빨리 의사부터 데려와”라고 소리쳤다.
즉시 남산 의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왔다. 지금 기억으로는 18바늘인가 정수리를 꿰매고 그 위에 탈지면과 반창고를 붙였다. 나는 담당과장에게 즉각 보고 후 수사팀을 교체했다. 그러고 난 후 수사관 대기실로 조수사관을 불렀다.

나는 후배인 그가 정보부에 들어올 때부터 정성을 다해 그를 지도했었다. 그는 수사에 열성이었고 앞날이 창창한 후배였다. “왜 그런 사고를 저질렀느냐?”라고 물으니 “성질이 아주 고약하고 건방지게 막 대들어요, 형!”이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평생을 김대중씨를 위해 살아온 김옥두씨로서는 정보부 지하실에 대한 피해의식이 상당할 것이다. 그것도 경상도 발음을 강하게 하는 조수사관을 만났으니 원수처럼 느껴졌겠지.

한편 조수사관 입장에서 보면 애당초 대공수사(간첩사건)만 해왔기 때문에 김옥두씨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지하실에서조차 전의를 불태우며 저항하는 것이 괘씸하게 여겼으리라. 그 당시 조수사관은 정치적 사건을 처음 맡았기 때문에 유연한 감각이 있을 리 없었다. 조수사관의 변명에 따르면 머리를 때리려 한 게 아니고 어깨를 치려는 듯 겁만 주려고 했는데 머리에 잘못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 경위야 어떻든 결과를 놓고 그를 심하게 꾸짖었다.
김옥두씨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를 진정시켰다.
“김선생. 김선생은 이곳이 처음이겠지만 대공수사국은 고문하는 곳이 아닙니다. 조수사관이 경험이 부족하고 어려 사고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정치사건을 다루어본 수사관이 몇 사람 없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제발 앞으로는 수사관과 싸우지 마시고 있는 사실대로만 말하시면 됩니다.”

재야 인사나 정치인 중 남산 대공수사국 지하실을 다녀간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 사람들은 노련하기 때문에 수사관과 적당히 타협(앞으로는 대공사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각서 작성)하고 지하실에서 나간 후에 정보부 지하실에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과장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옥두씨는 지하실에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김홍일씨와의 이별.

80년 7월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합수부가 이미 기획한 안대로 ‘유혈혁명 정부전복 기도 혐의’라는 조작극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해 7월 중순 어느 날. 김홍일씨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김홍일씨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김형, 오늘밤이 김형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오. 그간 고생 많이 했습니다. 나 자신 나름대로 편히 지냈으면 하고 최선을 다했으나 수사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미안합니다. 내일은 내 길지 않은 수사관 생활에 종지부가 찍히는 날일 겁니다. 재판이 종결되고 곧 자유의 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김홍일씨는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에 이수사관을 꼭 만났으면 하는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무심코 “광화문 사거리 현대빌딩 뒤에 ‘조양’이라는 중국음식점이 있는데 그 음식점을 운영하는 분이 내 형수님이니까 그곳에 가서 문의하면 내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그 근처에 ‘연청’ 사무실이 있는 관계로 가끔 조양에 들렀다고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오전 10시경 상부의 명에 따라 승용차를 이용, 김홍일씨를 태우고 함께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내가 직접 김홍일씨를 구치소로 안내할 필요는 없었지만 담당수사관으로서 내 생애 마지막 ‘피의자’가 된 김홍일씨를 구치소에 입소시키는 ‘악역’을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홍일씨는 승용차를 타고 구치소로 향하던 중 독립문 근처에서 느닷없이 “포고령 위반이면 얼마나 살고 나올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포고령 위반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치적 사건이니 아마 이번에 포고령 위반으로 송치되는 사람들은 누구나 1년형을 받게 될 것이므로 내년 이때쯤이면 사회에 다시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해줬다. 구치소에서 김홍일씨가 수의로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한두 번 손을 흔들며 그와 헤어졌다.

개인적으로 보면 광주사태로 피에 물든 지역 출신으로서 그 경위와 사건의 전말이 어떻든 ‘김대중 내란 음모 피의 사건’에 수사관으로 일했고 급기야 ‘김대중 선생님’의 장남을 구치소에 수감시켰으니 그 당시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이 사건에 관여했던 수사관들은 소주잔을 수없이 들이켰다.

'김대중사건'으로 표창 받아.
김대중씨는 80년 7월31일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전두환씨는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해 10월 초순. 나는 그동안 수없이 내 자신에게 약속했던 대로 미련없이 사표를 냈다. 남산에서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공수사관 생활에 아쉬움도 많았지만 평생의 고통보다는 잠시의 고통으로 나의 앞날을 재설계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표는 과장 손에 머문 채 여러 경로를 통해 철회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출근하지 않은 채 사표가 수리되기를 기다렸다.

10월 중순 국장이 불렀다. 몸이 좋지 않으면 1년간 휴가를 줄 테니 쉬라는 고마운 배려였지만 마음을 돌리기엔 이미 생각이 굳어 있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다. 이번 ‘김대중 사건’(약칭)으로 공로자 세 명을 표창키로 했는데 그중 한 명이 나라는 것이었다. 국장은 나에게 “다가오는 10월30일에 자네도 수상을 해야 하는데 이미 부장님 (당시 유학성)으로부터 결재가 났으니 번복할 수가 없다. 수상만 하게 되면 곧바로 사표를 수리해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동안 5·7 사건이 공정한 수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수사관들에게 나름대로 많은 권한을 부여했던 국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국장과 약속한 대로 나는 국가유공표창을 받았고 그해 11월5일 별정직 공무원의 옷을 벗었다.

사회에 나왔으나 대공수사관 출신이 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몇 개월 무위도식하다가 후배가 운영하는 을지로 삼풍호텔옆 신성상가 2층 조그만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81년 8월 중순이었던가? 오전 10시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무실에서 후배가 넘겨주는 전화를 무심코 받았다. 수화기에서 느닷없이 “김홍일입니다” 하지 않는가. 깜짝 놀라 “누구시라구요?” 반문하자 “남산에서 뵈었던 김홍일이에요. 그저께 출소했습니다. 찾아뵙고 싶은데 거기가 어디입니까?”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김홍일씨와 그날 11시경 삼풍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벌써 1년인가. 1년 전의 약속을 잊어버리진 않았지만 설마 찾기야 하랴 생각했는데 그는 정확히 약속을 지켰다. 서로 “잘 있었느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안부 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오랜 침묵 속에 가족들에 대한 안부 등을 묻고는 20여분만에 싱겁게 헤어졌다.

반성과 사죄.

85년에 호주로 이민 갔다가 94년 영구 귀국한 나는 지난해 7월 어느 날 김홍일의원을 만나고 싶어 무작정 상경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쪽으로 향하는 택시 속에서 기사에게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제일 가까운 여관에 좀 내려주시오”라고 요청했더니 그는 나를 여의도 맨해턴호텔 앞에 내려주었다.
일단 호텔에 투숙한 후 김의원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비서관은 “김의원께서 최근 몸이 불편하여 의원회관에 잘 나오지 않으니 연락처를 주면 김의원에게 전하겠다”고 하여 핸드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3일째 되던 날, 비서를 통해 그날 오후 김의원이 맨해턴호텔 모임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호텔에서 기다렸다.
오후 4시경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내리는 김홍일 의원에게 다가가 “김의원, 접니다” 했더니 그는 “어, 이형. 그래 서울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워낙 바빠서. 이리 와요. 같이 갑시다” 하며 나의 손을 붙들고 정문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안내했다. 국회의원회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동행한 자신의 경호원들을 소개하고 고향에서 무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나는 김의원과 단둘이 마주앉아 40여분간에 걸쳐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 가족이야기 그리고 건강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비서관에게 자신의 저서 ‘세계를 향한 지방자치’를 가져오게 하여 나에게 서명해준 후 비서관에게 나를 소개시키면서 “이기동씨는 옛날 5?8 때 안기부에서 어르신과 나를 조사했던 수사관인데 우린 악연이 아니고 호연관계예요”라고 하며 웃었다. 나를 정답게 맞이해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오랜 세월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그가 이제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러나 그 어려웠던 시절 내가 알게 모르게 고통을 준 사람들도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험악했던 것이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때론 경직된 사고로 나라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깊은 반성과 함께 사죄를 드린다.

2005/04/17/ 02:24 이기동.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증언/ 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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