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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2020. 07. 05] /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마산교구 삼계본당 신부님 강론)

작성자천국열차 승무원|작성시간20.07.14|조회수181 목록 댓글 0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2020. 07. 05]

 

  흔히들 인생을 재미를 보고의미를 찾는것으로 규정한다. 삶이 보고’ ‘찾는다는 두 동사로 수렴된다.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고 보는 것이 제일 잘 실현되는 장이 바로 여행이다. 물론 여행은 새로운 것을 먹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모두 육체성과 직결된다. 육체성에 기반한 직접 체험을 통해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여행을 해야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풍성해진 이야기를 지닌다는 것이 행복이다. 이렇듯 인간은 여행하는 인간이다. 여기서 여행 중 제일 최고봉은 순례(pilgrimage)’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는 최상의 여행을 한 자이며, 최고의 이야깃거리를 남긴 자이다. 지금껏 그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 역대기 하권 말씀(24,18-22)에서 즈카르야가 죽으면서(하느님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마태 10,22 비교) 남긴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224,22) 이를 직역하면, “주님께서 보시며 찾고 계시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보다(히브리어로 라아’)’찾다(히브리어로 다라쉬’)’이다. 성경 내 해당 두 동사가 전면에 등장하는 장면들 중 대표적 두 장면은 즈카리야의 마지막 말을 상대로 의미론적 연관성을 제공한다. 첫 번째 장면은 유다 전통 내 아케다(‘양손을 뒤로해서 묶다라는 의미)’로 불리는 창세기 22장 장면이다. 모리야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요약하듯 해당 장소에 야훼 이레라는 이름이 주어진다(22,14). ‘야훼 이레는 역대기 하권의 즈카리야 죽음 장면에서도 그대로 등장한다. 앞서 언급된 주님께서 보시며 찾고 계시다(2역대 24,22)가 히브리어로 이레 야훼 워이드로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보신다는 의미의 야훼 이레에서 동사(이레)와 명사(야훼) 사이의 어순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케다장면에보다라는 동사가 주님을 주어로 두면 마련한다로 번역되고(22,8.14), 아브라함을 주어로 두면 단순히 보다로 번역된다(22,13). 이미 전자가 번역상미래지향적이었다면, 후자는 같이 등장하는 전치사 때문에 미래지향 적이 된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 것은 숫양 한 마리인데, ‘뒤의숫양이기 때문이다. ‘힌네니 아일 아하르’, 아하르(뒤의)’, ‘아일(숫양)’, ‘힌네니(있다)’ 조합에서 아하르(뒤의)’는 굳이 있을 이유가 없다.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을 보는 법이지만, 이렇게 될 경우 그 이면을 본다는 의미이다. 눈앞의 대상으로서 숫양 그 이면을 본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치사 아하르라는 공간적 의미 말고도 이후라는 시간적 의미도 지닌다. 이로써 하느님의 봄과 아브라함의 봄이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숫양 이면에 오실 하느님의 어린양도 본다.

 

  연관 동사들 중 또 다른 하나인 구하고 찾는다는 의미의 다라쉬가 등장하는 제일 대표적 장면은 레위 10,1-3과 연관 하에 10,16이다. ‘모세의 입이 된 아론(탈출 4,16)의 네 아들들 중 첫째와 둘째 나답과 아비후는 각자의 향로에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과는 다른 속된 불을 주님 앞에 피워 바쳤고, 그 결과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 죽여버렸다(10,1-2). ‘아론은 침묵했고’(10,3), 그 대신 모세가 계속 말하였다. 급기야 아론의 남은 두 아들 엘아자르와 이타마르가 속죄 제물로 바친 숫염소가 이미 다 타버린 것을 목격하고 질책하는 모세를 상대로 그제야 침묵하던 아론이 입을 열어 주님 앞에 한탄했고, 이에 모세가 동감하였다(10,16-20). 미드라쉬 전통에 따르면, 아론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 대사제직을 수행할 자가 없을 뻔했지만, 모세가 벌어진 일의 의미를 찾고 또 찾아(히브리어 동사 다라쉬한 문장 내 두 번에 걸쳐 등장하지만 한국어 성경에서는 조사해 보았다로 되어있)’(10,16) 위기가 극복되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통해 진정으로 대사제직을 수행할 자를 찾고 구하신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모세의 찾음과 주님의 찾음이 다시금 합일된다. 진정한 의미의 미드라쉬(유다교 성경주해)’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 인생의 성패 역시 결국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는가(또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보는가)에 달려 있다.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의 인생은 어떠했겠는가?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재미있었겠는가? 무엇을 구하고 보았겠는가? 끊임없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찾고 구했을 것이. 그의 짧은 생애는 이처럼 볼거리로 가득 찬 순례였다. 오늘 독서의 즈카르야(2역대 24,20)나 복음 말씀(마태 10,17-22)의 사도들처럼 아버지의 영안에 머물고 그 안에 아버지의 영이 머물렀기에, 보고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그것과 합일되어, 그의 말이 곧 하느님 말씀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 인생은 의미있는가? 재미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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