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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용의 눈물,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숲속(6월28일산책)

작성자당구사랑|작성시간26.06.21|조회수20 목록 댓글 0


용의 눈물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조선왕릉 1부, 용의 눈물, 동구릉
종목 사적
명칭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조선
지정(등록)일 1970년 5월 26일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면적 1,969,675m2

조선왕릉 1부, 용의 눈물, 동구릉

1926년 4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가 승하했다. 이로써 단일왕조로서는 전세계 유례가 없었던, 500년 조선왕조사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는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조선 왕릉-조선 왕릉은 500년 조선이 21세기 우리에게 전하는 ‘생생한 역사’이자 ‘이야기’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 이곳에 조선을 건국한 개국시조,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다.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의미를 담은 건원릉. 인위적인 권위를 표출하는 대신 완만한 능선을 그대로 두어 자연미를 살리고 웅장한 봉분은 병풍석으로 감쌌다. 병풍석에는 열두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12지신상을 새기고 밖으로는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천하의 명당’이라는 극찬을 들었다는 길지 중의 길지. 그러나 태조가 이곳에 묻힌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잔디 대신, 태조의 봉분을 가득 덮은 것은 무성한 억새다. 태조는 고향인 함흥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교를 남겼지만 태종 이방원은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와 봉분을 덮는 것으로 아버지의 유교를 대신했다. 한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개국시조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태조가 진정으로 묻히고 싶었던 곳은 아들 이방원이 그토록 미워하던 계비, 신덕왕후 옆이었다. 태종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 그렇다면 차라리 고향인 함흥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 이방원은 도성 안에 있던 신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이곳, 정릉으로 옮겼다. 이 때 파헤쳐진 병풍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해 뭇 백성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 그나마 위아래를 뒤집어 놓기도 했으니 이를 바라보는 태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 나라를 개국한 시조였으나 불행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태조는 한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으리라. 이후 이 일대 약 58만평 광대한 숲에는 여덟 개의 왕릉이 더 들어서 모두 아홉 개가 되었다. 건원릉을 비롯해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그리고 장렬왕후와 단의왕후의 능인 휘릉과 혜릉 등 여섯 개의 능이 들어설때까지, 이곳은 동오릉으로 불렸다. 짝수를 사용하지 않는 관례 때문이다. 이후 영조와 인목왕후의 능인 원릉이 들어서면서 동칠릉, 그리고 그 후 경릉과 수릉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 조선왕조 스물 일곱 왕 중 가장 장수하였으며, 가장 오랜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영조.영조 역시 홍릉에 잠들어 있는 원비 정성왕후 옆에 일찌감치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 묻어달라는 유지를 남겼다. 하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 정조는 그 유지를 외면하고 할아버지를 이곳 동구릉 경내에 모신다,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열네살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던 정순왕후다. 때로는 왕릉 자체에 큰 수모가 가해지기도 했다. 29년이라는 세월을 왕세자로 보냈던 문종의 재위 기간은 단 2년 4개월. 하지만 어린 아들을 두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댓가는 너무 컸다.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어린 단종은 열일곱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왕비인 현덕왕후는 단종의 생모라는 이유로 파헤쳐져 시흥 앞바다에 버려졌다.현덕왕후가 복위되어 다시 문종 곁으로 돌아온 것은 56년 후. 문종은 어떠한 말로 위로와 미안한 마음을 전했을까? 동구릉 가장 갚숙한 곳에 자리한 목릉을 들어서면 어지러운 신도가 눈에 들어온다. 홍살문에서 정자각, 능침을 잇는 신도는 일직선상에 놓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의 신도는 구불구불 힘겹다. 임진왜란 등 큰 전란을 치러내야 했던 선조의 어지러운 마음을 보는 듯 하다.왕릉은 단지 죽은 왕을 모신 집이 아니라 역사다. 잠들었으나 잠들지 못하는 역사. 그것이 조선 왕릉의 운명이다. 왕릉에 비가 내린다. 소년왕 단종이 아버지 문종과자신을 낳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를 만나러 가는 길. 열세살 어린 단종에게용포는 무겁디 무거운 짐이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측근들이 모두 희생되고 스스로도 바람 앞에 촛불이 되어버린, 이름뿐인 어린 왕. 유일한 의지처는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와 아버지 문종 뿐이었다. 산 자가 죽은 자와 만날 수 있는 곳. 어린 단종에게이곳은 유일한 위안이자 서러움이었다.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건릉.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의 능이 있는 곳이다.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대부분 왕릉의 능침, 즉 봉분이 정자각과 일직선을 이루는데 반해, 융릉의 정자각은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나 있다. 왜일까? 융릉은 세자묘에 준해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삼면으로 담장을 두르고, 능침은 병풍석으로 감싸는 등 왕릉 못지 않게 조영했다.비명에 죽어간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었다. 정자각과 능침의 각도를 변경한 것 역시 명당의 기운을 잘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해석해 본다. 뒤주 속에 갇힌 아버지가 죽어서나마 답답하지 않도록 시야를 틔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렇듯 조선 왕릉은 단지 죽은 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산자와 죽은자가 만나는 공간이다. 왕릉은 크게 세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속계와 영계를
가르는 금천교를 지나,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까지가 진입 공간, 즉 산 자들의 영역이라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산 자와 죽은자가 함께 하는 제향 공간, 그리고 봉분 및 각종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능침 공간으로 구분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참도라 한다.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다. 왼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도이다. 참도는 정자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정자각을 오르는 두 개의 계단으로 이어진다. 왼쪽이 신계, 오른쪽이 어계이다. 왕은 선왕의 혼령을 모시고 계단을 올라 이곳 정자각에서 제향을 올린다. 동쪽 계단이 신계가 어계 두 종류인데 반해 서쪽으로 난 계단은 하나 뿐이다. 제례가 끝난 후, 선왕의 혼령은 다시 내려오지 않고 정자각 뒤쪽 문을 통해 능침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능침 공간은왕이나 제관, 그리고 능을 지키는 참봉도 함부로 오를수 없는신성한 성역이다.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3면으로는 곡장, 즉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봉분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둘렀다,그 앞에는 혼령이 노닌다는 혼유석을 두었다.능침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 위엄을 더했다. 이외에 능침 아래로는 문인석, 그 아래로는 무인석을 배치하였으며 나쁜 것을 물리치고 능을 수호하는 기능의 석호, 석양 등 석수들을 배치하였다.단지 죽은 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공간.조선 왕릉의 주인은 죽어서도 통치를 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왕이 언제든 찾아가 위로받고 그리워할 수 있는 공존의 대상이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이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 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살아생전 최고의 권력자였던 조선 왕들이 최고의 길지에 묻혀있는 동구릉. 왜 태조의 건원릉에는 다른 왕릉의 봉분과 다르게 함흥의 억새가 자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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