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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숲길에서 숨 고르기

작성자정익준|작성시간26.06.10|조회수24 목록 댓글 0

<뒷산 숲길에서 숨 고르기>


사람에게도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숲길에서 배웠다. 가파른 숨 가쁨 뒤에 찾아오는 평온은, 삶의 속도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였음을 산은 침묵으로 가르쳐준다.

가을이 완연한 지금, 물통 하나만 챙겨 들고 인근의 금련산을 찾았다. 집을 나선 지 이십 여분, 산문에 들어서니 바쁜 일상에 가려져 있던 계절의 표정들이 일제히 나를 반긴다. 지천으로 널린 가을꽃과 풀들의 빛깔, 그 오묘한 향취가 무뎌진 감각을 선명하게 깨운다. 이곳의 시간은 시계의 바늘이 아니라 꽃잎의 흔들림으로 흐른다.

그들을 뒤로한 채 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오십 년 세월이 빚어낸 편백 나무 군락에 이른다. 1970년대 사방사업으로 조성된 이곳은,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녹색의 정기가 짙어서 그런지 숨을 들어마실 때마다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도심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공간에 들면, 마음은 어느새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처럼 차분히 가라앉는다. 편백 숲은 세상의 소음을 걸러내고 영혼의 산소만을 통과시키는 거대한 거름망과 같다.

발걸음이 가벼워질수록 나뭇잎의 사락거림과 새소리가 더 또렷이 말을 건네온다. 이런 길에서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줄로 늘어서 걷는다. 혼자여도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산길이 주는 묘한 위안이다. 줄을 선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단순한 질서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여럿이 함께 걷다 문득 혼자가 될 때, 숲은 강요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을 넌지시 내어주어서 참 좋다.

오늘은 혼자라서 그 침묵의 속도에 따라 걷기로 한다. 내 앞의 숲길은 이토록 여유롭게 열려 있는데, 나는 왜 늘 무엇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왔을까.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었고, 그것이 내 삶에서 정말 중요했을까. 길은 굽어 있는데 내 마음은 늘 직선으로만 내달리려 했다. 오늘 이 숲길을 걸을 때만큼은, '무엇을 더 얻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나는 숲이 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정직한 치료사임을 깨닫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가다 걸음을 멈추고 땀을 닦아낸다. 갈증 뒤에 마시는 물 한 모금 위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 간다. 산바람의 고마움을 느끼는 이 순간은, 역설적으로 땀을 많이 흘린 증거다. 그렇게 보면, 인생의 환희도 고통의 정점에서 비로소 발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행 후 막걸리 한두 잔에 세상을 다 얻은 듯 만족할 줄 아는 나는, 인생을 긍정하는 낙관주의자이다. 그 낙천적인 마음의 바탕에는 수없이 걸어온 산길과 숲길의 기억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걷기 시작하자 길가에 핀 야생화들이 눈에 가득 안긴다. 저 꽃들은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라 피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시들고 진다. 그중에서도 이름 없는 꽃일수록 계절 앞에 더욱 담담하다. 문명의 속도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호흡으로 여유를 부리고 서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꽃잎을 거두어야 할 운명이지만 그 표정에는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삶을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게 살아내는 방법을 저 작은 꽃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높이 피어나려 애쓰지도, 더 오래 남으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주어진 자리에서 피고 지는 일만으로도 삶은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람에게도 이처럼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숲은 말없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지나며 잊고 지냈던 마음의 소리를 깨운다. 침묵으로 가득한 숲길을 걷다 보면 애쓰 답을 찾으려하지 않아도 된다. 숲은 설명하지 않지만,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연과 마주 하는 시간은 삶의 속도를 늦추게 하고, 무엇을 이루었가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 아름다은 가을 풍경 속에 나를 맡긴 채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은 숲을 찬미하는 한편의 시가 된다.


'햇볕 따스한 아침
정든 숲길 걸어가면
말할 때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침묵 속에
한적한 숲길 걸어가면
빛바랜 기억과 현재의 내가 마주 앉아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연습 없이 먼 길 걸어온 내게
숲은 묻는다
무엇을 남기려
그리 애를 썼느냐고

굽어진 길을 돌아서고
다시 돌아서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멀고 가까움을 잊고
바람이 되고 물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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