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라모짱의 세계여행~

[스크랩] 동유럽 연수 기행문(셋째 날 전반)

작성자라모짱|작성시간13.12.27|조회수101 목록 댓글 0

(2010. 7. 1. 폴란드 오슈비엥침, 크라코프)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식으로 밥을 먹고 목적지인 폴란드 오슈비엥침을 향하여 8시 30분에 브르노를 출발하였다. 브르노는 체코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옛날 모라비아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던 곳으로 슈필베르크 성과 교회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구경 한번 못하고 그냥 잠만 자고 떠난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빡빡한 여행 일정상 브르노 시내까지 둘러 볼만한 여력이 없었나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오슈비엥침의 독일식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당연히 독일 땅에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폴란드에 있고 그곳의 본래 지명은 오슈비엥침이었다. 나도 이날 처음 알았다. 나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에 가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진 1) 보비 센트럼 호텔 앞에서

 

 사진 2) 호텔앞 조형물을 배경으로 손일현 사무관과 함께

 

사진 3) 호텔 아침 식사

 

사진 4) 호텔 아침 식사

 

 오슈비엥침은 브르노에서 동쪽 방향으로 약 280km 떨어진 인구 5만의 작은 공업도시로 버스로 4시간정도가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반나절을 버스를 타고 가면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버스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되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줄곧 창을 통하여 자연 풍광을 감상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하고 다른 특성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산이 없다는 점이다. 첫날 프라하에서부터 브르노를 거쳐 이날 폴란드의 크라코프까지 500km를 훨씬 넘게 달리는 동안에 주변에 산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끔 낮은 언덕이 보였을 뿐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흔히 보는 터널 또한 하나도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도로공사 하기는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평야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준 평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적당한 숲과 완만한 경사의 들판이 잘 어우러진 약간의 잔주름은 오히려 거침없는 평야보다도 더 낭만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이날 버스를 타고가면서 창을 통해 바라본 농촌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마을은 모두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황색 톤의 A자형 지붕은 푸른 들판과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때로는 검게 변한 지붕의 색깔은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주어 더욱 운치 있게 느껴졌고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의 모습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사진 5) 차창으로 바라본 풍경(1)

 

사진 6)  차창으로 바라본 풍경(2)

 

사진 7) 차창으로 바라본 풍경(3) 

 

 눈에 보이는 집은 모두 전원주택이고 차창에 비친 순간순간의 장면은 아름다운 풍경화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낭만을 느끼며 감상이 젖는 중에 버스는 휴게소에 들렸다. 휴게소라고 해봐야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주유소하나에 슈퍼마켓이 붙어있는 정도였다. 여기는 공중화장실도 따로 돈을 내고 써야한다니 한국처럼 인심 좋은 데는 없는 것 같다. 주유소를 찾는 차들은 모두 셀프로 주유하였다.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차량이 들어오면 재빨리 달려가 유리를 닦아주고 팁을 받는 귀여운 아가씨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진 8) 휴게소

 

 용변을 보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가이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한 후에 그와 관련된 영화 ‘피아니스트’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잠시 졸기도 하고 바깥 경치 구경하느라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줄거리는 이해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당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 겪은 경험담으로서 나치세력에 의해 유대인들이 강제 이주되어 고통을 당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자신은 독일군 장교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남는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9) 버스안에서 영화를 보는 중 

 

사진 10) 영화속의 한 장면 

 

죽음의 위기에서 독일군 장교의 도움으로 살아난 스필만이 전쟁이 끝난 후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를 구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이 아이러니하고 묘한 여운이 남았다. 영화보다도 나는 체코에서 폴란드로 들어갈 때 국경을 어떻게 통과하는지가 더 궁금하였다. 나는 국경에 검문소와 같은 것이 있어 양쪽나라 군인들이 서로 총을 들고 경비를 하고 있는 줄로 알고 바깥을 유심히 관찰하며 국경을 통과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가도 소식이 없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벌써 국경을 지나왔다고 하였다. 내게는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상 국경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와 민족이 서로 다른 나라사이에서도 사실상 국경이 없이 서로 마음대로 지나다니는 데 한 핏줄의 동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철조망을 굳게 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어느덧 버스는 오슈비엥침에 도착하였고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시내에서 현지 가이드 김보성씨가 버스에 올라 점심 식사 장소인 MEED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국수를 짧게 토막 낸 것 같은 스프가 인상적이었고 먹을 만 하였다.

 

사진 11) 점심먹은 식당

 

사진 12) 그날 먹은 점심 (스프)

 

사진 13) 점심 주 메뉴(돈가스는 아닌 것 같은데...)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드디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수용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940년 나치스친위대(SS)가 이 지역에 세운 첫 번째 수용소인데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된 곳이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인근에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와 제3수용소가 세워졌다. 이들 수용소에서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거나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유대인을 비롯한 28민족으로 그 수가 무려 15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의 빨간 벽돌 건물로 되어있는데 폴란드 정부는 현재 이곳을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을 전시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류의 죄가 남긴 유산인 이곳을 유네스코에서는 197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우리는 먼저 입장권과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안내소에서 가이드의 해설 청취용 헤드셋과 FM수신기를 지급받아 착용한 다음 가이드와 안내원을 따라 수용소 정문 앞으로 갔다.

 

사진 14)  수용소 안내센터 

 

 정문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뜻의 "ARBEIT MACHAT FREI." 라는 문자가 걸려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ARBEIT의 B'자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위쪽이 아래쪽보다 볼록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만든 수용소 노동자들이 나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 15) 수용소 정문(머리 위에 문자가 있는데 사진으로 잘 안보인다)

 

 정문 앞에서 가이드로부터 긴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의 좌우로 붉은 벽돌의 2층 건물들이 아파트 단지 마냥 열을 지어 서있고 한쪽으로는 이중으로 된 전기 철조망과 감시초소가 보였다. 당시 수용자들이 고통에 못 이겨 도망가다가 전기 철조망에 감전되거나 경비병들의 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장면이 상상되어 몸서리가 처졌다.

 

사진 16) 이중 전기철조망과 감시초소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바로 오른 쪽으로 붉은 벽돌이 아닌 시멘트 단층건물이 보이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여 안내판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그 건물 앞에서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하는 모습의 사진이 있었다. 이는 수용자들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할 때에 행진곡을 연주하고, 그들이 작업하러 정문을 출입할 때에 발을 맞추고 구령을 쉽게 하기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어있었다. 강제노동과 음악,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사진 17) 오케스트라 연주장소(왼쪽 건물,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보면 오른쪽임)

 

사진 18) 오케스트라 연주 설명 안내판

 

사진 18-2)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추어 정문을 통하여 일하러 나가는 모습의 그림

 

  우리는 몇 개동의 건물을 지나 전시관 4호동으로 들어갔다. 전시관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못하게 했지만 나는 참혹한 역사의 증거물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의 한이 서린 때문인지 카메라가 흔들려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4호동에 들어서서 먼저 희생자 위령비를 보았다. 그 위엔 유골가루가 든 모래시계 모양의 투명용기가 있고 그 앞에 꽃이 놓여 있었다. 위령비 앞에서 마음이 더욱 엄숙해졌다.

 

사진 19) 전시관 4호동으로 들어가는 중

 

사진 20) 전시관 4호동 입구

 

사진 21) 전시관내 위령탑

 

 그리고 다른 코너에는 학살 사진이나 수용자들의 참혹한 모습들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고, 거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아우슈비츠까지 끌려오는 내역과 수감생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에 만든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도를 보니 이곳이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철도를 비롯한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수용자의 이송 등 관리하기가 아주 용이했다는 점이 많이 작용한 것 같았다.

 

사진 22) 아우슈비츠 까지 끌려오는 내역과 수감생황의 모습을 전시

 

사진 23) 수용소 생활중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인터넷 자료)

 

  사진 24) 아우슈비츠의 위치도(유럽 전지역의 중심부)

 

  2층으로 올라가니 1Kg으로 250명 이상을 살상할 수 있다는 무서운 독가스를 만드는 알약(Cyklon B)과 그것을 담았던 깡통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독한 가스냄새가 아직도 풍기는 것 같아 코를 막았다. 이어서 코너를 돌아서는데 으아! 하는 비명과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여성 희생자들의 노란 머리털 뭉치를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칼이 쭈빗 섰다. 신체의 일부인 머리털에서 희생자들의 체취가 느껴지고 당시의 처참했던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치스는 이 머리털로 가발을 만들고 카펫을 짜고 침낭에 넣는 등 다양한 군수물자로 활용했다고 한다.

 

사진  25) 독가스 알약 (치클론 B)

 

사진 26) 독가스 치클론 B를 담았던 깡통들 

 

사진 27) 여성 희생자들의 머리털 뭉치

 

사진 28) 머리털로 짠 카펫과 재료로 쓰다 남아있는 머리털 

 

 5호동으로 가니 나치스가 저지른 범죄의 증거물들이 전시되어있었다. 희생자들의 개인용품인 안경테, 숄, 신발, 구두, 벗겨낸 의족과 의수, 목발 등이 역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놀랐다. 장애인을 비롯하여 노동능력이 없는 어린이, 여자, 노인 등이 먼저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들이 오히려 사회적 폐기물로 취급되어 우선적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그 밖에도 당시의 생활용품인 법랑그릇, 요리집기, 주방도구, 타자기, 이름과 주소가 적힌 트렁크 가죽가방, 칫솔, 면도기, 구둣솔, 다양한 구두약 등이 종류별로 전시되어있었다. 유품들의 질적 수준으로 보아 당시의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 29) 5호동 입구

 

사진 30) 희생자들의 안경테

 

사진 30-2)  희생자들이 걸쳤던 숄

 

사진 31) 장애인 희생자들의 의족과 의수, 목발

 

사진 32) 희생자들의 신발, 구두(인터넷 자료)

 

사진 33) 중요물품을 넣었던 가죽가방(돌려 준다는 말에 겉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놓았다.)(인터넷 자료)

 

사진 34) 여러종류의 구두약 

  

 이어서 6호동과 7호동으로 가니 그곳엔 수용자들의 수의,  실험용으로 희생된 어린이들의 사진과 당시 입었던 옷들이 있었고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쌍둥이 어린이들의 사진도 있었다. 이를 보니 우리나라 독립군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일본군 731부대와 마루타가 떠오르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다른 방엔 화장실과 세면대, 침상의 실물이 있었고 독가스로 어떻게 학살했는지를 설명하는 모형도 있었다. 그리고 죄수들의 생활상의 그림이나 실제 얼굴 모습들이 있는데 이곳에는 40만 명의 기록이 있고 당시의 번호 문신은 아우슈비츠만이 하였다고 한다. 정치범, 소련군, 동성애자 등의 성분 표시가 되어 있었으며 나치 친위대 앞잡이인 카포(△표시)도 보였다. 그리고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직한 장면의 사진 등이 여러 개 있었다.

 

사진 35) 7호동 입구(6호동과 7호동의 전시내용은 기억에서 구분이 안됨)

 

사진 36) 수용자들의 수의

 

사진 37) 희생된 어린이들의 사진과 당시 입었던 옷

 

사진 38) 생체실험 대상이 된 쌍둥이들의 사진(실험군과 통제군으로 나누어 실험)

 

사진 39) 수용소 화장실 변기(이것은 그래도 양호한 편임)

 

사진 40) 수용소 세면대(이것도 양호한 편임)

 

사진 41) 수용자들의 침상

 

사진 42) 수용자들의 침구류

 

사진 43) 가축처럼 바닥에 짚을 깐 수용자들의 침상

 

사진 44) 가축 사육장 같은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의 침상

 

사진 45) 가장 많은 학살이 이루어진 제2수용소의 공중화장실 

 

사진 46) 1층 복도 양 벽면에 걸려있는 희생자들의 사진

 

사진 47) 희생자들의 사진(인터넷 자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