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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 독 백 ------- ▣

(대구 드라마센터 연기학원) 여자독백-이강백/자살에 관하여 中

작성자Drama-은진♡|작성시간08.07.04|조회수1,097 목록 댓글 0

(남지인 대사)

 

 

응.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고싶어 한다는 거야.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돈 많은 부자도, 가난한 빈자도, 높은 지위와 명예로서 만민에게 추앙 받는 사람도, 온갖 경멸과 멸시를 받는 사람도, 그 모두가 죽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라구. 언니는 립스틱의 색깔을 바꿔야 해. 지금 칠한 색깔은 꼭 시체에나 어울려. 내가 사온 이 진홍색을 발라봐.

(핸드백에서 진홍색 립스틱을 꺼내 남지인의 입술에 칠해준다. 그리고 손거울을 남지인의 얼굴 앞에 내민다.)

어때? 언니는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 같잖아?

 

 

 

 

 

(유경화 대사)

 

 

그 몹쓸 자식들이, 아니 그 인간들이 모두 보고싶은 거야. 정말이야, 언니. 그 빌어먹을 인간들이 보고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겠어. 다 잊었는가, 다 잊어버렸는가 했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날 때마다 그 인간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거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런데도 그 인간들은 지금 내가 자기들을 그리워한다는 걸 모르겠지. 사실은 언니, 난 그 인간들과 헤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내가 천장에 목을 메달았을때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던 때나, 약을 먹었던 때나, 오히려 나는 그들을 꼭 붙잡으려 했던 거야. 하지만 그 인간들은, 아니 그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런 내 심정을 알지 못한 채 나를 내쫓았어. 똑같이 말이야, 다시는 보기도 싫다고 내쫓더라구!

 

 

 

아침은 굶고 출근하구, 점심은 음식점이나 구내식당에서 사먹구, 저녁은 먹을 때도 있고 안 먹을 때도 있다 그거지? 도대체 언니, 산다는 게 뭐야?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런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먹지 않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어보기나 했어?

(옷장을 가리키며) 그리고 저기 옷장 말이야, 저 옷장도 텅 비어 있더라구. 언니는 지금 가장 인생이 무르익는 때야. 우아한 옷, 화려한 옷들이 가장 잘 어울릴 때지. 그런데 언니는 화장도 안하고 언제나 거무칙칙한 옷만 입고 다녀. 그래서 남자들이 언니의 진짜 매력을 몰라보는 거야.

 

 

 

진지하고 심각해야지, 웃으면 안 돼! 자살하겠다는 사람 말을 웃어넘기면, 오기가 생겨서 진짜로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구. 솔직히, 그 하마 같은 자식이 죽겠다는 나를 조금만 믿어줬어도 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그 자식은 내가 설마 죽기까지 하겠느냐, 입을 쩍 벌리고 웃는 낯짝이었어. 그런데 그 인간뿐이 아냐. 내가 밧줄로 목을 맸던 때도, 삼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던 때도, 다 마찬가지야! 모두들 농담으로 여길 뿐 진심으로 받아주질 않는 거야!

 

 

 

난 자살을 많이 연구했어.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살 기사가 나면 꼭 오려놨구, 도서관에 가서 자살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거든. 불란서 메츠 지방에서는 자살자의 시체를 나무통 속에 집어넣고서 강물에 던졌어. 멀리 멀리 바다로 흘러가서 죽은 자의 유령이 못 돌아오게 하려는 거야. 영국에서는, 자살은 반역죄만큼이나 큰 범죄로서 사형에 처했어. 그러니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사람은 결국은 교수형을 당하고 죽어야 했지.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에서는, 자살자의 시체는 다른 시체들과 분리시켜 아테네 시 밖에다 묻었어. 더구나 자살자는 자기 자신을 죽인 저주받을 두 손을 잘라내서 각기 다른 장소에 따로따로 묻었지. 더 재미있는 건 원시사회야. 자살자를 장례지 낼 때 마술사가 주문을 외우면 망령이 나타나는데, 그 망령이 자기를 못살게 괴롭혔던 사람이 누구라고 가르쳐준다는 거야. 그럼, 부족들이 그 지적된 사람을 붙잡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도록 강요하는 거지. 내가 최근에 썼던 소설 있잖아, 그 하마 같은 자식이 시나리오로 만들겠다는 소설 말야, 그것도 그래. 자살하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그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타인을 죽게 만들어.

 

 

 

언니는 너무 소심해서 탈이야. 내가 부장님과 이야기할 때 언니는 옆에서 바짝 긴장한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더라구. 하지만 면담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난 완전히 부장님을 사로잡았지. 인간이 갖고 있는 약점을, 난 정확하게 콱 찌른 거야. 인간의 약점이란 뭐냐--- 잠깐만, 언니. 나만 귀걸이를 사는 게 미안해서 언니 것도 하나 더 샀지. (또 다른 작은 상자의 포장지를 벗긴다.) 이 귀걸이, 너무 예쁘지? (남지인에게 귀걸이를 달아준다.) 난 너무 예쁜 걸 보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고싶어!

 

 

 

내가 장담하지만 언니, 난 전혀 실수한 게 없어. 부장님이 창백해진 건 내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런 거라구. 내일 아침 방송국에 가봐. 부장님이 언니를 불러서, 당장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방송하자고 할 테니까. 솔직히 언니, 지금 내 기분은 최고야. 하늘까지 둥둥 뜬 기분 있잖아, 이건 확실한 성공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언니는 침통하고, 울적하지. 그건 언니가 사태를 잘 못 봐서 그래. 백화점에서 너무 시간이 걸렸다던가, 내가 옷만 사지 않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던가, 더구나 언니의 크레디트 카드로 그 모든 걸 지불했던 게 신경 쓰여서, 정작 부장님과의 면담내용은 제대로 못 봤어. 결과적으로 언니는 눈에 거슬리는 작은 것만 보고, 진짜 핵심적인 큰 것은 못 본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 (들뜬 기분으로 실내를 거닐면서 암송한다.) 어리석은 이여, 그대 무엇을 탄식하고 두려워하는가? 그대가 둘러보는 곳 그 어디에서나 악의 종말이 보인다. 그대 입을 크게 벌린 절벽이 보이는가?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다. 저 호수, 저 강, 저 우물이 보이는가? 그 안에 자유가 살고 있다. 저 발육이 정지된 말라비틀어진 초라한 나무가 보이는가? 그 가지 하나하나에 자유가 달려있다. 그대의 목, 그대의 목구멍, 그대의 심장, 그 모두가 예속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이다. 그대, 자유로 가는 길을 묻고 있는가? 그대 몸 속의 핏줄 하나하나에서 그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 내가 이걸 암송하는 동안 부장님은 침묵을 지켰어. 그리고는 마침내, 얼굴이 백납처럼 창백해졌던 거지. 만약에 언니, 내가 구차스럽게 자살을 비난하는 주장만 늘어놓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반응은 분명히, 무 덤덤했거나 시큰둥했을 거라구.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유경화에요.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문이 있어요. 들어오는 문, 그러니까 태어날 때 들어오는 출생의 문이 있고요, 죽을 때 나가는 문, 즉 죽음의 문이 있어요.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하죠. 하지만 죽음의 문은 달라요. 그 문이 열려서 인간을 내보낼 때도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때가 있는 거죠.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써 문을 열고 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방안의 답답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이 창문을 열기만 해도 돼요. 자, 여러분, 창문을 활짝 엽시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여 마시면서 저하고 상담하세요. 자살상담 번호는 887에 1001번부터 1005번까지입니다. 주저 말고 전화 주세요.

(음악, 짧게 삽입된다. 남지인은 유경화에게 시작이 잘 됐다는 만족의 표시를 방음 유리 너머로 보낸다. 남지인의 앞에 놓인 전화 접속장치에 불빛이 깜박인다. 남지인, 유경화에게 전화를 연결한다,)

 

 

 

나도 물러날 나이는 아냐! 절대로 아냐, 절대로, 절대로! 인기 최고의 정상에 올라선 내가, 하루아침에 아래로 곤두박질 칠 수는 없어! 내 소설들은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구, 거들떠보지 않던 평론가들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있지! 그리고 또 영화가 있잖아! 내가 직접 출연하는 영화 말야! 어떻게 해서든지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살려야 해! 꼭 살려내야 한다구! 그걸 살려내야 난 그 모든 것을 잃지 않게 되는 거라구! 그런데 제작부장과 언니가 사표를 내고 물러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맙소사, 싸움은 해보지도 않고 손부터 드는 거잖아? 우리는 싸워야 해! 도대체 앞뒤가 꽉 막힌 멍청이들, 양로원에나 보내버릴 꼰대들의 이사회와 맞서서 싸워야 하는 거라구!

 

 

 

여보세요, 내 목소리 기억하시죠? 요즈음엔 자살상담 방송이 중단되어서 살기가 힘들 거예요. 네, 네, 그래서요?--- 듣고 보니깐 더욱 문제가 악화되었군요. 남편은 부인을 의심만 하구--- 저런, 가엾어라! 그럼 부인은 남편이 때리는데도 맞고만 있었나요? 맙소사, 아무 반항도 안 한다고 더욱더 때려요?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겠어요. 부인의 결백을 증명할 길은 자살밖엔 없겠다구요. 부인이 원하신다면, 간단히 죽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취사용 도시 가스를 사용하세요. 가스의 밸브를 열어놓고 가만히 누워서 심호흡을 하는 거예요. 이때 주의할 점은요,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든 구멍을 꼭꼭 막는 거예요. 하수도 구멍, 환기통 구멍, 창문의 빈틈, 만약 구멍이나 빈틈이 있으면 헝겊으로 틀어막고 접착 테이프로 붙이세요. 아참, 그리구요, 마지막으로 방송국에 전화하시죠.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구요. 아, 네-- 네--- 하루 이틀 더 있다가 남편과 의논해 보시겠다니--- 그러세요, 그럼---

(유경화, 실망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다. 메모판의 다른 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은 중단됐지만, 그동안 자주 상담했던 단골들에겐 특별히 전화를 해드리는 거예요. 어떠세요, 요즈음은?--- 아, 그렇군요. 나도 이해가 돼요. 선생님처럼, 나 역시 행복과 불행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쓴맛을 봤답니다. 더구나 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 타인의 잘못으로 불행해지다니,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옛날의 노예들, 자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노예들은 이런 상태를 순응하고 살았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노예가 아니잖아요? 굴욕적인 불행을 참고 살기보다는, 그 불행을 과감히 거부하는 자유인이 되세요.--- 네, 잘 결심하셨어요!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선생님답군요. 그러나 자살은 결심한 순간 실행해야 돼요! 지난번 그랬잖아요, 나하고 상담하면서 차일피일 미뤄두니깐 마음이 변덕을 부렸었죠? 또다시 그런 비겁한 자기배반에 빠지기 전에, 오늘은 먼저 목숨을 끊으세요. 선생님, 내가 자살의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목욕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놓구요, 온 몸을 그 물 속에 담그면요, 마치 태어날 때의 어머니 자궁처럼 편안해진답니다. 그럼 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죽을 때까지 연장시키면서,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르세요. 아, 한가지 빠진 게 있군요. 목욕탕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방송국으로 전화하세요. 자살 상담이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구요. 선생님, 꼭 그렇게 전화하고 죽으세요. 그--- 그런데요? 보일러가 고장나서--- 더운물이 안나와요? 언제 고치실 거죠? 뭐--- 내년 봄이나--- 고칠 거라구요?

(유경화,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옷장 속에 앉아서 계속해 다른 전화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초조하며, 애가 타는 모습이다.)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나, 유경화예요--- 오, 그래요!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셨다니 고마워요! 할머니, 오늘도 혼자서 개처럼 집을 지키시는군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너무 안됐어요. 웃어른으로서의 체신과 권위는 사라진 채, 그저 쓸모 없는 늙은이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뭐라구요, 할머니? 오늘도 생각하는 게 죽음뿐이라구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사람은 죽고 나서야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되죠. 나 역시 지금 죽고 싶어요. 할머니, 우리 함께 죽어요. 동반자살 하자는 거죠. 죽는 방법은 간단해요. 비닐 봉지를 얼굴에 둘러쓰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고무줄로 묶는 거죠. 시장에서 배추와 무를 담아줬던 비닐 봉지가 있다구요? 됐어요, 바로 그거면 돼요. 잠깐만요, 할머니. 저도 부엌에 가서 비닐 봉지를 찾아보겠어요. (장롱에서 전화기를 들고 나와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아, 여기에 있어요! 할머니는 고무줄도 준비하셨다구요? 저는 포장용 끈으로 묶겠어요. 자, 그럼 우리 똑같아, 비닐봉투에, 머리를 집어넣어요. (자신의 머리에 비닐 봉투를 씌운다) 목까지 내리덮으셨죠? 네, 잘하셨어요. 다음엔 목둘레를 단단히 묶어요! 공기가 통하지 않게, 숨을 쉴 수 없게, 꼭꼭 졸라매요! (포장용 끈으로 자신의 목을 감는다. 점점 고통스럽게 숨이 가빠지는 목소리로)

(유경화, 목을 묶었던 끈을 풀고서 비닐 봉지를 벗어 내던진다. 그리고는 장롱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서 울음을 터뜨린다. 사이. 남지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지럽혀진 실내를 둘러보더니, 장롱 앞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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