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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한 장의 산길> 요즘 시중에 ‘남자는 집사람과 네비게이션 안내양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돌고 있다. 이 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 생활상과 세태,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듯하다. 먼저, '집사람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듯, 지금까지 남편이 주도해 온 가정의 권력이 아내 목소리가 날로 커짐에 따라 자연스레 넘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남편들의 위상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상황을 반증하고 있다. 이런 논의는 여자는 나이가 들면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높아지지만, 남편들의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아 마음마처 위축되는 현상에 따른 것이라 이해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편들이 굳이 나서서 가정사를 주도할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맡겨두면 마음이 편안할 것이라는 위트 섞인 조언이자, 남성들의 무력함을 자백하는 표현처럼 들린다. 물론 경우에 따라 아내 말을 들으면 가정이 무사형통(無事亨通)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수준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정에서의 중심과 리더쉽은 남자의 몫이라 믿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 그들은 이미 인수인계를 다 마쳤다며 나더러 '간 큰 친구'라거나 '아날로그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 핀잔을 준다. 아니 나더러 아날로그적 사람이라니.... 세상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느림보라는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들이 말하는 디지털적 접근이란 새로운 세태를 받아들여 아내의 역할을 강화해 주는 신식 남편상이고,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아날로그적 사고는 속도나 효율, 기능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수용할 생각이 없다. 어쩌면 대책 없는 고집이라 하겠으나, 지금까지 가정을 잘 이끌어 왔고, 남편으로서 경제권을 책임지는 것이 내 역할이라 판단하기에 당분간은 이대로 지낼 생각이다. 가정은 가족들이 제 위치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아날로그적 온기가 흘러야 하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아내에게 일찍 "연금 생활 은퇴자이지만 매달 당신에게 생활비를 건네는 즐거움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소" 라 말한 적이 있다. 고맙게도 아내는 그 뜻을 잘 이해하고 지지해 주고 있으니 '시중의 집사람' 이야기는 적어도 내가 귀 기울일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네비게이션 안내양'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찾아가기 힘든 초행길이나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무척 유용하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를 찾아 안내해 주고, 제한속도도 알려주는 등 요긴한 순간마다 들려주는 안내양의 지시는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고마운 존재다. 나는 과학을 잘 모르나, 이런 기능이 확장되어 산에서 사용되는 '오룩스맵(Orux Map)같은 앱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요즘 산우들은 스마트폰에 맵을 깔고 산행을 한다. 그 바람에 산행지도는 서서히 사라지고, 산우들은 스마트폰 화면 위에 뜨는 지도를 보며 지시하는 선을 따라 산길을 간다. 맵이 안내하는 대로만 가면 하산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할 수도, 혹 등로를 벗어나면 이탈 경고도 보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실시간으로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와 시간도 알려주니 참으로 영리한 인간지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화면 속 좁은 창으로는 산행지도 한 장이 품고 있는 산 전체의 거대한 판도를 읽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산행지도 한 장을 손에 들고 보면,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이 산과 저 산의 유기적인 관계, 나와 산,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이 훨씬 더 쉽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 넓은 폭 위에서 산의 세계를 품으며 한량없는 꿈을 그리기도 좋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나, 산행지도를 펼쳐 드는 만큼 우리의 시야도 산의 세계를 더 넓게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는 원래 기계 다루기와 복잡한 시스템의 작동법을 배우거나 운용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과대학으로 진학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기계에 대한 서툴움 때문이고, 그 부족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산우에게 오룩스맵을 배운 적이 있지만 이네 잊어버렸고, 지금도 앱에 얹어진 여러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여전히 산행지도가 편안하고 정겹다. 산에서 만큼은 복잡하게 머리를 쓰기보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사라져 가는 옛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룩스맵의 편리함과 실용성은 누리되, 산행지도가 갖는 맛과 의미도 함께 즐기는 산행이 진정 바람직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갈 방향을 가늠해 보고, 가다가 잠시 숨을 돌릴 만한 아늑한 골짜가를 찾아보는 것, 그것이 산행이 주는 즐거움이 아닌가. 그러니 오룩스 맵의 눈을 빌리면서도 손에는 산행지도를 쥐고 걷는다면, 그 보다 행복한 산행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산우들은 산행지도의 가치를 생각해서 배낭 속에 꼭 한 장씩 챙겨 다녔으면 하는 바램이다. 산행은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자 기록이다. 손때가 묻어 구겨지거나 땀으로 얼룩진 산행지도를 잘 모아 두면, 훗날 자신이 걸엇던 그 수많은 산길을 회상하거나 다음 산행을 기약할 때 요긴한 자료가 된다. 나는 그렇게 한다. 서재 한 편에 보관 중인 천 여장의 산행지도를 가끔 꺼내어 펼칠 때가 있다. 지도의 닳아진 모서리를 만지며 산길 위를 걷던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산우들의 얼굴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이렇듯 추억을 박제해 주는 귀중한 것이기에 산을 갈 때에는 꼭 지니고 다닐 일이다. 이처럼 산행지도 한 장은 길뿐 아니라 산의 깊은 숨결과 나의 지나온 발자취까지 함께 비추어 준다. 언젠가 세월이 더 흘러 산길이 아득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낡고 구겨진 그 지도 한 장을 펼쳐 들면 나는 언제든 다시 산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산행지도가 우리 곁에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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