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5주일[2019. 9. 22]
富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찬사는 자본주의와 청교도적 삶의 이상향에 바탕을 둔 개신교 목사의 설교에서 통속적으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반면 빈곤과 가난은 게으름의 소치나 눈먼 운명, 게다가 신적 형벌 등으로 해석되기 일쑤이다. 가난을 금욕적 삶의 이상향이나 일종의 덕으로 보는 것도 가난에 대한 잘못된 해석 전통을 그대로 반영한다.
부와 가난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제시하는 제일 대표적 예 중 하나가 바로 루카복음 16장의 문을 여는 소위 ‘약은 집사의 비유’(16,1-8)이다. 해당 소제목 때문에라도 복음 내 해석이 제일 난감한 비유 말씀이다. 도대체 누가 ‘어떤 부자’로 소개되는 주인이란 말인가? 집사가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음에도 칭찬을 하는 주인이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집사의 ‘이기적’ 행위가 현명한 처사란 말인가?
율법과 유다교 내 해석 전통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집사의 행위와 주인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난다. 부채탕감에 대한 율법(탈출 22,25; 레위 25,35-37; 신명 23,19-20)이 출발점이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르면, 집사는 주인의 자산 관리에 자율권을 지니고 있었다. 빌려준 것에 대한 이자나 세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긴 이윤 중 일부는 주인에게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만일 부채를 탕감하거나 깎아줄 경우, 주인보다는 스스로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된다. 자신에게 돌아올 몫의 상당 부분이나 전체를 우선적으로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밀에 대한 년간 이자는 25%였고 손실의 부담이 더 컸던 기름의 경우 이보다 더 높았다. 밀 여든 섬에 대한 년간 이자를 더하면 밀 백 섬이 되니, 백 섬 대신 여든 섬으로 적는 것은 부채를 완전히 탕감하는 것에 해당된다. 집사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준수의 발로이고 일종의 ‘경제적 회개’인 셈이다. 이는 해당 집사와 다른 이들 사이의 앞으로의 관계를 규정한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16,4ㄴ) 이로써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에서 부자에 대한 하나의 대조그림이 제시된 셈이다. 가난의 궁극적 실체는 홀로됨(Isolatio)이다. 라자로를 무시한 부자는 가난하게 되었고, 집사는 자신의 몫을 포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부자’가 되었다.
부자는 무엇을 스스로를 위한 채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친교에 바탕하고 풍요로움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만이 홀로 부요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니(십계명도 결국 이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느님 없이는 결국 가난한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 대결구도에 들어서는 것이 ‘맘몬’(마태 6,24; 루카 16,9.11.13)이다. 통상적으로 재물로 번역되는 ‘맘몬’은 그리스어로 ‘맘모나스’이고 아라메아어 ‘맘몬(강조형 ‘맘모나’)’에서 온다. 어근이 되는 동사는 ‘믿고 신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신뢰야말로 모든 관계의 바탕이 아닌가? ‘맘몬’만이, 돈만이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돈은 그 자체로 생물이다. 쉽게 인격화된다. 오죽하면 법인이란 표현까지 생겼겠는가? 하지만 그 자체로 주체가 된 돈은 결국 우리 모두를 노예화하고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들어서지 않는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맘몬’은 예나 지금이나 ‘바알(히브리어로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돈이 홀로 서고 스스로 작동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를 위한 유일한 방편은 ‘맘몬’을 객체화시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맘몬’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다른 이들을 소외(alienatio)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나 타자를 상대로 관계를 창출해내어야 한다. 돈이 다시금 우리 사회 내 여러 가지 차원의 인간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자’를 많이 양산해 내는가, ‘빈자’를 많이 양산해 내는가?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 때문에 ‘부자’인가, ‘빈자’인가? 불의하고 약은 집사가 아니라 영리한 집사가 여전히 절실한 작금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