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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장 생각

36년의 전쟁, 단군의 이름으로 -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종교

작성자청년회장|작성시간26.06.05|조회수29 목록 댓글 0

일제가 어떤 집단을 탄압할 때, 그 집단이 무엇을 가졌는지를 역으로 알 수 있다. 수단이 거셀수록, 집요할수록, 대상이 품었던 것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다는 뜻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1910년부터 패망하는 1945년까지, 단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았던 탄압의 대상이 있다.

대종교다.

총을 든 무장 독립군도 있었고, 3·1운동처럼 거리로 쏟아진 민중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가장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추적한 것은 총을 든 군대가 아니었다. 단군의 이름으로 뭉친, 종교 집단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짚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먼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떤 집단이 외세에 짓밟힐 때, 가장 먼저 공격받는 것은 그 집단의 정체성과 맞닿은 것들이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받았을 때 팔관회(八關會)가 중단됐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교가 국시가 되자 단군은 기자(箕子)에게 밀려났다. 팔관회가 어떤 행사였는지를 안다면, 이 맥락이 보인다. 팔관은 단순한 불교 의례가 아니었다. 고구려 동맹(東盟)제의 계승이었고, 신라의 팔관재(八關齋)를 거쳐 고려가 계승한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 의례였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구려의 동맹이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됐다는 기록이 있다.

993년 거란 침략 당시 이지백이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는 팔관과 연등, 선랑의 정신으로 외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정신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 상소 하나로 분명해진다. 그것은 자주적·민족적 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팔관회가 공식적으로 중단된 때가 네 번 있었는데, 모두 원(몽고)의 간섭기였다는 사실이 더없이 직접적인 증거다. 정복자는 언제나 피정복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의례부터 없앤다.

조선에 들어서는 더 체계적이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에서 단군은 혈연적 시조로만 축소됐고, 기자에게는 문화적 군주의 지위가 주어졌다. 정도전이 조선 건국 당시 국호를 정하면서 기자조선을 계승했다고 명시한 것, 그리고 단군묘는 건립되지 못하고 기자묘만 건립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심지어 1412년에는 기자묘에 단군이 배향되는 형국이 됐다. 단군이 기자에게 빌붙어 사는 처지가 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역사서의 수난이었다.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내려진 수서령(收書令)은 우리 신교(神敎) 전통을 담은 사서들을 국가 권력이 직접 수거해 소각한 사건이었다. 숨기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는 극단의 위협까지 동원했다. 신채호는 "단군사가 전하거나 부여사가 전하거나 고흥의 백제사가 전하였으면…"이라고 절규했다. 역사서다운 사서는 모두 없어지고 사대주의에 물든 기록들만 남았다는 것, 이것이 조선이 우리 정체성에 가한 상처였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사건의 의미가 비로소 선명해진다. '중광'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있던 빛이 다시 밝아졌다는 뜻이다. 나철이 내건 명분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이었다.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창립 선언이 아니었다. 조선조 수서령으로 지워지고, 성리학의 중화주의에 눌렸던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神敎) 전통을 다시 불러내는 선언이었다.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일제와의 충돌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나철은 일본 총리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이렇게 물었다. "일본 민족의 근원과 신교(神敎)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사(神社)의 삼보한괘(三寶韓几)와 궁내성(宮內省)의 오십한신(五十韓神)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의관문물과 전장법도가 다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일본 신도(神道)의 뿌리가 조선의 신교에 있다는 것을, 일본 총리에게 직접 들이민 것이다.

일제로서는 이것이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는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정립하고, 침략지에 신사를 건립함으로써 그것을 식민지 지배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해외 신사 건설은 종교침략과 일맥했다.

'일본의 신이 강림하는 영토'라는 국체(國體) 교의가 그 근거였다. 그런데 정작 신도의 원류가 조선의 신교에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조선 땅에 버젓이 서 있다면, 그 정신적 지배의 논리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일제가 대종교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909년 교단이 성립된 직후부터 일제통감부 경시청의 감시가 시작됐다. 병탄 직후 일제는 대종교 해산을 획책했으나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종교 탄압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대신 포교활동을 막고 집회를 금지하는 우회적 방식을 선택했다.

1911년,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이 조선총독부에 보낸 보고서는 당시 일제의 대종교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주 지역 학교에서 대종교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문제 삼으며, 총독부는 대종교를 "기성 공인종교인 신도·불교·기독교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종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판단은 이후 일제 종교정책의 일관된 기조가 됐다.

1915년 8월 16일 공포된 조선총독부령 '포교규칙'은 그 완성이었다. 이 법령은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불도 및 기독교를 일컫는다"고 규정하면서, 세 종교만을 종교로 인정했다. 그 외의 것들은 '유사종교(類似宗敎)'였다. 대종교는 그날로 합법적인 종교 지위를 박탈당했다. 포교금지는 물론, 사사로운 집회나 강연조차 일절 금지됐다.

1920년대 대종교인의 증언이 남아 있다. "대종교에 대한 감시야 실로 끔찍하였지요! 빈궁한 살림살이에 고정한 회당조차 없이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는 곤경에다가, 피가 뛰고 이가 갈리는 비분한 경우도 많이 당하였습니다." 신앙을 가지려 해도 탄압이 너무 심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종교가 선택한 길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비밀결사였다.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귀일당, 조선어학회 등 대종교의 정신과 인적 네트워크는 비밀결사의 형태로 움직였다. 1913년 1월 15일, 대종교의 중광절을 기해 달성군에서 모임을 가진 서상일·윤상태 등이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의 맹세가 생생하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이 일한병합으로 망했으니 우리 시조 단군대황조에 미안한 일이니 어떻게 해서든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 위패 앞에서 서약서에 연서했다. 이것은 나철이 1909년 음력 1월 15일 동지들과 함께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를 걸고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의례와 동일한 형식이었다. 정신의 계승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만주로의 망명이었다. 1914년 5월, 나철은 대종교 총본사 자체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坡湖)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 종교 단체가 종교적 망명을 단행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만주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었다. 대종교에 있어 만주는 '땅 위의 한울집[地上天宮]'이었다. 부여족의 활동 무대이며, 단군신앙의 종교적 시원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청파호 북쪽 백두산 기슭은 종교적 성지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이 됐다.

만주에서 대종교가 이룬 것들을 살피면, 왜 일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대종교를 없애려 했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1911년 서일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광단(重光團)은 만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것이 대한정의단을 거쳐 북로군정서로 발전했다. 1920년 10월, 서일을 총재로 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 전투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이 승리의 중심에 대종교인들이 있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이 주도하여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됐다. 서명자 39인 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규식도 대종교 시교사 자격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한국민족의 부흥은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하는 데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임시정부 창설기 이후 국무위원급 이상으로 참여한 대종교 인물이 37명에 달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영향은 대종교 입교자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이 '국교적 대종교관', 즉 대종교에 직접 입교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신규식·박찬익과 의형제를 맺고 어천절 찬송사를 읊었으며, 대종교 국내 총책임자 강우가 1918년 이미 이승만을 대종교에 입교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안창호는 개천절 송축사에서 단군 자손으로서의 자긍심을 드러냈고, 이동휘도 개천절 축사에서 한배님의 은덕을 노래했다. 백범 김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배달민족으로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문화 영역에서의 영향도 그에 못지않았다. 주시경은 예수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했다. 그는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 침략을 당한 것이라고 여겼다. 주시경의 수제자이면서 나철의 수제자이기도 했던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가 이어간 한글운동의 배경에 대종교라는 정신적 기반이 있었다. 김교헌·박은식·신채호·정인보·안재홍·이상룡 등 민족주의 사학의 바탕에도 대종교가 있었다.

1920년대 말, 국내의 대종교 조직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일제의 탄압은 만주로 옮아갔다. 1926년 길림성장 장쭤샹(張作相)은 만주 지역 대종교포교금지령을 내렸다. 대종교총본사는 만주 각지를 전전하며 철저히 은둔해야 했다. 1929년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시기는 교세 위축을 넘어, 교단 체제와 연락망 그리고 기록의 분실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시간이었다.

1942년 여름, 모든 정황 정보를 확보한 일제는 때를 기다렸다. 그해 윤세복이 국내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 속에 동봉된 원고 「널리 펴는 말」이 빌미가 됐다. 원고의 마지막 구절 "일어나라, 움직이라!"를 일제는 검열 과정에서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했다. 그리고 이것을 「조선독립선언서」라 하여 대종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는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해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만주와 국내 각처에서 동시에 체포했다. 이것이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같은 날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민족의 혼을 지우려는 탄압과 한민족의 말을 지우려는 탄압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사건의 연결고리는 분명했다. 이극로와 윤세복이 주고받은 서신이 두 사건 모두의 빌미가 됐다. 훗날 당대의 기록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한글어학회 사건이 즉 대교(大敎) 교변이요, 대교 임오교변이 즉 독립운동실기가 되는 것이다."

4개월이 넘는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권상익, 이정, 안희제, 나정련,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나정문, 이창언, 이재유. 열 명이 고문의 여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철의 두 아들 나정련과 나정문이 그 열 명 안에 있었다. 아버지가 대종교를 중광하고 구월산 봉심 중 순명한 것처럼, 두 아들도 그 정신을 따라 목숨을 냈다. 살아남은 간부들은 교주 윤세복이 무기형, 나머지도 7년에서 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임오교변은 일제강점기 한국 종교사에서 최대 규모의 박해 사건이었다. 신구서적 2만 3천여권과 중요 문서 600여 점이 압수됐다. 인적 자원만이 아니라 교리와 역사를 담은 기록까지 통째로 사라졌다.

임오교변으로 대종교는 모든 것을 잃었다. 교단의 중심 인물들이 감옥에 있거나 죽었고, 종교 활동은 중단됐으며, 사료는 압수됐다. 1942년의 그날 이후, 대종교는 사실상 기능을 잃어버렸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했다. 목단강 감옥에서 살아남은 대종교 간부들이 출옥했다. 1946년 3월, 만주 망명 33년 만에 총본사가 서울로 귀환했다. 그러나 해방된 나라에서 대종교를 기다린 것은 따뜻한 복귀가 아니었다.

국내의 발판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교육기관도 문화공간도 없었다. 이념의 분단이 대종교 지도자들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정인보, 안재홍, 조완구 등 핵심 인물들의 납북으로 이어졌다. 한 번의 전쟁이 교단의 지적 자산과 인적 기반을 또다시 쓸어갔다.

그래도 흔적은 남았다. 해방 후 '단기연호'가 공용연호로 채택됐고,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됐고, '홍익인간'이 교육법에 국가 교육이념으로 명시됐다. 대종교가 국내에서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 이후 단기연호가 포기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개천절은 형식적 국경일로 밀렸고, 홍익인간은 교육적 장식 구호로 전락했다.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새마을운동 속에서 대종교의 정신적 유산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오늘날 대종교 총본사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중앙로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교세는 미미하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했으면서도 가장 적게 조명받는 집단으로 남아 있다. 총본사 서고에는 『대종교중광육십년사』와 기록들이 남아 있고, 임오교변으로 빼앗기지 않은 것들,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들이 쌓여 있다.

일제가 그렇게 공을 들여 지운 것이 있다면, 거기에 반드시 무언가가 있었다. 신교(神敎)와 신도(神道)의 전쟁에서 일제는 기록을 빼앗고, 지도자를 죽이고, 이름을 지웠다. 그 지워진 이름들이 '단군'이라는 이름 안에 있었다.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그 정신을 담고 있었다. '개천절'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말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그토록 지워지려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서대문구 북한산 자락에서 그 기억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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