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2019. 03. 10]
오늘 신명기 말씀은 히브리판 ‘추수감사절’이다. 땅 없이 떠돌아다니다 남의 땅에서 착취당하던 이방인 어중이떠중이들이 주님께서 주신 땅에 안착해 처음으로 거둔 소출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26,10). 이스라엘이 그 뿌리부터 (남의 땅을 붙여먹고 사는) 이방인(히브리어로 ‘게르’)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난민이었다는 것이다. 유사 이래 사실 난민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난민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고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리게 된 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유다인으로 간주되는 아브라함 역시 난민이었다. 나이 일흔다섯 살에 지내던 고향, 하란(창세 12,4)에서 부족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분부와 약속 때문에 스스로 난민이 되어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12,10) 그리고 죽을 때까지 떠돌았다.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그를 만난 모든 이에게 축복이 되었다(12,2-3). 그는 난민 실존의 본질을 보여주는 자이다. 그들 때문에 본토인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 역시 유다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사실(1,26-27; 2,7-8.21-25)이 해당 맥락에서 중요하다. 당대의 난민들이 모여들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로 대표되는 모든 문명의 전통에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 이미 신들이나 반신들의 세상이 있었으며,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도 첫 번째 인간이 이집트인이나 메소포타미아인 이었던 것과는 달리, 아담은 세상과 함께 창조되었으며 그냥 사람이다. 더욱이 ‘에덴’을 떠나게 된 난민이다(3,23-24).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로마 10,12ㄱ)고 공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일 뿐인 세상이 올리브 나무인 유다인들을 상대로 접붙여져 그 수액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11,17). 그리스인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제 이방인(히브리어로 ‘고임’)이 아니라, 이웃(히브리어로 ‘레아’)이다. 이로써 “누가 내 이웃인가?”(루카 10,29)라는 질문에 근본적인 답변이 이미 주어진 셈이다. 이웃이란 우선적으로 나에게 땅 부쳐 먹고 살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이 땅에서 나온 소출로 연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땅에서 일구어 낸 ‘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빵으로 하느님께 추수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판 추수감사의 전형인 Thanksgiving Day가 어떤 과오에 바탕하고 있는가? 유럽을 떠나 신대륙에 들어 온 자들이 땅을 몰라 농작물을 심는 족족 실패하고 원주민의 도움으로 그 땅에 맞는 작물들로 처음 소출을 거두어 연명했을 때, 그들이 감사해야 할 대상이 일차적으로 누구였는가? 그들은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이후 유사한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는 역사이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러했다. 주님께서 사십 일 간의 광야 체류 막바지에 악마로부터 받으신 첫 번째 유혹에 모두들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계속 돌에서 빵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루카 4,3ㄴ) 착취한 빵으로 ‘돌들(K. Marx의 표현대로, 부가가치가 붙은 상품, 곧 Produkt)’을 양산해내고 거기에서 다시 더 많은 빵을 얻어내어 독식하는 역사 말이다. 이러한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방인이 발붙일 곳은 없다. 그러나 이들을 희생 삼아 하느님께 감사드릴 장소는 넘쳐난다. 사순 시기는 이방인들, 곧 난민들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기이다. 우리의 감사에 배제되어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난민들이라면,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악마이다(요한 8,44). 나는 누구의 자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