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2주일[2019. 11. 10]
어머니가 유다인이어야 유다인이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대개 어미의 몫이다(창세 4,25; 루카 1,31.60). 이렇듯 어미가 유다인으로서 아이의 자의식 형성에 생의 처음부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어미가 일종의 ‘가리워진’ 율법교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오늘 독서가 속해있는 마카베오기 하권 7장에서처럼 결정적일 때 드러난다. 일곱 형제가 어미와 함께 율법때문에 폭군 앞에 심문받고 있다. 공적으로 율법이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것이다. 모두를 대변했던 첫째가 잔인하게 수족이 잘리고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로 불에 달구어진 냄비에 삶길 때, 어미와 나머지 아들들은 서로 격려하며 율법준수를 다짐한다. 순교로써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증거(martyria)를 다짐한다. 앞선 6장에서 등장했던 엘아자르가 동일한 길을 먼저 가며(2마카 6,18-31) 일종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면, 이제 어미가 전면에 등장한다. 나머지 아들들이 이미 받은 율법 교육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죽어갈 때, 어미는 ‘조상들의 언어로’ (7,21. 27) 죽어가는 자식들 하나하나를 상대로 일종의 ‘창조종말론’을 설파하며(7,22-23. 27-29) 순교의 길을 가도록 격려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은 어미나 아비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마지막에도 그분께서 모든 것을 되돌려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미는 일종의 ‘신학자’였고, 인간의 생성(미시세계)과 만물의 생성(거시세계)을 연관시킨 사고를 전개했기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도 그녀에게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다(PG 50,620). 율법에 정통한 모범적 언행으로 아들들을 가르친 그녀에게서 잠언 1,8의 어미의 형상이 ‘지혜의 친구’에로 승화되고 있다. ‘상지의 옥좌(Sedes Sapientiae)’이신 성모님과 유사한 자리에 들어서고 있다.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7,29ㄴ)라는 막내를 상대로 한 어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이 지혜 자체이시고 최종 심판관이신 하느님과 이미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암시한다. 주님 앞에서 아브라함을 상대로 “당신은 하나의 희생제물을 바쳤지만, 나는 일곱 개의 희생제물을 바쳤다오.”(Git 57b)라고 말하라 아들들에게 명한다. 어미는 주님께 일곱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며 주님과 함께 이미 그들을 되돌려받고 있다.
오늘 복음 장면(루카 20,27-38)에서 문제시 되는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여인이 부활 후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논쟁 역시 같은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부활이 없다 여기는 사두가이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에게 이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신학적 넌센스이다. 유다 전통 내 레비레이트 결혼은 대개 ‘고엘’, 곧 구원자 제도와 본질적으로 연관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죽은 형제를 대신에 그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자신이나 그 여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형제와 그 가문의 이름을 세우기 위함이다. 합방하여 후사를 보게될 여인은 이러한 의미에서 아내가 아니다. 그녀를 상대로 내가 구원자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후사를 보면 통상적으로 더 이상 그녀와 관계하지 않았다. 죽은 형제가 진 부채나 레비레이트 결혼을 통해 얻은 후사의 양육 그리고 해당 여성의 부양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다 떠맡아야 했을 뿐이다. 이렇게 살아서 구원자 역할을 한 자는 부활 후 먼저 죽었던 형제와 그 아내를 진정한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함께 그분 입장에서 만나게 될 뿐이다. 율법에 따라 구원자 역할을 한 형제 덕분에 먼저 죽었던 형제는 계속 ‘살아있을 수’ 있었고, 그를 상대로도 하느님께선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증명할 수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에서 어떻게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는가? 평신도 주일의 의미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