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dora Duncan (1878년-1927년)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1878년 5월 27일 ~ 1927년 9월 14일)
현대 무용(모던 댄스)의 어머니(개척자)로 여겨져서 '던커니즘(Duncanism)'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던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현대 무용의 새로운 무용정신은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했다.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던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더 자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그 결과 던컨이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는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추었다.
그것이 기교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던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공명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라고 불려, 육체문화운동이 활발했는데, 던컨은 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던컨이 그러한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그녀는 그 뒤 프랑스, 미국, 소련 등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던컨이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 곳에서 디아길레프나 포킨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던컨은 현대 무용의 융성을 촉구하고, 특히 독일의 현대 무용에 힘찬 목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무용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준 영향은 큰 것이었다.
이와 같이 던컨에 의한 '자유댄스'는 현대 무용의 선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은 첫째로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로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1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 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사모(思慕)로서 나타났다.
그녀는 또한 기성의 음악곡을, 악보를 분석하거나 음표를 더듬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정서깊게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쇼팽이나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조차 자기 멋대로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성적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으며, 기법(技法) 그 자체,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여,
그 결과로 무용예술을 한정된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길을 개척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어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으며
1927년에 프랑스의 니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던컨은 정열을 다하여 새로운 무용 미학의 실천에 힘썼다.
경력 :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감
1904년 독일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 설립
1905년 러시아 방문공연
특이사항 : 모던댄스의 선구자
작품 : 작품 '슬라브행진곡', '마르세이즈', '아베마리아'
파산한 은행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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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 정녕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덩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덩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던컨 씨는 간단히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는 데 그치고 말 삶을 살지는 않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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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천재적 남자들과의 뜨거운 사랑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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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댄서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계는 혜성같이 등장한 한 여인으로 인해 술렁거렸다. 신대륙 미국에서 건너온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은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유럽 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영국과 독일,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춤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인식은 180도전환되었으며 토슈즈의 발레를 떠나 자유롭게 인간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현대 무용이 등장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슬하에서자란 그녀는 한번도 제대로 된 무용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생각한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10세가 되기 전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마음속의 생각과 느낌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가르쳤다. 15세가 되자 시카고로 간 이사도라 던컨은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간 이사도라 던컨은 2년 간을 더 삼류 무용수로 보낸다. 아무도 그녀의 춤을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마침내 20세기를 1년앞둔 1899년, 이사도라는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다.
편협한 청교도 사상에 사로잡혀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과는 달리 세련되고 폭이 넓은 유럽의 예술계는 그녀의 춤을 단번에 받아 들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춤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찬사를 보냈다. 열정적인 무용가였던 만큼 이사도라 던컨의 사랑도 열정적이었다.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추며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의 행복을 느끼던 그녀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보모와 함께 나들이 나갔던 아이들을 차 사고로 인해 모두 잃은 것이다. 1차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사도라 던컨은 파리에서새빨간 튜닉을 입고 ‘마르세예즈’를 무대에 올린다. 그녀는 이 공연 마지막에 “시민이여! 무기를”이라고 외치며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프랑스인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인생에 닥친 고통을 춤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던 이사도라 덩컨은 1927년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최근에 사귄 젊은 벗이 그녀에게 스포츠 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그녀의 춤은 그 춤이 너무나 자유로워 후대까지 춤사위 하나 하나가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던컨은 그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고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