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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 곡 ★ ---------- ▣

아서밀러의 시련 줄거리

작성자Drama-은진♡|작성시간08.11.10|조회수986 목록 댓글 0

제 1 막 (파리스 목사의 집)
미국의 메사츄셰추주의 세일럼이란 마을에서 소녀들에 의해 악령을
부르는 의식이 행해진다. 이러한 의식이 파리스 목사에게 발각된다.
마을사람들은 악령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악령을 찾기 위해 목사를
부른다. 악령을 찾기 위해서 헤일 목사는 의식을 행한 소녀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문한다. 두려워진 소녀들은 자신들이 행한
의식에서 악령들이 나타났다고 거짓증언을 한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호명당한 사람들을 재판하기 위해 법정이 선다.
제 2 막 (프록터의 집)
소녀들에 의해 호명된 사람들은 마술을 부린 자로 몰려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들은 사실 절실한 기독교인이다. 마을에서 떨어져 살고
있던 프록터는 마을 사람들을 호명하고 있는 애비게일이 자신의 아내로
들어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복수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녀의 목표가 자신의 아내인 엘리자베스를 죽이기 위한
것임을 짐작하고 있다.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마을로 들어온 헤일
목사는 여기저기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실여부의 진위를 묻기위해
프록터의 집에 들린다. 그때 메어리 웨렌(프록터의 여하인)이 준 인형이
문제가 된다. 애비게일은 엘리자베스가 마술을 써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하며 배에 바늘이 꽂힌 채 발작을 한 것이다. 메어리가 준 인형에도
바늘이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메러리가 꽂아 둔
바늘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체포해
간다. 프록터는 분노한다. 헤일목사도 뭔가 수상함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제 3 막 (세일럼의 교회 응접실)
재판을 주재하는 부지사에게 프록터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무죄를 주장한다. 특히 프록터는 자신의 아내는 모함에
의해 것임을 주장한다. 그의 아내는 애비게일의 질투와 복수심에 피해
당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프록터는 애비게일이 전에 자신과 정을 통해
그의 아내가 애비게일을 하녀일을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내쫓았던 일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에 대한 복수를 애비게일이 계획하고 그의
아내에게 마귀의 누명을 씌우려 한다고 프록터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인형을 갖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메어리 웨렌을 통해
애비게일이 누명을 씌우려고 함을 증명하려 하지만, 애비게일은 악령이
웨렌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연극을 한다. 그로인해 부지사와
판사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때 프록터에게 감정이 있었던 마을
사람이 프록터가 예전부터 악마와 교통하고 있었다고 고발한다.
부지사와 판사는 프록터를 역으로 심문한다. 메어리 웨렌 또한 자신을
악령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애비게일과 그녀에게 동조하고 있던 다른
소녀들의 행동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프록터가 자신을 밤마다
목을 조르며 악마의 명단에 서명하라고 했다고 거짓증언을 한다. 결국
프록터는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누명을 씌우려 한다는 상황논리에
빠져버리게 되었고, 재판정에서 교수형을 받게 된다.
하지만 헤일목사와 프록터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은 그런 판결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른 폭력이라고 강력히 맞서지만 그들은
결국 악마로 낙인 찍힌다. 헤일목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마를
만들어내는 신권정치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법정을 떠난다.
제 4 막 (감옥)
애비게일과 정치적 야욕으로 뭉쳐진 사람들에 의해 고발당한 사람들은
교수형을 당했거나 교수형을 기다리는 상화에서 마을 사람들을 고발했던
소녀들이 마을에서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파리스 목사의 딸도
돈을 훔쳐 집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 파리스 목사와 마을
사람들은 의심을 품는다. 헤일 목사는 다른 마을에 있다 다시 세일럼
마을로 돌아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려 한다. 그는 프록터에게
가 그가 결백을 주장하며 교수형을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프록터는 자신은 악마가 아니므로 절대
자신이 악마라는 거짓고백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을의 소녀들이
사라지는 것과 관련해서 재판을 주재했던 부지사도 그의 판결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되도록이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백글 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백서를 쓰지 않는다. 헤일 목사는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에게 그가 자백서를 쓰도록 하라고 하기 위해
프록터를 만나보게 한다. 엘리자베스가 프록터를 만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프록터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프록터는 엘리자베스의
소망이 자백이 아닌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고 거짓자백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자백서에 서명하지만 그것을 공개화시키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가 서명한 것은 곧 자신을 스스로 판 행위이지만
결코 그것이 진정한 자백이 아닌 거짓자백이다. 그것을 통해 프록터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며, 그 행동은 선을 행하는 행동이기도
하다고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작품설명 <<정의가 없는 힘의 전율>>
1. 흔히 비평계에서 거론되는 양식문제 중의 하나가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이다. 어떤 작품에 대해 작가가 목적을 가진 동기를
의식하고 글을 쓰게 되는 경우 공언하는 목적이나 의도를 얼만큼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종류의 의도는 굳이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감상에 방해를 주기도 한다. 물론
예술가가 내세우는 주장이 권력이나 부귀를 추구하는 자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순수하다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가의 정직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거짓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한 것이다.
예술의 형태가 살롱 문화의 언저리 안에서 이루어지던 시절,
이를테면 18세기 파리풍의 예술 세계라면 앞에 얘기한 논리는 충분한
반론의 여지를 가질 수도 있다. 독자나 관객과 작가와의 관계가
직접적일 수 있고 사사로울 수 있었던 시대에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뜻한 바대로 형상화되었는가 등등을 묻고
토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의 원초적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이와같은 상황은 그러나 이른바 예술의 대중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게됐다. 작가와 감상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불가능해진 상황 아래에서는 작가가 내세우는 의도나 목적에 대한
일방적인 발언의 통로만이 열려있는 상태가 되고 그 척도에 의해서
작품이 평가된다면 작가의 지나친 유권적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오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작품
제일주의, 말하자면 작가의 발언쪽 보다는 작품 자체에 중점을 두는
비평전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작가의 말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되겠는데 그것은 마치
재판과정에서 피고의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전적으로 묵살해서도 안된다는 것과 비유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2. <시련>이 발표된 것은 1953년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고 미국에서는 1692년 특히 세일럼의 마녀사건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이른바 마녀 재판을 다룬 이 작품은 때마침
매카시즘의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있던 50년의 미국사회에서 정치적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져 거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정신문화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부로 기록되고 있는 두 사건은
유사성의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하나는 종교로,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로 엄청난 파문과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 우선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악의 요소, 또는
원죄의식이라고 말하여 질 수 있는 본질이 어떤 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분출되며 발전되어 가는가를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여지없이 볼 수가 있다. 거대한 집단의 광기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
사건들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에의 불신감 또는
혐오감이다. 스스로가 이룩해 놓은 상황에 억눌려 있다가 어떤
동기에 유인되어 폭발될 때 인간은 양심이나 존엄성을 팽개치고
원초적인 감정의 광기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집단의 광기는 집단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다시 집단 횡포로 발전한다. 폭거는
에스퍼레이트 되면서 가치관을 날조한다. 거기에는 이미 양심이나
이성, 진리 따위는 찾을 수 없게 되고 벗어던진 인간의 동물적인
탐욕과 복수심만이 판을 치게 된다. 이를 데 없이 추악한 인간의
혐오스러운 모습뿐이다.
특정된 명분이나 가치관을 내세울 때 그것이 보편 타당성을 잃게
되면 애초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타당성 없는 구원의 명분은
파멸의 구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강요당한 가치관은 비열한
자기합리화의 정당화를 주장하게도 한다.
<시련>의 무대가 되고 있는 1692년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은
청교도 정신에 의해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신권정치(神權政治)가 펼쳐졌었다. 영혼의 구원이라는 명분은 모든
법에 우선했고 어떤 가치관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신앙을
찾아 신대륙으로 고난의 이민을 떠나온 청교도들일진대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마다할 수 있었겠는가.
삶의 모든 척도는 신앙에 있고 가치관의 기준은 성서에 있었다.
종교가 가지는 특성가운데 하나가 절대성이라고 할진대 그것은 본능
절제의 강요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절대성이란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만을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흑백논리의 근거가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판단기준을 단지 옳고 그름만을 놓고 택일을 강요할 때
그것이 어떻게 바람직하지 않은 굴절을 가져오게 하는가는 굳이 먼
곳에서 예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련>에서 작가가 의도한
주제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비록
출발점에서는 순수함의 핵을 분명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행하는 과정에서 굴곡을 만나게 되고 사사로운 이해득실이
개재되면서 예기치 않은 힘에 의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질주하게
되는 것이 메카니즘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일정한 규범이나
제재력을 필요로 하는 조직체 안에서는 더욱 그럴 소지가 풍부히
내재되어 있다. 조직체란 상호 의존적인 관계이면서도 또한 대칭적인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 속성인데 누적되어 온 불순한 에네르기가
극한점에 다다랐을 때에는 대칭적 속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
비극의 원천이다. 그럴 경우 대칭의 관계는 점점 첨예화되면서
동반자를 모으게 되고 가담한 동반자들은 힘을 부르게 된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힘은 제어하기 힘든 가속성을 얻으면서 이성의
통제로 부터 벗어난다. 이제는 정의가 힘이 아니고 힘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오해해서가 아니라 악인 줄 알면서 악에
헌신하는 지경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현실적 이해관계나
좌절감과 원한의 축적이 어떤 위기적 상황을 맞아 무책임한 연대책임
가운데 희생자를 만들어 내고 정당화시키면서 전율할 잔학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3. <시련>의 무대로 등장하는 세일럼의 마녀재판 소동은 극히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다. 인간의 본능을 거의
원천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청교도적 신권통치 하의 작은 마을
세일럼에서 어느날 밤 10대의 소녀들이 숲속에 모여 발가벗고 춤을
추며 주술을 외우고 혼령을 불러내는 금기된 놀이를 벌인다.
어른들에게 발각된 소녀들은 처벌이 두려워서 악마에 홀린양 거짓
연극을 하게 된다. 당시의 법도로는 소녀들이 벌인 그같은 놀이는
교수형에까지 처할 수 있는 엄청난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악마에
홀린양 가장하고 있는 소녀들을 본 주민들은 이성을 잃고 정말
마을에 악마가 존재한다고 믿어버린다. 청교도로서의 철저하게
억제된 규범속에 살면서 다른 한편 인디안과 황무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며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있어 축적된 원한과 좌절감, 현실적
이해관계가 폭발 직전에 다다라 있었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분출구를 만난 주민들은 마녀 잡아내기, 악마와 타협한 자에
대한 색출작업에 나선다. 판사가 불려오고 본격적인 재판이
개정된다. 집단의 광기가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아이들의 불길한 놀이에서 부터 시작되어 마녀 색출, 고발, 재판,
급기야는 교수형에 처하는 극한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평소에 품고 있던 욕망과 질시, 불만, 이기심등 악의 요소를 드러내
보인다. 악마를 색출해 죽여야 한다는 명분을 발견한 주민들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욕구불만을 악마와 대항해서 싸운다는 구실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낸다. 잔인하고 비열한 복수심의
정당화인 것이다.
처음에 희생되는 사람은 힘없고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걸인이거나
술주정뱅이와 같이 쓰레기같은 인간상으로 평소 마을의 골치거리들을
제단으로 보낸다. 그러나 점점 광기가 가열화 돼 가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개인적인 이권이나 원한에 얽힌 사람들이 고발되기
시작한다. 이쯤되면 이미 명분은 복수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천국을 지향하는 청교도의 사회는 지옥을 방불케 한다. 그러니
재판인들 공정하게 이루어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 저는 악마가 아닙니다. 저는 악마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 그렇다면 그대가 악마가 아니란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피의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다는 걸 증거해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재판, 이쯤
되면 누구라도 처형해 버릴 수 있는 길은 열려있고 절대권력의
칼자루를 흔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12명이 처형당했고 많은 수의 사형수들이 처형을
기다린다. 권력의 편에 서서 폭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공포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들을 구해내는 명분을 다시
날조하려 들지만, 역사상 위인이거나 범인이거나 정의의 편에 섰던
인간상들이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타협을 거부하고 정의로운
증인으로서 위엄있는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다.

4. 오늘의 시선으로 본다면 악마니 마녀니 하는 유령같은 얘기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허구로 치부해 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아서
밀러는 작품 서두의 '작가노트'에서 이 작품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역사상의 역할과 유사한, 어떤
경우에는 아주 똑같은 역할을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연극속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괴이하고 또 가장 무서운
사건들 중의 하나가 갖는 본질을 찾아내리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을 놓고 사실 여부를 따지고 드는 것은 무의미한 노고일지도
모른다. 흔히 사회극 작가로 알려진 아서 밀러가 <시련>을 쓴 의도
또한 그런데에 있지 않을 터이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남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그런 사건들이 어느 시대에나 얼마든지 자행되고
있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빌미가 되는
명분은 달라질지라도 크고 작은 집단의 폭거는 끊임없이 저질러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권력이 가지는 맹점이나 횡포, 그리고
가공할 그 결과에 대한 죄악상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정정이 불안한 남미에서는 이 작품이 독재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하나의 경고로서, 독재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상기(想起)로써 많이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시련>의 주인공 죤 푸록터처럼 아서 밀러도 매카시 선풍때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비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며
청문회에 불려나가 다른 혐의자의 이름 대기를 강요받기도 했다.
물론 그는 거절하고 1차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상고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아서 밀러가 이 작품을 쓴 의도 중의 한가지는 정의가 없는
힘의 전율성과 거대한 매카니즘 속에서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환기 및 경고일 것이며 양심에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이 작품에 등장한 주요한 인물들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아서 밀러가 작품끝에 밝혀 놓은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리스는 목사직에서 추방되었다.
에비게일은 창녀로 전락했다.
엘리자베드는 4년뒤 재혼했다.
사건이 있은지 20년 뒤 희생자들의 파문선언은 취소되었고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신권정치(神權政治)는 종막을 고했다.
- 연출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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