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청년회장 생각

사는 것이 사상이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작성자청년회장|작성시간26.06.23|조회수21 목록 댓글 0


'철학(哲學)'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 메이지 시대 사상가 니시 아마네(西周)가 philosophy를 옮기면서 처음에는 '희철학(希哲學)'이라 불렀다. 주돈이의 '통서(通書)'에 나오는 '사희현(士希賢)', 곧 '선비는 현철함을 희구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앞의 '희(希)'가 떨어져 나갔고, 남은 두 글자 '철학(哲學)'이 동아시아 전체로 퍼졌다. 1877년 도쿄대학이 출범할 때 문학부에 철학이 정식 교과로 자리 잡으면서 이 단어는 제도 안에 박혔다. 과학, 연역, 귀납, 심리 같은 단어들도 같은 시기 니시의 손에서 나왔다.

한국어에 원래 없던 단어다.
그 사실이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우리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만든 이 사유 방식은 삶과 구분된 자리에 있었다. 관조하고, 설명하고, 체계를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질문을 던졌지만, 그 이후의 철학은 점점 삶에서 멀어져 강단 위로 올라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를 나누고 플라톤이 이데아를 세우면서, 사유는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되었다.

동양의 사상가들은 달랐다.

공자는 열네 나라를 유랑했다. 자기 뜻을 펼칠 군주를 찾아 수레를 몰고, 거절당하고, 다시 떠났다. 그 14년의 방랑이 곧 그의 사상이었다. 노자는 어느 날 함곡관을 넘어 사라졌다. 그 길이 도덕경이 되었다. 이들에게 사상과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 사유가 먼저 있고 삶이 따라온 것이 아니라, 삶이 곧 사유였다.

이 땅의 사상가들은 더 극단적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월 15일, 대구 경상감영 안 관덕정 뜰에서 참수되었다.

죄목은 좌도난정(左道亂正).
바른 도를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41세였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제자 해월 최시형이 탈출을 권하러 찾아왔을 때 그는 곰방대 하나를 건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안에 쪽지가 있었다.

"나는 순순히 하늘의 명을 받을 것이다. 슬퍼하지 말고 너는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

그의 사상은 글이 아니라 그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홍암 나철은 1907년 오기호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했다. 거사는 실패했다. 자수했고,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그해 12월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방향을 바꿨다. 총칼이 아니라 민족의 정신으로 싸우겠다고. 1909년 단군을 교조로 단군교를 창건했고, 이듬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교세는 빠르게 퍼졌고,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교단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은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 6명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사당 앞 언덕에서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문 앞에 써붙였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

음력 8월 16일 새벽,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폐기법(閉氣法)으로 스스로 숨을 멈춘 것이었다. 그가 남긴 유서는 짧았다.

"한배검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검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노라."

대종교에서는 이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지 않고 '조천(朝天)'이라 했다. 하늘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그가 운명한 음력 8월 15일은 오늘날까지 대종교의 4대 경절 가운데 하나인 가경절(嘉慶節)로 기려진다.

신영복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전향서에 서명하고 20년 20일을 복역한 뒤 1988년 가석방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가족에게 엽서를 썼다. 그 편지들이 나중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묶였다.

그의 사상의 한가운데에는 '관계론'이 있다. 사람은 본디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기가 된다는 것. 그 깨달음은 책상에서 도출된 명제가 아니라, 좁은 감방에서 같은 방 사람들의 발 냄새를 견디며 천천히 다져진 결론이었다.

무위당 장일순은 원주에서 평생 골목을 걸었다. 한살림운동을 시작하고, 협동조합을 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 곁에 앉아 있었다. 강의실이 아니라 시장 골목이 그의 자리였다. 그가 남긴 말 중에 이것이 있다.

"나락 한 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머리칼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은 강의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씨앗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가 나온 말이다.

다석 유영모는 51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으며 40년을 살았다.

그에게 사상과 몸은 하나였다. 서양 언어가 아니라 우리말의 결로 사유를 깎아낸 사람이다. 하느님을 '하나'로, 존재를 '있음'으로 풀었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철학자대회에서 그의 제자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었는데, 국내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함석헌은 씨알이라는 말을 썼다. 스승 유영모가 '대학(大學)'의 '민(民)' 자를 우리말 '씨알'로 옮긴 데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그에게 씨알은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이자 생명의 뿌리였다. 책상이 아니라 거리에서, 잡지가 아니라 광장에서 그 말이 다듬어졌다.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상이 삶 바깥에 없었다는 것.
교단 위에서 강의한 사람이 없다.
감옥에 있거나, 길 위에 있거나, 골목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죽음의 방식조차 사상이었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번역어가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사상이 교실로 들어갔다.
동학은 '19세기 민중 사상' 챕터가 되었다.
장일순은 '생태운동의 선구자'로 분류되었다.
함석헌은 '저항적 기독교 사상가'로 정리되었다.

삶이 텍스트가 되었고, 텍스트가 시험 문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다.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지혜를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혜는 배우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최제우가 증명했고, 나철이 증명했고, 장일순이 증명했다.

지혜는 사는 것이다.
연대하는 것이다.
나락 한 알을 손에 쥐고 그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에게 원래 철학은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름이 없어서 오히려 더 깊었던, 그 무언가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