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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장 생각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살아있다. - 대종교, 잊혀진 독립운동의 심장

작성자청년회장|작성시간26.06.23|조회수28 목록 댓글 0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1916년 음력 8월 4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한 남자가 먼저 제자들을 내보내고 홀로 방에 앉아 숨을 거뒀다. 스스로 숨을 멎게 한 것이다. 이름은 나철, 호는 홍암(弘巖). 대종교를 중광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까비 뛰노니 한울·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 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나라 땅은 유리 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귀신이 날뛰고 뱀이 먹고 돼지가 횡행한다는 말.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죽음으로 탄압에 항거했고, 죽음으로 독립운동에 불을 질렀다. 그 불씨는 결국 꺼지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대종교는 오랫동안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물론 이름은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대종교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서 차지한 비중은 그 짤막한 언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의 주력이 대종교인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내각의 핵심 인물들이 대종교인이었으며, 한글을 지키고 민족사관을 세운 학자들의 정신적 뿌리도 대종교였다.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김두봉이, 이극로가, 최현배가, 안재홍이 그랬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 신도였다는 기록도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대종교 연구가 오랫동안 독립운동이라는 행동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탓이 크다. 그 정신적 배경에 대한 체계적 접근이 거의 없었다. 행동의 이유를 따지지 않고 행동의 결과만 봤다. 그러다 보니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수단으로만 태동한 것처럼 오해되고, 조국광복과 함께 역할이 끝났다는 시각까지 생겨났다.

그것은 나무를 보고 뿌리를 모르는 것과 같다.

1909년 2월 5일(음력 기유년(己酉年) 1월 15일).

이 날짜가 중요하다. 홍암 나철이 단군교를 중광(重光)한 날이다. '중광'은 '새로 만들었다'가 아니라 '다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의 부활, 더 정확하게는 몽골 침입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됐던 신교(神敎)의 맥을 잇는 것을 선언했다. 나철은 스스로를 새로운 신앙의 창시자가 아닌, 끊어진 도맥을 다시 잇는 중광자(重光者)로 자처했다.

동학의 최제우가 천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도를 전수받은 인물로 등장하고, 증산교의 강일순이 스스로 옥황상제라 자처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겸손함이, 그 역사적 당위성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대종교의 등장은 단순한 종교 창립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냉철한 자기 진단이었다. 중광의 헌장이라 할 수 있는 〈단군교포명서〉는 왜 나라가 망했는지를 물었다.

답은 명확했다. 조상의 가르침을 잊었고, 역사를 잊었고, 나라의 치욕을 잊었고, 언어를 천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 방법도 분명했다. 국교(國敎) · 국어(國語) · 국사(國史), 이 세 가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무너진 민족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 대종교의 핵심 진단이었다.

홍암 나철이 내세운 명제는 하나였다.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 "

이 짧은 문장이 이후 30여 년 항일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대종교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문화저항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 우리가 매일 쓰는 '한글'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주시경이고, 주시경은 대종교인이었다.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구한말까지도 우리 글은 '언문'(상놈의 글), '암클'(집안 아녀자들이나 쓰는 글)로 불렸다.

지배계층 사대부들에게 한문은 권력이자 신분의 증표였다. 우리 글을 높이 세운다는 것은 그 구조 자체를 뒤집는 혁명이었다.

주시경은 바로 그 혁명을 택했다. 그는 배재학당 졸업 당시 받은 예수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했다. 무력 침략보다 정신 침략이 더 무섭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수교인으로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 침략을 받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오로지 한글에 헌신했다.

주시경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김두봉이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스승이 문법을 연구하는 동안 사전 만드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스승 사후 <조선말본>을 저술해 당시까지 발표된 문법학설 중 가장 깊고 넓은 연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16년 홍암 나철의 구월산 봉심에 수석 시자로 동행했다. 당시 김두봉의 교질(敎秩)은 '상교(尙敎)'. 대종교에 봉교한 지 최소 5년 이상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지위였다.

이극로의 경우는 더 드라마틱하다. 나중에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그가 한글 연구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1912년 만주 회인현에서 만난 대종교 인물들 때문이었다.

이극로는 대종교를 통해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국어연구의 방향을 잡았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이끌며 사전 편찬, 맞춤법 제정, 외래어 표기, 표준어 사정 등 굵직한 국어 현안을 이끌었다. 그가 삶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것은 단애 윤세복이었다.

여기서 잠깐. 1942년 10월,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서찰에 '단군성가' 가사가 동봉됐다.

일경(日警)이 이것을 발견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촉발됐다. 같은 해 11월 19일, 국내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함남 홍원감옥에 수감되던 그 시각, 만주에서는 윤세복 이하 21명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동시 검색됐다.

임오교변이다.

이 두 사건이 같은 날 같은 뿌리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종교와 조선어학회는 사실상 같은 저항의 두 얼굴이었다.

최현배도, 안재홍도, 이병기도 마찬가지였다. 최현배는 대종교의 신앙이 삼신일체 하느님을 믿는 종교임을 밝히며,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홍익인간의 정신이 조선조에 구현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나라사랑〉 노래말에는 "한배님 나라 세워 끼쳐주시니 / 배달의 겨레 살림 반석이 굳다"는 구절이 있다.

이병기는 1920년 대종교에 입교하며, 대종교를 새삼스레 받아들이는 것이 형식적으로는 번거로운 일이라고 했다. 이미 오랜 세월 우리 민족 삶 속에 흘러온 것이기 때문에. 그는 대종교를 국교의 가치로 인식했다.

일제가 마지막까지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 왜 만주의 대종교와 국내의 조선어학회였는지, 이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역사 저항의 전선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2세 교주 김교헌은 1910년 입교하자마자 청소년들을 모아 민족사 교육을 실시했다. <신단민사>, <신단실기>, <배달족역사>를 저술해 대종교 사관을 정립했다.

그의 역사서는 독립군 교육의 교재로 쓰였고 상해임시정부 학생들에게 배포됐다. 김두봉은 그를 추모하며 "우리나라에서 역사 공부와 발견에서 제일"이라 했고, 중국 사마천의 공적보다 크다는 극찬을 남겼다.

신채호도, 박은식도 대종교를 경험하기 전과 후가 달랐다. 신채호는 대종교 이전에 유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한국 고대 선교를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중국 종교의 아류라고 비판했던 그가, 대종교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독자적인 민족사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1910년 3월 〈동국고대선교고〉가 그 전환점이었다.

박은식은 1910년 만주 망명 이후 대종교를 경험하면서 환골탈태했다. 이전까지는 "공자의 도 외에는 없다"는 유교 애국론에 갇혀 있었다. 대종교 이후 그의 역사 정신의 핵심인 국혼(國魂) 개념이 등장했다. 그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전개한 국혼사관 · 대륙사관이 모두가 대종교 경험 이후의 것이다.

정인보의 '조선얼'도 마찬가지다. 학문이 얼이 아니면 헛것이고, 역사정신도 얼이 아니면 박힐 것이 없다고 한 그의 핵심 사상이 바로 ‘조선얼’이다. 그는 홍암의 유훈을 받들어 국내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한 인물이기도 했다. 해방 후 그가 쓴 〈순국선열추념문〉에서 "국교로 민지를 뭉치려던 이"라는 구절을 기록했을 때, 그 '국교'는 물론 대종교였다.

무장투쟁의 측면에서 대종교의 기여는 수치로 말할 수 있다. 10만여 명의 희생. 이것이 만주 무장항일운동 과정에서 대종교가 치른 값이다.

1911년 서일이 북간도에서 조직한 중광단이 시작이었다. 중광단은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대한군정부에서 대한군정서로(북로군정서)로 발전했다.

1920년 10월, 그 북로군정서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다.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연성대장 이범석.

이 전투의 지휘구조 자체가 대종교였다. 당시 21세의 이범석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만주 교포 대다수가 대종교도였고, 독립군들은 대종교 신앙에 뭉쳐 파벌이나 사리잡념 없이 광명정대했다고. 그리고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제천보본을 올렸다고 말이다.

서일이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대종교 무장독립운동의 정수였다. 그는 대종교를 신봉한 지 5년도 안 되어 최고 교질인 사교(司敎)가 됐다.

독립군 기지 안에 대종교 동도본사를 설치해 군교일치의 의지를 보여줬고, 진중에서도 수도실을 따로 마련해 원도와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투 중에도 대종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단주를 목에 걸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이라 지었는데, 이는 홍암의 당호 '일지당(一之堂)'의 뜻을 계승해 완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1922년 자유시참변의 혼란 속에서 서일은 시운을 통탄하며 홍암 유언의 한 구절을 읊조리다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저서 <회삼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요." 죽음의 철학을 관철한 사람이었다.

정치·외교 항쟁에서도 대종교는 핵심이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실질적 산파는 신규식이었다. 그는 홍암 나철과 인연이 돼 가장 먼저 대종교에 입교하고 평생 독신한 인물이다.

1910년 스스로 해외 시교를 자임해 상해로 떠났고, 중국혁명지사들과 연대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그가 나라 망한 원인으로 첫 번째로 지목한 것이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단군 종교와 민족사를 망각한 데 대한 신랄한 자성이었다. 1912년 그 자신이 대종교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 이 모두가 후일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으로 자리잡고 김구를 중심한 한독당의 지도이념이 된 삼균주의의 유일한 역사-사상적 근거는 신지비사(神誌秘史)의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이라는 구절이다.

이 신지비사를 근대에 처음 언급한 인물이 홍암 나철이었다.

조소앙이 이 구절에 홍익인간 · 이화세계의 건국이념을 연결시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삼은 것, 우연이 아니다. 그가 상해로 망명한 것 자체가 대종교 서도본사 총책임자 신규식과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더 말해 무엇하랴.

대종교와 일본 신도(神道)가 애초부터 정면충돌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는 조선 통치의 완성을 신도의 국교화에서 찾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마찰이 대종교와의 충돌이었다.

홍암 나철은 일본 신도를 조선 고유의 신교(神敎)의 아류로 단정했다. 일제가 대종교를 단순히 견제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1915년 종교통제안으로 대종교를 불법화했고, 1926년에는 만주 길림성 독군 장작상의 이름으로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대종교 교세의 확장은 독립운동 세력의 확산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2년, 마지막 결정타가 임오교변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이 같은 날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은, 일제가 이 둘을 같은 뿌리의 저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3세 교주 윤세복은 1942년 검거 당시 일경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내가 관동군의 양해를 얻을 때부터 너희에게 속아서 근 10년을 지냈거니와, 오늘부터는 너희들이 나에게 속는 것이다."

무기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 오히려 <삼법회통>이라는 수행서를 완성했다. 돌아보면, 대종교가 항일운동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종교적 애국심이 아니었다. 하나의 총체적 문명 기획이었다.

문화 전선에서는 언어와 역사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고 정치·외교 전선에서는 임시정부의 이념과 조직을 만들었다.

무력 전선에서는 군교일치(軍敎一致), 즉 신앙과 전투를 하나로 묶어 철학이 있는 싸움을 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전선의 저변에는 '교학일여(敎學一如)', 즉 종교와 교육을 하나로 보는 정신이 흘렀다.

대종교의 교당은 학교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기지였다. 이런 삼위일체 구조는 세계 독립운동사에서도 쉽게 찾기 어렵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왜 대종교는 지금 이토록 낯설어졌을까.
답은 역설적이게도 해방 이후의 역사에 있다.

대종교는 해방 후 지금의 홍익대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어가려 했다. 백범 김구의 장례식 때 그의 관을 맨 청년들이 모두 홍익대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하고 김구가 사라지면서, 대종교도 함께 주변화됐다.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역전의 결과였다.

지금, 우리는 매일 한글을 쓰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키고,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것들이 모두 대종교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은 1910년 홍암 나철이 의식규례를 제정하면서 확정됐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이 처음 썼다.

'홍익인간'은 대종교의 교의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고 교육법 제2조에 명시된 교육 기본이념이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대종교의 정신은 우리 생활 깊숙이 남아있는 것이다.

홍암 나철이 순명조천하면서 남긴 유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간사코 악덕한 자 용서없이 다스리며 / 정진코 착한 사람 보전하여 다 왕성케 / 살벌풍진 쓸어내고 도덕세계 새로 열어보세."

이것이 그가 꿈꾼 세계였다. 독립을 넘어, 문화민족국가의 찬연한 복원. 홍익인간의 이상이 실현되는 땅 말이다.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존재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30여 년의 모진 세월을 버텼다.
그리고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정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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