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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도

작성자정익준|작성시간26.06.12|조회수34 목록 댓글 0

<산의 숨결을 펴다>

 

 

요즘 시중에 ‘남자는 집사람과 네비게이션 안내양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 생활상과 세태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변화를 반영해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듯하다.

 

먼저, '집사람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듯, 지금까지 남편이 주도해 온 가정의 권력이 아내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자연스레 넘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남편들의 위상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논의는 여자는 나이가 들면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높아지지만, 남편들의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아 마음마저 위축되는 상황에 따른 것이라 이해된다. 이런 세태에서는 남편들이 굳이 나서서 가정사를 주도할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맡겨두면 마음이 편안할 것이라는 위트 섞인 조언이자, 남성들의 무력함을 자백하는 표현처럼 들린다. 물론 경우에 따라 아내 말을 들으면 가정이 무사형통(無事亨通)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수준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정에서 중심과 리더쉽은 남자의 몫이라 믿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 그들은 이미 인수인계를 다 마쳤다며 나더러 '간 큰 친구'라거나 '아날로그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준다. 아니 나더러 아날로그적 사람이라니.... 세상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느림보라는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들이 말하는 디지털적 접근이란 새로운 세태를 받아들여 아내의 역할을 강화해 주는 신식 남편상이고,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아날로그적 사고는 속도나 효율, 기능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수용할 생각이 없다. 어쩌면 대책 없는 고집이라 하겠으나, 지금까지 가정을 잘 이끌어 왔고, 남편으로서 경제권을 책임지는 것이 내 역할이라 판단하기에 당분간은 이대로 지낼 생각이다. 가정은 가족들이 제 위치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아날로그적 온기가 흘러야 하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아내에게 일찍 "연금 생활 은퇴자이지만 매달 당신에게 생활비를 건네는 즐거움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소" 라 말한 적이 있다. 고맙게도 아내는 그 뜻을 잘 이해하고 지지해 주고 있으니 '시중의 집사람' 이야기는 적어도 내가 귀 기울일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네비게이션 안내양'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찾아가기 힘든 초행길이나 장거리 여행을 할 때 네비게이션은 참으로 유용하다.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를 찾아 안내해 주고 제한속도도 알려주는 등 요긴한 순간마다 들려주는 안내양의 지시는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고마운 존재다.

 

나는 과학을 잘 모르지만, 이런 기능이 확장되어 산에서 사용되는 '오룩스맵(Orux Map)같은 앱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요즘 산우들은 대개 스마트폰에 오룩스 맵을 깔고 산행을 한다. 맵이 실시간으로 길을 안내하고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와 시간까지 알려주니 참으로 영리한 문명의 이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요즘 산행을 하다 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한 모습을 자주 마주 한다. 산우들이 대자연이 품은 풍경과 숲의 호흡을 즐기기보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 뜨는 지시선을 확인하고 수치를 확인하는 재미에 더 심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액정 속 좁은 창으로는 산행지도 한 장이 품고 있는 산 전체의 판도를 읽어내는 데 한계가 있음에도 눈은 자꾸만 작은 화면으로 향한다.

 

물론 이 편리한 기술을 무조건 멀리하자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눈비로 산길이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을 때나, 험준한 지형에서 길을 잃어 안전이 위협받을 때 맵은 훌륭한 구원투수가 되어준다. 이 영리한 눈은 이러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기술에 너무 의존하기엔 우리가 산에서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행지도를 들고 보면, 나의 위치, 이 산과 저 산의 관계, 나와 산,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이 훨씬 쉽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 넓은 폭 위에서 산의 세계를 품으며 한량없는 꿈을 그리기도 좋다. 순전히 나만의 아날로그적 생각일지 모르나, 산행지도를 펼쳐 드는 만큼 우리의 시야도 산의 세계를 더 넓게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원래 기계 다루기와 복잡한 시스템 작동법을 배우거나 운용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상과대학으로 진학했을까. 그 이유의 하나도 ‘기계 다루기 서투름’ 때문이었음을 고백간다. 그 부족함은 지금도 여전해서 산우에게 맵 운용방법을 배웠으나 곧 잊어버려 앱에 얹어진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는 산행지도가 편하고 정겹다. 산에서는 복잡하게 머리를 쓰기보다 단순한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라져 가는 옛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맵의 실용성은 누리되, 산행지도가 갖는 맛과 의미도 즐기는 산행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갈 방향을 가늠해 보고 가다가 잠시 숨을 돌릴 골짜기도 찾아보는 것, 그것이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닌가. 그러니 맵의 눈을 빌리면서도 손에는 산행지도를 쥐고 걷는다면 행복한 산행이 되지 않겠는가.

 

산행은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자 기록이다. 구겨지거나 땀으로 얼룩진 산행지도를 모아 두면 훗날 걸었던 그 수많은 산길을 회상하거나 다음 산행을 계획할 때 요긴한 자료가 된다. 나는 그렇게 한다. 서재 한 칸에 보관 중인 천 여장의 산행지도를 가끔 꺼내어 펼칠 때가 있다. 지도의 닳아진 모서리를 만지며 산길 위를 걷던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산우들의 얼굴도 떠올려도 본다. 이렇듯 추억을 박제해 주는 것이기에 산을 갈 때는 꼭 산행지도를 지니고 다닐 일이다.

 

이처럼 산행지도 한 장은 산길뿐만 아니라 산의 숨결과 내가 지나온 발자취까지 비추어 준다. 언젠가 세월이 더 흘러 산길이 아득해지더라도 낡고 구겨진 산행지도 한 장을 펼쳐 들면 나는 언제든 다시 산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산행지도가 우리 곁에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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