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피곤해서 반 정도만 읽고 내일 읽으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마지막 줄을 읽고 있었어요. 초반부 읽을 때는 좀 밋밋하지 않나, 싶었는데 갈수록 매력 있고 마지막엔 찡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거의 빙의돼서 읽은 것 같아요.
'차나 한 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다' 주인공의 그 역설적 통찰이 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네요. 밝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지만, 사실 그 속엔 생계가 달린 문제로 낙심하고 고뇌하는 주인공이 있고요. 만화를 그리는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글 쓰면서 사는 길을 선택할 사람으로서 미래의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상황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고, 페이소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창작이라는 행위를 위해 위태롭고 예민한 정신적 칼을 갈고 있는 그에게 "차나 한 잔 합시다."라는 도회적이며 우회적인 어법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을까요. 김 선생과 술을 마시면서 아톰X군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진짜로 마음이 서늘했어요.
작품을 읽으면서 상황 설정이나 내적 정황 묘사가 참 탁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찾아보니까 김승옥 작가가 아마추어 만화가로 신문 연재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네요.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 머리로 생각해낸 것과는 차이가 있는 걸까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한 요건에는 예민한 감수성이나 깊은 사유 같은 것들도 있지만 풍부한 경험 역시 중요하단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함부로 뛰어들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또 한번 확인하네요.ㅠ ㅠ
그리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그러나 이렇게 계단 위에 서서 사람과 자동차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또 무엇을 붙들어야 한다. 오늘 중으로 무언가 확실한 걸 붙들어 둬야 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순조롭게 연속시켜 주는 것을 붙잡아 둬야 한다.' 이 부분이었어요. 단순히 생계를 잃은 가장의 불안함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읽었던 '노동의 의미'에 대한 글을 떠올리게 하네요. 노동은 물질적 안정 뿐 아니라 정신적 안정도 보장한다, 노동은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고뇌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막아 준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노동=속박과 자유, 그 사이의 괴리와 불안함,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전체적인 흐름에 대한 것 외에도 부수적인 잔가지들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섬세한 솜씨로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사실 김승옥 작가 하면 <무진기행>밖에 떠오르는 작품이 없었는데 다른 작품들도 더 읽어보고 싶어져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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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재현 작성시간 11.04.05 나도 이 소설 4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정말 좋더라 4년전에도 이 정도로 좋게 읽혔는지 의문일만큼. 심리묘사도 심리묘사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로 착착 묶여나가는 것도 놀라웠어. 전혀 딴 얘기처럼 보이던 옆집 얘기가 소설 말미에 주인공에게 하나의 암시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은 어떤 소설의 결말보다도 인상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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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다크소울 작성시간 11.04.05 차나 한 잔 합시다. 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말이 가지는 무수한 함축성과 복잡성에 감탄을 금치 못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