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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장 생각

최태영과 이병도,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작성자청년회장|작성시간25.12.23|조회수73 목록 댓글 0

최태영(崔泰永, 1900~2005)은 법학자였다. 1924년 일본 메이지(明治) 법학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1925년 보성전문학교에서 법을 가르치며 한국인 최초의 법학 정교수로 불리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상법·민법 등 법제정비와 법학교육의 기틀을 다지는 데 깊게 관여했고, 서울대 법대의 초기 운영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법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늦은 나이에 상고사(上古史) 연구로 들어가 단군과 고조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재야사학’으로 분류되든, 비주류로 불리든, 그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한민족의 시작을 “신화”로만 묶어두는 순간, 현재의 자존과 미래의 상상력까지함께 쪼그라든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에게 상고사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정체성의 뿌리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식민지 지배에 유리한역사 서술을 체계화했고, 그 과정에 이병도와 신석호등 조선인 학자들도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해방 이후에는 그 계보와 방법론이 학계와교육 현장에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는지를 두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된다. 최태영은 그 논쟁의 한복판에서, ‘근거가 없다’는 말로 끝낼 수 없는 질문을 끈질기게 되물었다. 단군을 부정하는 일이 곧바로 학문적 엄정함을 뜻하느냐, 반대로 단군을 말하는 일이 곧바로 신비주의를 뜻하느냐. 그는 그 이분법 자체가 식민지기의 상처를 그대로 끌고 온 결과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와의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두 사람의 교분과 설득의 과정은 회고·인터뷰 형태로 전해지며, 이병도가 말년에 단군을 ‘우리 국조’로 언급한 신문 기고가 있었다는 정리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 1989년에 나온 『한국상고사입문』은 공저로 소개되기도 한다. 다만 이 지점은 서지 표기가 엇갈리는 만큼, ‘완전한 전향’이나 ‘사과문’같은 강한 단정 대신, “입장 변화로 해석되는 측면도 있다.

최태영 박사가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문장은 결국 하나였다. 과거를 잘라내면 현재는 뿌리를 잃고, 뿌리를 잃은 현재는 미래를 밀어 올릴 힘을 잃는다는 것. 상고사를 둘러싼 논쟁이 감정싸움으로만 흐를수록, 남는 것은증명도 반박도 아닌 ‘정신의 피로’뿐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 논쟁의 승패보다, 한 민족이 자기 뿌리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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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원로 사학자 두계 이병도 박사의 특별 기고문을 정리해 본다. 이 글은 평생 실증사학을 추구했던 저자가 만년에 단군을 신화가 아닌 실재했던 우리 민족의 국조(國祖)로 인정하며, 그 역사적 근거를 밝힌 기념비적인 글이다.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의 국조: 역대 왕조의 단군 제례는 일제 때 끊겼다>

'하늘을 연다'는 의미의 '개천(開天)'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기서 '천(天)'을 부족의 우두머리인 '군장(君長)'으로 해석한다면 개천절은 곧 '군장이 세워진 날'을 뜻합니다. 즉,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시조인 단군이 즉위하여 나라를 세운 개국과 건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 따르면,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불렀습니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습니다. 이는 겉보기에 신화처럼 들리지만, 실상 환웅은 지상 국가를 개창한 군장이자 인간 사회의 모든 일을 돌보는 수호신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수호신이 머무는 곳인 '신단수'는 오늘날 민속 신앙의 '서낭당'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본래 '선왕당(仙王堂)'이라 불리던 서낭당은 곧 '천왕당(天王堂)'이며, 그곳의 나무가 신단수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神壇)입니다. 옛날에는 이 신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락이 바로 '신시'였던 것입니다.

또한 환웅이 곰이 변한 여자인 '웅녀'와 혼인했다는 기록에 대해, 저는 오래전부터 이를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던 부족의 여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즉, 단군은 하늘을 숭배하는 선진적인 '천신족(환웅)'과 땅의 '지신족(웅녀)'이 결합하여 탄생한 존재인 것입니다.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해 온 것 역시 깊은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예부터 10월은 '상달'이라 하여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추수 감사제가 열리던 달이었습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 모두 이러한 10월의 제전이었습니다. '상달'의 '상(上)'은 우리말 '수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이는 '높다', '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고유의 전통이 근세에 이르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단군 입국의 개천절로 계승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단군 기록을 제외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김부식의 머릿속에도 평양은 '선인 왕검(단군)'의 터전이라는 인식이 확고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집"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의 육촌 사람들도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누어 살며 형성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김부식이 참고했던 고대 기록(고기, 古記)들에 단군의 역사가 분명히 실려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단군에 대한 숭모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어졌습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유관의 상서를 보면,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곳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세연가(世年歌)'라는 노래를 통해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고 이후 아사달로 들어갔다는 역사가 민간과 지식인들 사이에 가사 형식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특히 세종 대에는 단군을 기자의 사당에 함께 모시던 것을 바로잡기도 했습니다. 당시 학자 정척은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웠고, 기자는 그보다 1,200여 년 뒤인 무왕 때 봉해졌으니, 단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별도의 사당을 지어 단군을 남향(임금의 자리)으로 모시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대 왕조는 단군을 명실상부한 '국조'로 받들었으며, 이 전통이 끊긴 것은 오직 일제의 강점기 때부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은 다른 문헌과 유적, 민속적 증거들이 뒷받침하는 믿을 만한 역사입니다. 단군을 단순히 전설이나 신화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국가적 제례와 민중의 기억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단군 조선의 역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일 뿐,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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