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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리아와의 국경분쟁

작성자EKOL백만|작성시간13.07.04|조회수1,76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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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아프리카 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위치

아프리카 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위치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지도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지도

개요

동 분쟁은 Yirga(이르가) 삼각지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발발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간의 갈등이다.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의 북부지역에 위치하여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2차 대전을 전후한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이 일시적으로 통치하였고, 1952년에는 미국 정부의 압력과 UN의 제안에 의해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하여 자치주가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에티오피아를 강권 통치해온 독재자 셀라시에 황제가 무력으로 강제 합병하였다. 합병 직후부터 에리트리아 주민들은 분리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반정부세력인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을 결성하고, 이웃 아랍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30년간에 걸친 무력투쟁을 개시하였다. 1974년 셀라시에(Selasie) 황제를 폐위시키고 정권을 획득한 멩기스투(Mengitsu)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의 군사지원을 이용해 EPLF에 대한 탄압을 일층 강화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정부군의 EPLF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대규모의 가뭄과 기아 문제의 발생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에티오피아군과의 내전은 1990년을 정점으로 격화되었으며, EPLF는 에티오피아 내 다른 지역 반군들과 반정부단체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과 연합하여 멩기스투 정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EPLF는 반멩기스투 연합전선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에리트리아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냉전 종식에 의해 후견인인 소련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멩기스투 정권이 반정부세력의 공격에 의해 1991년 5월 붕괴되면서, 에리트리아의 독립문제가 해결 국면을 맞이하였다.

1991년 5월 멩기스투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반정부세력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의 제나위(Zenawi) 의장을 원수로 한 신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1962년 이후 약 30년을 끌어온 독립투쟁이 종료하였다. 에리트리아는 1993년 4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99.8%의 찬성을 얻어 동년 5월 24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아프리카에서 53번째의 독립국이 되었다. 에리트리아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EPLF의 리더로서 아프리카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as Afwerki)가 당선되었다. 에리트리아의 독립은 에티오피아가 제나위 신정권을 확립함에 있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FPRDF),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 티그레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는 티그레인인민해방전선(TPLF) 등이 중심이 되어 구정권의 타도에 참여한 것에 대한 합의사항이었으며,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한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1993년 독립 이후 에리트리아는 혁명 동지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며 에티오피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에리트리아의 독립으로 내륙국가가 된 에티오피아는 무역의 대부분은 에리트리아의 항구인 아사브(Assab)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 간의 관계는 경제문제를 둘러싸고 점차 긴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 5월 6일 에리트리아는 독립한지 7년만에 에티오피아와의 경제마찰을 통해 갈등이 고조된 상태에서 독립 이후부터 소유권 분쟁이 있었던 국경 지역을 무력 점령함에 따라 새로운 갈등이 생성되었다. 분쟁의 발단이 된 양국간 경제마찰은 에리트리아가 1997년 11월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주권'을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리트리아가 독자화폐를 채택하자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가 무역결제를 '달러'로 할 것을 요구해 에티오피아의 경제에 50%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에리트리아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이에 에리트리아는 1998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의 북동부 티그레주에 위치한 4백㎢의 이르가(Yirga) 삼각지를 무력점령함으로서 본격적인 분쟁이 개시되었다.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는 1998년 6월 5일과 6일 미그 23 전투기를 동원하여 에리트리아의 수도인 아스마라(Asmara)의 국제공항과 공군 기지, 아사브항 등에 전격 공습을 강행했다. 에리트리아도 6월 5일 에티오피아 북부의 메켈레(Mekele) 공항을 폭격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방측은 양측이 잠정 휴전한 6월 6일 오후부터 13시간 동안 군용기와 프리깃함을 동원 자국민들을 인근 지부티로 소개하였다. 6월 9일 새벽 국경지대에서 전투가 재개되었으며, 6월 14일 양국은 미국의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공 폭격을 중단하자는 안을 받아들였고, 에리트리아는 미군과 UN군이 포함된 PKO 부대가 비무장지대를 관리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등 직접적인 전투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6월 17일에는 요르단, 이탈리아, 튀니지아, 콩고민주공화국, 네덜란드, OAU, 이집트가 중재에 나섰다.

7월에 양국은 보복전의 일환으로 자국 내 거주하는 상대방 국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경제 악화와 빈곤을 핑계로 자국 내 거주하고 있는 약 50만 명의 에리트리아인들에 대한 추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에티오피아 거주 에리트리아인들의 대부분은 1952년부터 에티오피아 정부가 실시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에리트리아의 경제 기반, 지식인 및 사업가들을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이주시킴에 따라, 현지에 정착하여 에티오피아의 국민으로 지내다가 에리트리아가 독립함에 따라 신분이 외국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의 일부는 에티오피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고 일부는 영주권을 보유하는 등 분쟁 직전인 1998년 5월까지는 에티오피아 국민으로 취급받았다. 에티오피아정부는 자국의 빈곤을 핑계로 에리트리아인들의 출국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수 천명이 에티오피아를 떠났고, 수 천명은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또한 3만명 이상의 에티오피아인들도 에리트리아의 항구에 억류되었다.

8월 1일 양국의 외무장관이 부루키나파소에서 각각 중재국가 그룹과 만났으나 성과는 없었다. UN 안보리와 미국은 양측에 즉각 휴전과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으나, 에티오피아가 자국의 영토에서 에리트리아가 철수하지 않는 한 협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에리트리아 또한 자신들은 자국의 영토 안에 있는 것이라면서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은 견지하고 있다.

양국간의 전투가 1999년 6월 9일 재개된 이래 에리트리아군 8,2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 또는 생포됐다고 에티오피아 정부가 6월 13일 발표하였다. 이에 맞서 에리트리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5일째 계속되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 2,3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였다. 인접국 사이인 양국은 지난해 5월 국경선 획정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래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2000년 8월 16일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지만 국경지역의 긴장감은 지속되었고, 2008년에 들어서야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양국 국경지역 평화유지군은 철수하였다. 2009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에 따라 양국은 각각 상대방에게 1억 7천 400만 달러와 1억 6천 300만 달러를 배상하였다. 이후 양국의 국경지역에서 직접적인 분쟁을 발생하고 있지 않으나, 적대적인 감정은 지속되고 있으며 상대국과 밀접한 국가와의 외교 단절, 다른 분쟁지역에서 반대편을 지지하는 등 여전히 부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분석

[의미 및 영향]

동 지역은 물류 운반으로서 세계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수에즈 운하와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아라비아반도를 끼고 있는 홍해의 입구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동 분쟁의 확대 여부는 수에즈 운하의 통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결국 세계 경제에 장해 요인이 될 수 있다.

양국은 30년 가까운 무장 반정부 투쟁을 벌여와 고도로 훈련이 되어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전면전이 지속될 경우 인명피해가 증가될 수 있으며, 또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주변국으로 피난할 경우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또한 동 분쟁에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이슬람화를 위해 주변국인 수단과 소말리아가 반군을 지원하고 있어 지역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여지도 다분히 존재한다.

특히 오랜 가뭄 등을 통해 아사자가 속출하여 대규모의 국제지원이 실시된 경험이 있고, 현재에도 경제난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 동 분쟁이 지속될 경우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도 실시될 가능성이 있다. 동 분쟁이 아국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산유국이 인접해 있는 홍해라는 지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와 아국의 수출 대상지역에의 수송 등 경제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추후 전망]

동 분쟁은 과거의 양국 간 역사적 경험에서도 보았듯이 단기간에는 종료하기 힘든 분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에리트리아의 독립으로 인해 내륙국이 된 에티오피아는 양국 관계가 현재와 같이 악화될 경우 홍해로의 진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외 교역에 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번 분쟁의 발단에서도 보았듯이 양국간의 관계 설정과 관련, 에리트리아는 독립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를 독립국으로 인정은 하지만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하는 상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분쟁이 일단락 되더라도 향후 양국간 분쟁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국경전은 '99년 2월부터 본격 재개되어 6∼7월까지 총 25만명의 병력과 항공기 등 중장비가 동원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수 만명이 사망하고 약 6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OAU, 미국, 이집트 등의 중재와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한 에티오피아의 전쟁결의로 에리트리아가 한발 물러선 국면이다.

2000년 5∼6월간의 에티오피아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에리트리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에티오피아는 한발에 의한 식량부족 등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보이는 상황에서 상호간의 영토분쟁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무력에 의한 점령 이후 OAU의 평화협정을 수락하여, 정전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유엔은 9월에 유엔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전쟁 승리를 기화로 에리트리아의 군사적 재침을 막기 위해, 에리트리아의 군사력 축소 등을 주장하였으며,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요구를 어느 수준에서 수용할 수 있는가가 평화유지의 최대한의 관건이 되었다.

지난 2009년 8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간 국경 분쟁과 관련해 각각 상대방에 대해 배상 판결을 내렸으며, 양국이 이를 수용키로 한 이후 양국의 국경 분쟁은 기타 다른 충돌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2011년에도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2011년 현재, 양국 모두 계속되는 가뭄으로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 있어 생존에 관한 문제에 더욱 치중해야할 상황이며, 국제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지

일자 주요내용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됨

1952년

영국이 통치개시 후, 미국정부 압력. UN 제안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 자치주로 편입

1961년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 결성, 무력투쟁 개시

1962년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Selasie) 황제가 에리트리아를 강제 합병

1989년

EPLF, 반정부 연합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참여

1991년

에티오피아의 좌파 멩기스투(Mengitsu) 정권 붕괴, 에리트리아 독립기반 마련

1993년 5월

에리트리아 독립

1997년 9월

에티오피아 제나위(Zenawi) 수상, 에리트리아 방문 관계 회복 협의, 결렬됨

1997년 11월

에리트리아 경제주권 선언, 에티오피아 달러화 결재 개시로 긴장 증대

1998년 5월 6일

에리트리아군, 이르가(Yirga) 삼각지를 점령

1998년 5월 12일

티그레(Tigre,Tigray)주 바드메(Badme) 지역 점령

1998년 6월 1일

에리트리아가 아쌈(Assam)항에 군대 진주. 에리트리아는 메켈레(Mekele) 북부 알리트나(Alitena)를 공격. 미국과 르완다는 중재 노력 계속(르완다의 투치족은 종족상 에티오피아와 관련). 동 분쟁에서 최대의 피해국은 분쟁 양 당사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하니쉬(Hanish) 섬을 점령하려는 에리트리아를 지원해 옴

1998년 6월 2일

아이가(Aiga), 인달게다(Indalgeda), 알리트나(Alitena) 격전에서 1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 교황 바울 2세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가 지도자로 있는 양국에 대해 정전을 촉구

1998년 6월 3일

에티오피아는 남부지역 암베세트 겔레바(Ambesete Geleba)를 공격, 에리트리아는 아이가 재탈환에 실패하는 등 양군 간 격전 지속. 미국은 평화봉사단의 철수 개시, 에리트리아의 철군과 국경협상 재개를 제시한 르완다의 평화안을 지지. 에리트리아는 이를 거부하면서 자국영토 고수를 주장,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영유권 주장을 거부

1998년 6월 4일

에티오피아는 미-르완다 평화안 수락. 국경논쟁에 군사력 사용은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EU의 입장과 대조적으로 OAU는 양국에 평화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요구

1998년 6월 5일~6일

에티오피아군 에리트리아 수도(아스마라-Asmara)와 공항, 항만에 대해 수회에 걸쳐 전격 보복 공습(5일 에리트리아 공격으로 에티오피아군 5명 사망)

1998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국경부근에서 공습을 개시하였다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이집트에 중재를 요청. 6월 10일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담에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에 대표단 파견할 것을 결정. 전쟁 확산을 우려하는 지부티는 국경지역에 전군을 배치

1998년 6월 14일

에리트리아는 비무장 국경지대를 통제하기 위해 미군과 UN군을 포함한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요청.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수뇌급 대표단은 양국을 방문 분쟁 조정에 진전 없음을 발표. 이유는 국경지역으로부터 양국군의 철수를 포함한 미국과 르완다가 제시한 '4개 항목 제안'에 대해 에리트리아가 거부

1998년 6월 26일

UN 안보리는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비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수단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 6월 11일 이후 전투 소강 상태, 3만 명에 이르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에리트리아의 아사브(Assab)항에 억류. 에리트리아 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에티오피아는 지부티에 자유무역지대 설치.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 전투기 구매 요청(이스라엘은 결정 보류)

1998년 7월

양국 주재 상대방 국민 추방

1998년 8월 1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주재 외국 공관은 부루키나파소에서 협력단국(Contact Group Nation)과 각각 회동하였으나, 성과 무

1998년 8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린 중재회담에서 국경 긴장 해소에 실패. 에리트리아는 5∼6월에 발생한 에티오피아와의 전투에서 생포한 71명의 에티오피아군을 석방. 에티오피아는 UN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30명의 에리트리아인의 출국을 명령

1998년 12월 6월~7월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양국 간 국경 분쟁 이후 총 39,075명의 에티오피아인을 강제 추방하였다고 발표. 미국은 레이크 특사를 이 지역에 3번째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OAU는 양국의 자제력 발휘를 요구

1999년 1월 5일

에티오피아는 제3국에 의해 에리트리아 군이 국경지대에서 철수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자국군은 정당한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거부

1999년 1월 24일

미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에 대해 철수하도록 통고, 주요 인사를 제외한 민간인 철수 개시

1999년 1월 29일

OAU와 UN 새로운 전쟁 발발 방지를 위해 경쟁

1999년 2월 4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군의 기동을 제압하기 위해 아디그라(Adigrat)에 소재한 연료창을 폭격, 실패

1999년 2월 6일

양국군간 대격전 재발

1999년 2월 7일

에티오피아의 제2차 에리트리아 중부지역에 대한 공격 개시

1999년 2월 9일

에리트리아는 1,500명의 에티오피아인을 사살했다고 발표. 이집트, 미국, UN안보리는 정전을 요구

1999년 2월 10일

UN안보리 교전상태에 있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 양국에 대한 회원국의 무기 금수를 만장일치로 채택

1999년 2월 1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OAU가 제시한 평화안을 수용하도록 국제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UN이 에티오피아를 침략자로 보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주장.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자국 항구를 통한 전쟁물자의 반임을 불허한다고 발표

1999년 2월 12일

에티오피아는 전쟁 재발 이후 7,000명의 에리트리아군들이 사망 혹은 부상하였다고 발표

1999년 2월 14일~16일

양국은 각각 포격 지속

1999년 2월 20일

에리트리아는 정전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선에 대한 국제감시가 필요하다고 시사

1999년 2월 21일

에티오피아 정부군은 에리트리아의 아사브 공항을 폭격, 공적을 거두었다고 발표. 2월 6일 분쟁 재연 후 공항 폭격은 처음

1999년 2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불가리아인 용병이 에티오피아군에 고용되어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고 발표

1999년 2월 27일

에리트리아 대통령은 아난 UN사무총장과 안보리 의장에 서한을 보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평화안 수락 의사 표명

1999년 2월 28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 점령지(바드메-Badme) 탈환 전투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

1999년 3월 3일

에티오피아는 정전협상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

1999년 3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OAU가 제시한 평화안에서 요구한 철군지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
* 에티오피아는 정전과 협상 개시 이전에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전 영토에서 에리트리아군의 철수를 주장

1999년 3월 14일

에티오피아군은 일라자모(Ilazamo) 평원에 대한 공격을 개시, 적어도 10,000명의 에리트리아인을 사살하고 57대의 탱크를 파괴, 2대의 Mig 23, Mi‐35 소총을 노획했다고 주장. 에티오피아는 자국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에리트리아는 무모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 양국 간 전투는 서부전선지역인 메라브(Merab) 강을 따라 3월 17∼18일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도

1999년 3월 29일

전투는 다소 진정. 양국은 상대국이 무기를 수입하고 민간인을 추방하고 있다고 주장. OAU는 분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중재 노력 지속
* 양국 간 전선을 따라 산발적 전투 지속. 미국은 자국민의 에티오피아 여행 자제 촉구, 핵심 요원을 제외한 대사관 직원의 귀국 허용. UN 사절단 산훈(Sanhoun)은 정전 방법 모색

1999년 4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에티오피아영토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

1999년 4월 16일

에티오피아 공군기는 중부전선의 목표물을 폭격. 에티오피아 공군기, 사와(Sawa)에 있는 에리트리아 훈련소를 폭격

1999년 4월 28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항공기가 폭격을 개시했다고 발표

1999년 5월 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간 제2차 연도 전투 개시. 이집트의 중재 무산

1999년 5월 15일~17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군용기가 5월 15일 잘라 안베사(Zala Anbesa)와 16일에는 마사와(Masawa)를 폭격, 17일에는 포병부대가 비비나(Bibina)를 공격했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분쟁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 대화나 정전은 있을 수 없으며, 에리트리아가 자발적으로 철군하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선언

1999년 6월 9일

국경선 획정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군간의 전투 재개, 에리트리아군 8,2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 또는 생포(에티오피아 정부 발표). 이에 맞서 에리트리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5일째 계속되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 2,3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 인접국 사이인 양국은 지난해 5월 국경선 획정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래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음. 에리트리아는 지난 62년 에티오피아에 합병된 이래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끝에 지난 93년 독립을 쟁취

1999년 7월 15일

소규모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에 진군, 파솔레이(Farsoley) 마을을 점령. 그러나 소말리아 지방군은 무 대응

1999년 7월 16일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는 효과적인 정전 개시일, 평화유지군 설치 장소 등 대화를 통해 평화 조건 설정할 것에 동의

1999년 7월 17일

에티오피아군과 OLF(Oromo Liberation Front) 및 ONLF 간에 2시간여에 걸친 전투 발생. 반군들은 정부군 500명을 사살하고 200명의 정부군이 부상당했다고 주장

1999년 7월 2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평화조건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음

1999년 7월 30일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정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함. 국경지역에서 전투 지속, 양측 모두 낮은 수준이긴 하나 국경 경계 계속

1999년 8월 12일

최근 3개월 동안 에티오피아군은 소말리아를 이탈한 OLF와 격전, OLF군 700명을 사살하고 300명이상을 생포.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오로모(Oromo)지역 독립 투쟁 단체인 OLF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8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최근 1주일간 OLF와의 전투에서 OLF의 리더인 보레다 비루(Boreda Birru)를 사살하고 고위 간부들을 생포함으로써 동 독립단체는 붕괴되었다고 주장

1999년 8월 24일~5일

소말리아 민족전선(Somali Nationa Front: SNF)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역 소재 에티오피아 용병 수백명이 루크(Luuq)와 돌로우(Dolow)시에 잠입하였다고 발표

1999년 8월 26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도록 강조

1999년 8월 28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국경지역 인근의 잘라 안베사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9월 2일

에티오피아는 잘라 안베사 전선내의 친 케렌(Chin Keren)에 있던 에티오피아인들을 공격했다고 비난

1999년 9월 6일

영토의 격전지인 잘라 안베사 지역에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접전이 보도됨

1999년 9월 7일

소말리아 소식통은 RRA(Somali Rahanwein Army)와 DSAL(Digil Salvation Army)의 지원을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군이 샤벨레(Shabelle)의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를 공격했다고 보도. RRA와 DSAL은 모가디쉬에 기지를 둔 후세인 모하메드 아디드(Hussein Mohamed Aidid) 장군에 반대하는 세력

1999년 9월 10일

에리트리아군은 1,000㎞에 이르는 국경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수개 도시에 대한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에 대비 고도의 경계태세 유지

1999년 9월 13일

에티오피아정부는 에티오피아와의 에리트리아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개전 이전의 국경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영토분쟁의 대상지역은 잘라 안베사-아가(Zala Anbesa‐Aiga), 에갈라(Egala), 바두바두(Badu‐Badu) 등임

1999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는 쿠바와 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고 발표. 쿠바군은 에티오피아 막시스트 멩기스투 체제를 지원 중

1999년 9월 28일

미 외교 당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표

1999년 10월 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여전히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에티오피아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에리트리아와의 전쟁 협정 서명을 거부

1999년 10월 5일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지역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에리트리아의 주장을 부정

1999년 10월 24일

UN 고등 난민위원회는 25만 명이 동원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전쟁에서 60,000명의 난민 등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

1999년 10월 25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상호 비방과 침략행동 중지에 노력. 에티오피아는 65,000명의 에티오피아내 에리트리아 노동자를 추방하고 자국내 항만 창고에서 에티오피아인 소유 재산 1억 3,000만 달러어치를 약탈했다고 비난한 바 있음(에리트리아는 이를 부인)

1999년 10월 30일

에티오피아는 자국군이 10월 23일과 24일 제베르트(Jerbert) 강 근처에서 공격을 감행해 오던 에리트리아군을 격퇴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300명의 에리트리아군을 사살하였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이같은 에티오피아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에티오피아는 1998년 5월에 발효된 전쟁종식을 위한 중재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에리트리아가 전투를 유발했다고 있다고 주장. OAU(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가 제시한 평화계획에 대해,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어떠한 평화협정도 에리트리안인을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1999년 11월 8일

프랑스는 에리트리아가 프랑스군 2,5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지부티(Djibouti)를 침략하려하고 있다고 우려 표명. 지부티는 내륙국 에티오피아에 해안접안을 위한 통과권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리트리아는 지부티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FRUD(Front for the Restoration of Unity and Democracy) 반군을 지원하고 있음

1999년 11월 9일

에티오피아의 반정부 세력들은 2년 전부터 새로운 언어법의 채택을 요구하고 있음

1999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 정부 소식통은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간을 운항중인 기차를 파괴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군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

1999년 11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외국의 반군세력의 공격에 공동대처하며,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양국국민의 보호를 상호 지원한다는 안보협정에 서명

1999년 12월 3일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ritria Liberation Front)의 게릴라들은 12월초 1주일 사이에 26명의 에리트리아군 52사단 소속요원을 포함하여 총 56명의 에리트리아 정부군들이 투항해왔다고 발표

1999년 12월 20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 국적을 가진 17명의 아파즈(Afars)족을 살해했다고 비난. 이들 아파즈족들은 보킬라(Bokila)근교에서 살해되었음

1999년 12월 27일

OAU, 평화계획안에 대한 에리트리아의 우려(충돌국경선에의 평화유지군 배치 문제 등) 검토

2000년 1월 18일

에티오피아는 수단과 140㎞에 이르는 고속도로 개방협정에 서명하였다고 발표. 동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에티오피아는 수단항을 통해 물자를 신속하게 거래할 수 있다고 함

2000년 1월 21일

평화 및 인권 네트워크(The Peace and Human Rights Network)은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와 군수물자의 제공을 금지한다는 UN헌장 제733조를 위배하고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내 무사 수디 얄라호우(Musa Sudi Yalahow)가 이끄는 부족 군대인 아바갈(Abagal)에 물자와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이를 부인

2000년 1월 22일

에리트리아와 수단간 국경 재개방. 양국은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수단이 에리트리아 항만에의 접근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음(FYEO 분석)

2000년 2월 18일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의 침입에 대비, 전군에 비상경계령

2000년 2월 23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아사브(Assab)항(港) 부근의 부리에(Burie) 전선에 1개여단(3천명)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 이로써 8개월간의 정전상태가 깨어짐

2000년 4월 8일

양국간의 국경분쟁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로 지원되는 물품의 조루트를 제공하겠다고 발표

2000년 4월 16일

에리트리아, 18세∼40세 사이의 남자에 대한 징집령 발표

2000년 4월 2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이 알제리에서 개최됨

2000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가 잘라 안베사(Zala Anbesa) 전선, 바드메(Badme) 지역에서 전면공격 개시

2000년 5월 15일

에티오피아가 메레브‐세딧(Mereb‐Sedit) 강을 건너서 진격. 남동지역에서는 다스(Das), 바렌투(Barentu) 지역으로 진격

2000년 5월 17일

에티오피아군이 다스와 바렌투지역에서 에리트리아군을 포위

2000년 5월 18일

에티오피아군이 바렌투, 다스를 점령

2000년 5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에르트리아와 OAU에게 평화회담을 가질 의사가 있음을 표명. 에티오피아는 팽창정책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중부전선의 잘라 안베사지역, 동부지역의 부리에지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힘. 에리트리아는 멘데페라(Mendefera)로부터 50km 떨어진 군사적 요충지 마이디마(Maidima)도 포기

2000년 5월 20일

에티오피아 서부지역에서도 공격 개시

2000년 5월 23일

잘라안베사‐에갈라(Egala)전선에서 치열한 전투. 에리트리아는 "조건없이" 평화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아스마라, 아싸브를 점령할 의도는 없으며, 에티오피아가 바렌투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에리트리아는 잘라안베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

2000년 5월 25일

에리트리아는 1998년의 전쟁 개시 이전의 상태로 군대를 철수할 의사를 표명

2000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와의 평화교섭 재개에 동의.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힘. 에티오피아군은 세나페(Senafe) 점령

2000년 6월 6일

테세네이(Teseney)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 에티오피아는 1개사단과 2개여단을 투입

2000년 6월 9일

에티오피아 수상(Meles Zenawi), 에리트리아가 재침하지 않도록 분쟁지대에 대한 평화유지군 개입 요청

2000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는 부리에 전선(에리트리아는 아싸브 전선이라고 부름)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다고 발표. 또한 테세네이 전선에서도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중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를 요청하는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1일

알제리에서의 정전협상이 진전을 보임. OAU의 지휘하에 유엔이 평화유지활동을 하는 안을 포함한 평화계획이 검토되고 있음

2000년 6월 14일

에티오피아가 OAU의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알제리에서 평화협정에 조인. 정전협정의 내용은 ①1998년 5월 6일 이전 에티오피아 영역이 아닌 지역으로부터 에티오피아가 철수, ② 1000㎞에 달하는 국경이 정해질 때까지 평화유지군이 "일시적 안전보장지대"(에리트리아 영내의 25㎞의 완충지대)에 전개, ③ 평화유지군이 전개된 뒤 2주 후까지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리아 점령지대에 체재 가능, ④ 이후 평화협정의 체결을 위해, 식민지시대의 조약, 국제법 등에 기반하여 국경선을 획정지을 예정

2000년 6월 19일

에티오피아군 테세네이 지역에서 철수 시작

2000년 6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정전협정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려 한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의 규모를 감축할 것을 요구

2000년 7월 13일

워싱턴에서 양국간의 평화협상 개시

2000년 7월 31일

유엔 안보리는 100명의 국경감시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

2000년 9월 11일

유엔안보리는 4,200명의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정(UNMEE: United Nations Mission in Ethiopia and Eritrea)

2000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간의 전투로 총 7만명 사망하고 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

2000년 11월 27일

네덜란드가 UNMEE에 700명을 파병하는 데 동의

2002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의 최악의 가뭄에 대한 원조 노력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기로 약속1)

2004년 11월 25일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는 의회에서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의 에리트리아와의 국경분쟁에 대한 중재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에티오피아 5개안'이 표결을 통해 통과된 직후 행한 연설에서 "원칙적으로 에리트리아와의 국경 분쟁에 대한 국제적 중재 결정을 수용할 것이며 에리트리아와의 협상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힘. 또한 5개안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 요원들이 에티오피아 국경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같은 활동에 대한 자국 부담 경비도 지급할 것임을 천명2)

2005년 10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전쟁 재발 가능성을 경고하고 에리트리아에 대해 유엔 평화 유지군의 헬리콥터 비행금지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3)

2005년 10월 10일

유엔대표부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지대를 감시하는 평화유지군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림

2005년 11월 3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최근 국경지대에 병력을 증파하고 부대를 전진배치하는 등 국경지대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지난 2000년 종식된 양국 간의 국경분쟁이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음4)

2005년 11월 4일

아프리카연합(AU)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국경 부근의 군사적 행동으로 야기된 긴장이 자칫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며 양국의 자제를 촉구5)

2005년 12월 23일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부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에티오피아 군 병력이 국경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밝힘6)

2007년 2월 1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지난달 29‐30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를 겨냥한 에리트리아의 폭탄공격 음모를 분쇄했다고 밝힘7)8)

2007년 4월 25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동부 유전에서 반군 공격으로 74명이 피살된 것과 관련해 에리트리아 정부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비난. 이에 대해 에리트리아 정부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호전적 행위를 취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

2008년 7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대에 배치된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기로 만장일치로 의결9)

2009년 8월 18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지난 1998년부터 2년간 이어진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 분쟁과 관련해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에 대해 각각 1억7천 400만 달러, 1억 6천 300만 달러를 각각 상대방에 배상하라고 판결.10)11) 양국은 이번 판결 내용을 수용키로 함

2011년

2000년 6월 18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의해 배상 판결이 난후 별다른 직접적인 분쟁상황은 있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감정)를 유지하고 있음.

2012년 3월 15일

Shimelis Kemald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자국군이 에리트레아 국경을 16-18km 가량 진격해 에리트레아의 3개 군기지를 공격했다고 발표함. Kemald 대변인은 에리트레아가 동 군사시설에서 에티오피아 반군을 양성하고 있어 사전 공격하였다고 발표. 특히 최근 아파르 지역에서 외국인 관광객 피살 등 에티오피아 내에서 에리트레아가 자행한 일련의 테러 행위가 금번 군사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함. 이에 에리트레아 외교부는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고 발표하는 등 금번 주재국측 도발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시사함. 에리트레아 정부는 또한 에티오피아가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일부 영토에 대한 불법 점령 및 △에티오피아 국내 문제 등으로 부터 주재국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금번 도발을 자행하였다고 주장함

기타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구분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인구

5900만 명

360만 명

면적

113만 2천㎢

11만 7천㎢

병력

12만 명

3만 5천 명

군사비

1억 2700만 $

8천 만 $

※ 에티오피아 : 인구 5500만, 87개 종족, 290개 언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병력 12만명(10만은 육군)
※ 에리트리아 : 인구 350만, 9개 종족, 2개 언어, 병력 46,000명, 1889년 이태리로부터 독립, 1952년 에티오피아와 연합, 1962년 에티오피아에 의해 영토 합병, 1993년 독립

최종 업데이트

  • 2012년 9월

각주

  1. 1) 에리트레아의 외무장관은 "정부에 의해 발생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난한 국민들에게 물을 생각은 없다"고 밝힘.
  2. 2) 그러나 에리트리아는 한 정부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을 통해 이를 '하찮은 시도'라고 평가절하하면서 국경위원회 결정에 따른 국경선 확정과 에티오피아가 점령하고 있는 자국 영토 반환을 촉구.
  3. 3) 현재 양국 국경 지대에는 3천200명 병력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 안보상황을 점검하고 있음.
  4. 4) 유엔평화유지군 현지사령관은 폭 25㎞, 길이 1천㎞에 이르는 국경 완충지대를 경비하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각각 국경지대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자칫 오판으로 인한 전쟁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경고
  5. 5) 유엔평화유지군은 최근 2주 동안 아직 선이 그어지지 않은 1천km의 양국 국경 부근에서 탱크와 대공 미사일, 군대 등과 관련된 군사적 움직임을 목격했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지난달 유엔평화유지군의 자국 영공 내 비행을 금지했으며 이에 따라 유엔은 국경지역에 대한 모니터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됨. 에리트리아의 이러한 움직임은 2000년 12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종결하면서 맺은 평화협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양국은 평화협정을 통해 '중립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국경선을 확정키로 합의했지만, 위원회가 최근 접경지역에 소재한 바드메 마을이 사실상 에리트리아에 귀속된다고 결정하자 에티오피아가 평화협정을 거부.
  6. 6) 이번 철수는 유엔의 11월 결의안에 따른 것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난달 결의안을 통해 에티오피아가 지난해 12월 국경에 배치한 7개 사단을 철수하는 한편 에리트리아는 유엔 평화유지군의 헬리콥터 정찰 금지 조처 등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경고한 바 있음.
  7. 7) 에티오피아 경찰은 성명을 내고 "정상회의 직전에 테러공격 계획을 주도한 이들을 체포했다"고 밝혔으나 체포된 용의자 수와 신원은 밝히지 않음. 또한 에티오피아 정부의 발표처럼 에리트리아가 이번 사건에 개입됐는지 여부도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음.
  8. 8) 에리트리아는 30년간의 독립투쟁 끝에 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했으며, 양국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싸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쟁을 벌이는 등 반목을 거듭.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as Afwerki) 에리트리아 대통령은 AU 정상회의가 에티오피아에서 열린다는 이유로 불참.
  9. 9) 이에 따라 두 나라 간 국경분쟁 차단 임무를 띠고 파병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유엔 평화유지군(UNMEE)이 8년 만에 활동을 접게 됨. UNMEE는 1천㎞에 이르는 완충지대에 한때 1,700명이 배치되었음. 지난 1993년 에리트리아가 30년에 걸친 무장투쟁 끝에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1998년부터 2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양측에서 7만 명이 사망.
  10. 10) PCA는 양국이 전쟁 기간에 상대방에 가한 재산 피해와 부녀자 강간, 약탈 등 반인륜 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물어 이같이 판결.
  11. 11) 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에리트리아는 1998년 접경지대인 바드메(Badme)에 주둔 중인 에티오피아군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에 나섰으며, 이후 2000년 말까지 10만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전쟁이 벌어진 뒤 평화협정이 체결됨.
각주더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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