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정태성 목사
제목: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말씀: 로마서 10장 13-17절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 믿는 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 근거를 위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부른 것에 두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했기에 자신도 주의 이름을 부른 자이기에 예수를 믿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예수를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반드시 그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려거든 반드시 어떠한 하나의 전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고 예수를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전제란 어떠한 경우라도 죄에 대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 죄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자기 죄를 알지 못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자,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 죄를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의 회개가 곧 주의 이름을 부르는 대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대로 주의 이름을 불러 예수를 믿는 것, 즉 자기 죄를 알아 회개하는 일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16절>: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바울은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동족 이스라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로 말미암아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들이 자기 죄를 알지 못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만 그런 것인가? 이들만 유독 자기 죄를 몰라 회개하지 못하는 민족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민족도 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을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하여 회개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불러 예수를 믿는 것, 즉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는 일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아무도 믿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을 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복음에 순종하여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까?
인간이 자기 죄를 회개할 수 없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죄의 특성 때문입니다. 죄의 특성이란? 율법을 어기고 지키고에 대한 문제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만 죄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죄의 특성에서 그 죄의 특성이란 아담의 범죄 이후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특성에서 죄가 인간에게 하는 일은 인간이 죄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하며 도무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임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 수 없게 한다는 말은 곧 아담에 원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권능에서 죄의 권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인간을 유혹하여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능은 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원죄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고 죄의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식이 없이 죄인임을 알지 못한 상태를 일컬어 사망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사망한 상태가 된 그 상태가 바로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원죄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의식을 가지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범죄 한 죄인임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데 바로 이 상태를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권능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하여 죄인으로 살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7장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그것은 탐심입니다. 위 말씀을 보면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에 온갖 탐심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인간 마음속에 탐심을 심어놓고 죄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심은 어느 날 인간에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인해서 탐심이 발생한 것이 아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과 동시에 인간에게 들어온 죄의 현상입니다. 탐심은 인간에 죄의 본성과 죄의 현상입니다.
탐심은 아담의 타락한 죄의 본성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죄의 본성인 이 탐심이 마치 혈관에 혈액으로 우리 마음 곳곳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 상태가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죄의 권능 때문입니다.
죄의 권능인 이 탐심이 모든 인간에게 자신이 원죄의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하고 죄의식이 없는 아담의 상태로 살게 만든 핵심 요인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인지 모르고 아담에 원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특징 때문에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실효성이 없는 헛말이 되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의 말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죄의식을 알고 죄인 임을 깨달아 회개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자가 곧 예수의 이름을 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인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4-9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 곧 죄의식을 알고 죄인 임을 깨달아 회개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에서 벗어 나는 길은 다른 길은 없고 오직 은혜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서 배제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행위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기독교 신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매우 독특한 특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열심을 배제합니다. 배제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적하는 범죄에 가깝습니다. 행위가 깊을수록 은혜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자들의 열심, 곧 행위의 초점은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중에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에 은혜의 기원과 출발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부터 입니다. 이 속량이 은혜의 기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나오는 행위란 자기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량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은 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속량에 대한 찬양은 인간의 노래가 아닌 속량에 대한 증거, 곧 복음 증거입니다. 찬양은 속량을 복음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불가능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행위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속량하심을 복음으로 증거 하는 찬양 행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행위는 반드시 그 목표가 그리스도의 값없는 속량에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