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선택
필자는 평소 화를 잘 내지 않은 편이다. 어지간하면 빙그레 웃고 지나가거나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좋아하는 표현은 말없이 씨익 웃는 모습이 좋아 ‘빙그레’를 많이 쓴다. 그런 내가 만만해서 인가? 사람들은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선이 넘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 대개의 경우 참는다. 아니 참아 준다. 이 또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기 보다는 타고난 천성이 모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생각한다.” 라는 명언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계속해서 배려하고 잘해주면 나중에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호의가 중단되면 전에는 이러했는데 왜 지금은 안 해 주느냐 식으로 따지고 덤빈다. 필자가 자주 겪는 좋지 않은 경험이다. 그래서 한 가지 원칙을 새웠다. 이른바 ‘3번까지만’ 법칙이다. 참고 참고 또 참아 3번까지는 용서한다는 전략이다.
그런 내가 얼마 전 불같이 화를 내었다. 프로야구 엘지와 키움의 경기를 보았다. 키움이 9회말 2사까지 잡았다. 한명만 잡으면 된다. 엘지의 마지막 타자 이재원이 진공이 높게 떴다. 아주 쉬운 볼이다. 누가 봐도 야구는 끝났다고 키움 팬들은 열광하고 엘지팬들은 서둘러 자리를 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키움의 3명 선수가 서로 공을 잡으려고 하다가 공을 놓쳤다. 분위기는 그 자리에서 엘지로 넘어갔다. 그다음이 이상하다. 아까부터 아시아쿼터로 나온 마무리 투수인 일본인 유토가 계속해서 20여구를 직구만 던진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 해설자도 갸우뚱한다. 변화구를 섞지 않고 계속해서 던지는 직구는 당연히 타자의 눈에 익숙하다. 박해민선수의 방방이가 유토의 직구를 통타한다. 공은 5월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잠실구장 너머 비명소리와 함께 하얗게 사라졌다. 그 이후 우리 집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필자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이번 패인을 찾느라고 온갖 합리적 의심을 동원한다. 먼저 기본기가 약한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난도질한다. 느그가 프로라? 평소 쓰지 않는 투박한 사투리로 욕설에 가까운 폭언을 한다. 혹 승부조작이 아닌가? 프로야구라는 사소한 여가활동의 결과가 한 가정의 평화를 이유 없이 파괴하였다.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과 다양한 형태의 갈등 관계에 직면한다. 심지어는 굴욕과 수모감에 분기탱천하여 화가 치밀 때가 많다. 다행히 갈등을 지혜롭게 잘 풀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분노한다. 기분 나쁘다고 벌컥 화를 내면 거의 대부분 ‘아! 조금만 참을걸! 하고 후회한다. 순간을 참지 못하고 욱하여 감정조절에 실패하면 살인과 폭력, 이혼, 결별 등 수많은 불행이 찾아온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이상해져서, 미쳐버릴 것 같은 요즘, 우리 마음 한 귀퉁이에는 자신도 모르는 울화가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전보다 이 세상에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예상 밖으로 많다는 것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조그만 불씨에도 ‘쾅’ 하고 폭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울화 덩어리가 도처에 있다. 그것도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위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러셀 크로우가 열연한 영화 ‘언힌지드Unhinged’는 미국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보복 운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월요일 아침,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지각하는 아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다가 직장에서 해고까지 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겪는 여주인공 레이첼은 홧김에 앞차에 짜증스런 경적을 울렸고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앞차 운전자인 러셀 크로우는 분노조절 장애인이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지 못한 그는 이후 클랙슨을 함부로 울린 대가로 여주인공과 그 주위 사람들에게 처참한 보복의 퍼레이드를 펼친다. 정말 경적 한번 울렸다가 인생 최악의 경험을 겪게 되는 영화이다. 미국의 경우 한 해 보복 운전으로 인한 사상자는 1,000여 명 이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보복 운전에 있어 안전한 나라는 아닐 것이다. 도로 위에서 조금만 정체되면 단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욱하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경적 때문에 보복 운전의 큰 곤욕을 치른 레이첼 앞에 또다시 경적을 울릴 상황이 왔는데 여주인공은 간신히 참는다. 옆자리에 앉은 아들이 하는 말이다. “Good choice.”
타면자건唾面自乾은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말로,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침을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리라는 묵직한 울림이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신하 누사덕婁師德은 사람됨이 진중하고 너그러웠으며 도량이 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일을 당해도 겸손한 태도로 오히려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얼굴에 불쾌한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아우가 높은 관직에 임명되어 부임할 때 누사덕은 동생에게 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아우가 말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닦아내겠습니다.” 누사덕이 말했다. “그래서 네가 걱정이 된다. 그 자리에서 침을 닦으면 오히려 상대의 화를 거스르게 된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를 것이다. 그냥 마르게 두어라”라고 하였다. 그는 대범하였다. ‘침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야구 결과가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