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되찾은 흑진주
✒ 유현종(劉賢鍾1940 ~ ) 소설가
나는 평생 중학교 때 읽은 동화 한 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작가 이름은 세렝게티였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내용이 재미있다. 작품 주인공은 연년생인 3형제 얘기이다. 3형제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항상 가진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먹고 온종일 찾으러 다니는 게 일이다.
어린애들이 건망증이 심하다고 어른들한테 늘 꾸중 듣고 혼나는 게 일쑤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잃어버린 물건은 되찾지 못하는 대신 늘 새것을 주워온다. 잃어버린 것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들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건망증 3형제처럼 평생을 살아온 듯해서 쓴웃음이 나온다. 나도 한평생을 무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면서 잃은 걸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찾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새것을 얻을 때도 많았다.
잃은 게 있으면 누군가 또 채워준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찾은 물건이 대부분 새것인데 알고 보면 까마득하게 잃어버렸던 물건이 다시 내게 새것으로 돌아온 때도 있다.
옛날에 내가 잃어버렸던 보물이 있었다. 흑진주 알이었다. 진주가 뭐 보물 축에 들기나 하느냐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게는 보물이요 보석이었다. 그 흑진주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것은 지금부터 4년 전이었다.
그 진주 보석은 시인 金容夏였다. 김용하 시인은 나와 동창이다. 시골 논산에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어릴 때 동무이다. 학교가 작아서 한 학년에 한 반씩이라 입학해서부터 줄곧 한 반이었다. 용하와 헤어진 것은 6·25 전란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는 5학년 재학 중이었고 그해 6월에 전쟁이 나서 우리 집은 집안 사정으로 논산을 떠나 전주로 이사 갔다. 소달구지를 타고 흙먼지 뒤집어쓴 채 비포장 국도를 따라 이사했는데 가면서도 간다 온다 말 한마디 반 친구 누구에게도 못하고 떠난 것이 못내 슬펐었다.
전주에 도착하고 나서 아침이 되어 시래기죽을 먹는데 이상하게도 용하 얼굴이 떠올랐다. 떠난다는 말을 안 해주어 생각난 것일까. 그 정도였다. 금방 잊었다. 학교 편입도 당장 되지 않아 날마다 놀았다. 심심하면 5학년 국어책을 꺼내 좔좔 읽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것이 용하였다. 조그만 키에 앞머리는 일자로 자르고 단발머리를 했는데 머릿결이 유난히 검고 윤이 났으며 동그란 얼굴에 두 눈도 유난히 검고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아이였다. 그때도 어리지만 당차고 야무졌다.
흑진주처럼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생각나고 책을 읽던 낭랑하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담임선생님이 시켜서 그랬을까. 어쨌든 국어책을 모조리 외워서 암송할 수 있는 아이는 우리 반에서 두 사람이었다.
나와 용하였다. 제1과부터 아직 배우지 않은 마지막 과까지 달달 외웠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소파 선생이 쓴 소년 소설「만년 샤쓰」한 부분이다. 5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남들은 다 내복을 입고 있는데 추운 겨울이 와도 주인공은 가난해서 알몸으로 다녔지만, 추위에 조금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만년 샤쓰는 맨 알몸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그걸 용하와 나에게 암송을 시켰다. 두 사람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감정까지 잡아가며 암송하여 반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었다. 용하가 시인이 되고 내가 작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무튼 전쟁 때 헤어지고 그게 끝이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중ㆍ고교를 나왔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전연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김용하란 이름을 처음 본 것은 한국일보 문화면에서였다. 시 두 편이 실려 있었다. 196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4·19 민주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만이었는데 놀랍게도 <교육 평론> 이란 잡지에서 ‘4·19 학생 혁명 詩 공모’라는 타이틀을 걸고 전국 초·중·고·대학생들의 詩를 모집하여 거기서 입상한 시를 한국일보에 실었다.
김용하는 경희대 1년생이었는데 그의 시 「별들의 승리」와 「그것은 윤리다」, 2편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영예의 수상작이 되어 있었다. 그 작품은 학생 혁명을 고귀하게 승화한 가장 우수한 詩였다고 심사자였던 조지훈(趙芝薰) 선생 심사평도 있었다.
나에게도 처음 읽을 때부터 가슴을 용솟음치게 만드는 뜨거움이 있는 감동의 詩였다. 본문은 나중에 김 시인에게서 구한 것이지만 소중해서 여기에 다시 옮긴다.
별들의 승리 / 김용하(1939~ )
심장의 끓는 피를/거침없이 자랑하다/정의를 피로 흥정해 본/하늘의 기백이여//여기 산이 뛰고/물도 뛰더니/하늘을 찔렀구나/새빨간 가슴패기에/새빨간 정의를 쏟고/기갈의 함성으로/하늘은 뚫렸구나//가슴 속에 자란 통분이/홍수처럼 천지를 누르는데/너는 장수처럼 강했다.//오 빛나는 4·19/생전을 두고 키운 주먹을/아낌없이 흔들다/괴성에 쓰러진 이들아/영생의 행렬 끝에서/나는 세상을 만들었다/세상을 잃어버린 왕자라 외쳐라.//여기 용광로 불 속에/부정을 태우고/지금 개화하는 무궁화/부푼 환희(歡喜)가/가슴마다 넘치는 오늘/그대 별들이 주고 간 승리를 안고/모두 이렇게 감격한다.
그것은 윤리다 / 김용하(1939~ )
자유를 갈구(渴求)하다가/철촉을 살에 맞고/외친 자유가 메아리로 오기 전/너는 울분을 못 참아/그 짙은 피를 쏟았다.//답답한 공기를 호흡하다/숨마저 멎어버린 육신이랑/가련한 구명의 도전 위에서/환원해버린 육신이랑 거리는 서럽다/값싼 눈물과/대가를 지불하는 무리와/소리 높은 참회와/너무나 화제가 많단다/하늘은 멀고 땅은 스산하여/너는 자유를 쏟아놓고 죽음을 삼켰는가.//그것은 윤리다/역사의 명령이다/이제 피 묻은 지역엔/보라, 네가 꽂은 자유의 깃발!
내가 문예지 <자유문학>을 통해서 문단에 나온 것은 1961년 7월이었다. 김용하 詩가 발표된 것은 1960년 5월이니 그가 나보다 1년 먼저 등단했다.
그땐 동명이인이라 생각했었다. 왜 그랬는지 쭈욱 그 시를 쓴 김용하가 동창생 용하일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뒤 등단한 내가 몇 년 지나서 단편집을 내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잃어버렸던 흑진주가 내 앞에 나타났다.
반가운 해우였다. 15년 만에 만났다. 내가 작가가 된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인데 그때도 용하는 자신이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한두 번 다시 만나다가 또 그 흑진주를 잃어버렸다. 결혼해서 훌쩍 떠나갔다.
김용하가 시인이라는 것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논산 초등학교 후배 중 김용우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옛 얘기를 나누다가 김용하라는 이름이 나왔다.
“용하를 네가 어떻게 알아?”
“한동네 살던 친누나나 마찬가지인데 왜 몰라요?”
“그래? 지금 어디 살고 있지?”
“영국에 가서 산지 좀 됐어요.”
“뭐 하는데?”
“시인인데 형은 모르셨수?”
“뭐여? 그 시인이 그 시인이여?”
그렇게 되어 어느 날 잃어버렸던 흑진주는 3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그는 마치 동구 앞을 지키는 긴 세월의 연륜 쌓인 느티나무가 되어 서 있었다. 천년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활짝 피우고 죽어간다는 느티. 그는 그 나무의 아름다움 속에 날마다 산고(産苦)의 고통을 겪으며 창작해 온 수백 편 시를 감추며 살고 있었다.
이번 이 시집은 전체가 아니고 그 일부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는 詩를 쓰고 있다. 나는 그의 데뷔 시를 본 다음, 시간의 망각 속에 수십 년 동안 그의 시를 접하지 못하다가 이제 샅샅이 보고 역시 그의 시는 그만의 작은 우주를 가지고 있구나, 영롱하고 무수한 성운(星雲)에 둘러싸인 안드로메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감탄사를 발하게 했다.
「겨울나무 사이」이 시집을 열면 누구나 둥근 파 껍질을 벗겨내듯 김용하 詩의 비밀을 알아내는 기쁨을 만끽하리라 본다. 불어로 ‘꽁스몽!’은 끝이란 뜻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란 말이다. 용하! 아직 우리는 젊다. 새로 시작하자! 꽁스몽!
망언다사(妄言多謝)
- 2010. 5. 5.
♤유현종(劉賢鍾, 1940. 2. 25 ~ ) 소설가. 호 조산. 전북 전주 태생
< 대표작품 >
* 장편 <연개소문> (SBS 대하드라마 ), < 대조영 > (KBS 대하드라마 )
* 장편소설 <들불> <삼별초> <고선지> <사도바울>
* 소설집 <두고 온 헌사> 외 다수
* 김용하(1938~ ) 시인, 호 효문당, 충남 논산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전 군포문인협회 회장, 과천문화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