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서일'과 '김좌진'을 먼저 떠올린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였고, 김좌진은 전장을 이끈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뒤에서 조직 전체를 실질적으로 굴리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1862~1928).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독립운동 기념관 어디에도 그의 얼굴 사진은 없다. 그러나 1919년부터 1925년 신민부 통합까지,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의 뼈대를 이룬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 인물이 있었다.
■ 경성(鏡城)의 유림, 칼 대신 학교를 들다
현천묵은 1862년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어랑면 부윤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백취(白醉). 그가 직접 작성한 이력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 그는 10세부터 22세까지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십 수 년간의 유학 수업,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집안의 재력, 이 두 가지가 훗날 그가 경성 지역 유림 사이에서 빠르게 세력 기반을 쌓을 수 있었던 토대였다.
1906년 그는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이상동에 위치한 보성학교(普成學校)의 학감으로 취임했다. 보성학교는 같은 해 3월 경성향교 유생들의 허락을 얻어 향교 앞 공터에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다. 수신, 국어, 한문, 일어, 지리, 역사, 산술, 물리, 법학, 경제 등 당시로는 폭넓은 교과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1909년부터 현천묵은 이 학교의 교장직까지 맡았다.
이듬해인 1908년 7월 16일, 그는 대한협회(大韓協會)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됐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된 후 1907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애국계몽운동 단체다. 강령은 교육 보급, 산업 개발, 생명재산 보호, 행정제도 개선 등 7개 조항이었다. 지회장에 취임한 현천묵은 교육부, 재무부, 실업부를 신설하고 조직을 강화했다. 경성지회는 대한협회 전국 지방 지회 중 회원 수가 가장 많은 지회였다고 한다.
그런데 경성지회는 다른 지회와 결정적으로 달랐다. 대한협회 본부는 항일 의병 활동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천묵이 이끄는 경성지회는 경성의병(鏡城義兵)과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했다. 보성학교와 함일학교 후원 명목으로 모은 자금이 실제로는 의병 활동 경비로 제공됐다. 지회 회원들이 의병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1908년 9월에는 경성의병과 함께 명천군에 주둔한 일본 군경을 기습 공격하기도 했다.
이 명천전투에서 경성지회 핵심 인물들이 대거 체포됐다. 지회 해산 위기였다. 이때 현천묵은 이른바 "친일을 가장하여" 본인 이하 간부 6명과 두 학교 학생들을 단발시키는 임기응변으로 지회를 지켜냈다.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합법적인 계몽운동의 한계를 직접 목도한 그는,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 단군교 중광(重光)의 현장에서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 나철(羅喆)은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 인근의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 신위를 모시고 제천대례를 올렸다. 단군교 중광(重光), 곧 대종교의 출발이다. 이날 참가한 인물들의 명단에 현천묵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당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현천묵이 1909년 2월 서울에 머물고 있었음을 확인되었다. 두 신문은 그를 함경북도 경성 거주 자선가로 소개하며, 그가 고아원 형편을 보고 기부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단군교 중광 시점에 서울에 있었던 것이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는 그가 "대교 중광의 직후에 도선봉교(道先奉敎)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교단이 문을 연 직후 가장 먼저 입교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뜻이다. 현천묵은 호석(湖石) 강우(姜虞)를 통해 단군교와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우는 1895년부터 1904년까지 9년간 함경도 감리(監理)를 지낸 인물로, 현천묵과의 접점이 이 시기에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훗날 현천묵이 사망했을 때 추도문을 지은 사람이 바로 강우였다.
전통 유학을 바탕으로 한 현천묵이 왜 새로운 종교에 그토록 빠르게 귀의했을까.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옷을 입고 들어온 종교라면, 단군교는 망해가는 나라의 맥을 단군이라는 민족의 시원(始源)에서 되살리려는 운동이었다. 유림의 언어로 말하자면, 화이(華夷)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我道(우리의 도)를 지키는 방식. 그것이 단군교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던 그에게, 단군교는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법론이었던 셈이다.
■ 북간도에서 대종교를 뿌리내리다
1910년에서 1911년 사이, 현천묵은 북간도로 망명했다.
1908년 일제의 사립학교령으로 보성학교와 함일학교가 함일실업학교로 통합됐고, 한일병합 이후 이 학교마저 폐교됐다. 대한협회 경성지회 역시 명천전투 이후 일제 감시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진 것이다. 경성의병 출신 인사들, 대한협회 경성지회원들이 하나둘 북간도로 떠나기 시작했고, 현천묵도 그 흐름을 따랐다.
당시 북간도에는 함경도 출신 이주 한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있었다. 경성은 일제 제19사단이 주둔한 군사 요충지였고, 그만큼 수탈도 심해 주민들의 탈출이 잦았다. 1910년 10월 대종교는 북간도 삼도구에 시교사를 설립했고, 1914년에는 본부를 백두산 북쪽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전했다. 이 이주 한인 집단을 기반으로 대종교 포교를 확대하려는 교단의 계획에 현천묵이 합류한 것이다.
북간도에서 그의 포교 활동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용연김정규일기'가 생생하게 보여준다. 1912년 1월 29일, 함경북도 경성 출신 학자이자 의병 참모장 출신인 김정규(金鼎奎, 1881~?)가 현천묵으로부터 대종교를 권유받는 장면이 일기에 기록돼 있다. 현천묵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양의 사조가 크게 동탕하여 선비들마다 도를 달리하고 사람들마다 논의를 달리하지만, 오직 단군교로 명분을 삼는 자들만이 조국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조국의 정신을 고무시켜 외부적인 교설을 갖춤으로써 국혼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군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군주이자 만백성의 종조(宗祖)이십니다."
국혼(國魂).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민족의 혼을 지키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논리였다. 현천묵은 이런 방식으로 북간도 곳곳에서 대종교를 전파했다. 1912년 10월 3일, 대종교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고 처음 맞는 개천대경절 행사에서 나철 다음으로 경하사(慶賀辭)를 낭독한 사람이 현천묵이었다. 교단의 공식 석상에서 2인자 역할을 맡을 만큼 그의 위치가 확고했다는 뜻이다.
그는 포교와 함께 학교 설립에도 나섰다. 1912년 9월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청일학교(靑一學校)를, 같은 해 10월 화룡현 이도구 왕지하에 동일학교(東一學校)를 세웠다. 청일학교는 한문·산술·습자 등 기초교육을, 동일학교는 중국어·역사·지리 등 심화 과목까지 가르쳤다. 두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학교는 포교의 통로이기도 했다. 동일학교는 1920년 대한군정서 훈련을 견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독립운동과 직결된 교육기관으로 성장했고, 졸업생들이 대한군정서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 대한군정서의 실질적 운영자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이후, 3·1운동의 불꽃은 북간도로 번졌다. 현천묵은 1919년 3월 24일 연길현 이도구에서 주민 80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같은 해 8월, 서일·현천묵·김좌진·계화 등은 대한정의단을 항일무장투쟁단체로 재편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했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 국무원포고 제205호에 의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인준됐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의 3인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대한군정서 사령부일지는 1920년 7월 1일부터 9월 13일까지의 기록이다. 이 일지는 "총재 서일 각하 대리 부총재 현천묵 각하의 명령으로"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당시 서일은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자리를 비웠고, 김좌진도 부대 밖에서 활동 중이었다. 실질적으로 군정서를 운영한 것은 현천묵이었다. 그는 서일과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무기 구입을 지원했고,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특파원 왕삼덕과 안정근을 회견했으며, 사관양성소 수업과 졸업식에 참여해 훈시했다. 군자금 모집을 위한 모지대(募指隊)를 설치하여 관리했고, 단체의 기밀 유지를 위해 일본인 밀정을 처단하는 단호한 결정도 내렸다.
1920년 10월, 봉오동전투 승리 이후 일제의 대규모 병력이 간도로 쏟아져 들어오자 독립군은 근거지 이동을 결정했다. 10월 19일, 현천묵·계화·이범석·홍범도·박영희 등 대한군정서와 홍범도부대 지휘부가 모여 대응책을 논의했다. 전투파와 피전파가 맞섰다. 이 자리에서 현천묵은 피전(避戰)을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세 가지였다.
첫째, 훈춘사건으로 아군의 기존 작전 체계가 흐트러진 상태다.
둘째, 설령 전투에서 이긴다 해도 중국 측의 감정을 해치게 된다.
셋째, 일본은 더 많은 군대를 파병할 것이다. 지금 우리 단체는 독립과 광복에 꼭 필요한 존재다. 일단 자중하여 힘을 키워야 한다.
피전론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도구와 삼도구로 침입한 일본군이 한인 촌락과 학교, 교회를 불태우고 학살을 자행하자, 독립군은 교전을 결정했다.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이어진 10여 차례의 전투, 이것이 청산리전투다.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였다. 현천묵의 피전론이 채택됐다가 번복된 이 10월 19일 회의는, 청산리전투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면이다. 그가 단순한 상징적 부총재가 아니라, 군사전략적 판단에도 깊이 관여한 실질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 서일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구심점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간도의 이주 한인 3,469명(기록상)이 학살됐고, 1921년 6월 28일에는 자유시참변(黑河事變)이 터졌다. 독립군 통합을 위해 러시아 자유시에 집결했던 대한의용군이 소비에트 극동군에 의해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다. 수많은 독립군이 체포·감금됐다. 설상가상으로 마적단의 습격까지 이어졌다. 결국 서일은 1921년 음력 8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00년대 초 함경도에서부터 함께해온 동지의 죽음이었다. 나이로는 아들뻘이었지만 서일은 현천묵이 인생의 후반부를 걸어갈 방향을 함께 결정한 사람이었다. 그 죽음 앞에서 대한군정서는 해산을 논의했다. 현천묵을 비롯한 간부들은 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쌓은 실적이 무의미해지는 것, 서일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단체가 무너지면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이 군정서를 가볍게 여길 것이라는 반대 의견이 모였다. 결국 단체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61세의 현천묵이 총재 자리에 올랐다.
서일이 종교인으로서의 저술과 사상으로 대종교와 군정서를 이끌었다면, 현천묵의 강점은 사람이었다. 1900년대 초 함경도에서 의병과 개화인사, 유림을 두루 아우르며 구축한 인적 기반. 그것이 북간도에서도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함경도 출신 이주민들, 경성의병 출신 독립군들, 그가 설립하고 교장을 맡아 키워낸 학교 졸업생들. 이 인적 네트워크가 자유시참변과 서일의 사망이라는 이중 충격 이후에도 대한군정서가 와해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한 실제적인 힘이었다.
■ 대종교 부흥과 통합운동의 마지막 10년
총재가 된 현천묵은 먼저 본부를 밀산현에서 대종교 본당이 있는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겼다. 독립운동과 종교를 하나로 묶겠다는 선택이었다. 대종교 교주 김교헌도 이에 적극 찬성했다. 서일 사망 이후 위축된 교세를 회복하는 것이 급했던 교단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했던 군정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정이었다. 현천묵은 군정서원들을 각지에 파견해 대종교 창기문(創起文)을 배포하게 했고, 해림·하얼빈 등지에 포교기관을 설치했으며, 부녀자들에게도 포교를 맡겼다.
동시에 통합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1923년 초 김좌진이 개최한 조선독립단대회에 대한군정서 대표로 참가했고, 기진회(期進會)라는 예비 조직을 만들어 김좌진·김규식·이범윤 등과 통일을 논의했다. 1923년 9월에는 군정서·의군부·혈성단·독립단·광복단·국민회 등 9개 단체가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고 이범윤을 임시 단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현천묵은 이범윤과 함께 남북만주 각 단체에 군사 통일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구체적인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그가 만주 독립운동계에서 통합운동의 주요 당사자였음은 분명하다.
1924년 3월, 현천묵은 대한군정서를 재조직했다. 군사부장 조성환, 서무부장 나중소, 재무부장 계화, 참모 조성환을 임명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고려혁명군 총사령관 김규식과의 협상 끝에 두 단체를 통합하여 영고탑 대종교당에서 조선독립당군정서연합회총회를 열었다. 5월부터는 하얼빈·동녕현 등지에서 무기 구입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흑룡강성 오운현에 사관학교 설립 계획도 추진했다.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열린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석하여 북만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합의했다. 그해 3월 10일 신민부(新民府)가 정식으로 조직됐다.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국민회군, 서로군정서 등이 하나로 합쳐진 통합 기구였다. 현천묵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원장을 맡아 핵심 역할을 했다. 같은 해 9월과 1926년 10월, 상해 임시정부는 현천묵을 국무원에 두 차례 선임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취임을 거부했다. 상해보다 만주에 남아 통합운동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1926년 초에는 신민부 대표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신한촌에서 열린 재만조선동포간부회의에 참여해 임시정부, 고려공산당, 정의부, 의열단, 대한통의부 대표들과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다. 3월 중순에는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정의부 김동삼·이철, 참의부 오동진 등과 전만주 통일 방안을 협의했다.
■ 역사가 기억하지 않은 사람
1927년 1월 15일, 현천묵은 대종교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질됐다. 상교된 지 5년 이상으로 공헌이 많은 자에게 주어지는 직위다. 1926년 말부터 그의 행적은 불분명해진다. 병을 앓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그는 영안현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동지였던 강우가 추도문을 지었다.
"북관(北關)의 호걸이요, 동도(東道)의 문장으로 흰 머리를 흩날리며 청년들을 격려 지도하시었습니다. 오래도록 독실히 믿고 늙으면서 더욱 건강하시니 백세는 누리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신병이 어인 일이었소."
현천묵은 서일처럼 신학적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김좌진처럼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성 유림에서 시작하여 애국계몽운동, 단군교 봉교, 북간도 대종교 포교, 대한군정서 운영, 청산리전투, 자유시참변 극복, 신민부 창설까지 거의 20년에 걸친 항일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 그가 있었다. 서일이 중광단, 정의단, 대한군정서를 조직할 때마다 현천묵이 항상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은, 역으로 현천묵의 세력 기반 없이는 그 조직들이 성립하기 어려웠음을 뜻한다.
대종교와 북간도 독립운동에서 나철, 김교헌, 윤세복, 서일에게만 초점을 맞춰왔다. 현천묵은 이 큰 이름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세력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북간도에서 신민부로 이어진 대종교 독립운동의 인적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현천묵이라는 구심점이었다.
최근 학계에서도 청산리전투 100주년을 계기로 북로군정서와 대종교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황민호 교수는 2020년 논문 「청산리전투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과제」에서, 일본인 연구자 사사 미츠아키(佐佐充昭)가 2017년 청산리전투 당시 대종교 세력의 무기 구입과 운반, 북로군정서의 역할을 새롭게 평가한 작업을 주목하며 외국 학계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신효승 연구위원은 2018년 논문에서 청산리전투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제기하기도 했다. 전과(戰果)의 규모를 둘러싼 논쟁과는 별개로, 이 전투가 대종교를 기반으로 한 인적·조직적 역량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량의 토대를 쌓은 사람 중에 현천묵이 있었다.
서훈이 늦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천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총을 든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이 무너지려 할 때 버텨내고, 분열된 단체들 사이를 오가며 통합을 설득하는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독립운동은 지속된다.
현천묵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억될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