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자존심
손봉호
아들은 일찍부터 독립심이 강했다. 남의 신세는 물론 가능하면 제 애비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 했다. 나도 잔정을 보이거나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의 입학식, 졸업식 등에 가지 않았고 군에 입대할 때도 나의 경우처럼 대문까지만 바랬다. 내가 재직한 대학에 다녔으나 등하교에 동행하거나 내 차에 동승한 적이 없고 학교에서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내 강의는 전혀 수강하지 않아 학점문제로 오해받지 않아 편했다.
어렸을 때 내가 “유산남기지않기운동”에 가입한 것을 알았기에 일찌감치 홀로서기로 작정했는지 돈을 많이 요구하지 않았다. 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내가 재직한 대학에 다녔으니 학원비, 등록금 신세를 지지 않았고 박사학위조차 학비가 전무한 벨기에에서 받았으므로 유학비도 받아가지 않았다. 생활비는 그 나라에 파견된 한국 상사 직원 자녀들의 과외수업과 방문 기업인들 통역으로 충당했다. IMF 때 상사직원들이 대거 귀국하는 바람에 수입이 줄어져서 허기진 시간도 보낸 모양인데 알려주지 않아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았다. 결혼 때도 축의금을 받지 않았으며 혼수를 없애고 조그만 예배당에서 4촌 이내 하객만 초청해서 큰돈 들이지 않고 식을 치렀다. 그런 독립심이 자연스럽게 아주 강한 자존심으로 승화한 것 같다.
그러나 자존심이 아무리 강해도 상황이 받혀주지 않으면 유지되기가 어렵다. 아들의 자존심도 그것을 시험할 심각한 시련을 만났다. 대학 진학 때 나는 아들의 철학과 지원을 반대했다. 요즘 세상에 철학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철학을 가르치면서 아들은 전공하지 말라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걱정했던 현실은 그대로 다가왔다. 근 600년의 역사를 가진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철학자를 찾는 직장은 별로 없었다. 가물에 콩 나듯 공고되는 교수 공체에 응모하면서 이 대학, 저 대학에 시간강사로 다리품을 팔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받은 강사료로는 주택 마련이나 아이들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네 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돈보다 나에게 더 걱정되는 것은 그의 그 강한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이었다. 부모님을 닮아서 나도 자존심에는 별로 뒤지지 않는다. 유학 시절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 하여 대학이 주겠다는 장학금을 사양하고 대신 조교로 일해서 공부하고 살았다. 그래서 애비의 신세도 지지 않으려는 아들의 자존심이 대견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무직자로 남았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어쩔 것인가? 그 강한 자존심 다 꺾여버리고 “이놈의 망할 세상!” 하고 냉소적이 되어버리면 아들 하나 잃어버린 거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지방에 있는 한 좋은 사립 대학교에서 철학교수 공체 광고가 나왔다. 그 대학에는 철학교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년 전 신임 철학교수 채용 심사를 나에게 위촉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심사해서 추천한 후보자를 대학은 웬 이윤지 뽑지 않고 미뤘다가 이번에 다시 공체하기로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아들이 응모하게 되었다.
당장 “부탁 한 번 해볼까” 하는 유혹이 생겼다. 교수채용심사를 맡길 정도로 대학은 나를 신임했고 인사에 결정권을 가진 총장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간곡하게 부탁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양심이었다. 평소에 시민운동이니 윤리운동이 하고 다니면서 정직과 공정성을 입버릇처럼 외쳐 놓고는 “정작 제 자식이 관계되니 그런 것 다 헌신짝처럼 버린다? 총장을 잘 아는 애비가 없는 다른 응모자는 얼마나 억울할까!” 생각할수록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아들의 문제니 아들과 의논해야겠기에 “야! 김 총장께 전화 한 번 해볼까?” 했다. “아버지! 절대 안 됩니다.” 아들은 펄쩍 뛰었다. 보따리 장사를 몇 년 했는데도 그의 자존심은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애비의 덕을 보지 않겠다는 독립심도 같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꼭 붙어야 한다는 절박함, 그래도 위선적이 될 수는 없다는 양심, 강하게 지켜온 아들의 자존심이 불안하게 교차했다. 며칠 동안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 걸지 못하고 말았다. 양심과 현실의 저울질에서 아들의 자존심이 양심 쪽에 무게를 실어준 것이다,
서류심사에 통과되어 총장과 면접하고 와서 아들이 알려줬다. 응모자의 신상관계 서류들을 들쳐보던 총장이 나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손봉호 교수 아들이냐?”고 묻더란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놀라면서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나한테 전화도 한 번 안 해!” 하더란 것이다. 그 뒤 김 총장은 다른 모임에서도 그 말을 반복했다.
어쨌든 아들은 합격해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걱정이 생겨났다.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애비의 덕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들이란 것을 총장이 알았기 때문에 봐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이 대학 덕을 보는지, 대학에 이익을 끼치는지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았다. 다행하게도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인기 있는 우수 교수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 대학보다 역사도 더 길고 더 많이 알려진 서울소재 큰 대학의 초빙의사를 사양하는 것을 보니 지금의 교수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유산남기지않기운동”에는 예외조항이 하나 있는데 자식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에는 유산을 남기란 것이다. 그런데 며느리조차 전임교수가 되어 그 조항은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감사한 것은 양심 속이지 않고 나의 체면과 더불어 아들의 자존심이 살아남게 된 것이다.
손봉호
경실연 공동대표. 동덕여대 총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 역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고신대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
저서 『고통 받는 인간』 『나는 누구인가』 『약자중심의 윤리』 『Science and Person』 『윗물은 더러워도』 등
* 계간수필(2021 봄호 통권 103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