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1일 주일오전설교: 이사야 9장 1-7절 - 큰빛으로 오신 평강의 왕

작성자민들레홀씨|작성시간26.06.22|조회수26 목록 댓글 0

<이사야 9장 1-7>: 큰빚으로 오신 평강의 왕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를 읽어보면 유독히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과 그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하여 맥락이 없이 교차적으로 증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사야를 읽다 보면 이사야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죄에 대한 심판인가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변덕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심판과 구원은 죄로부터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것을 표명하면서 그 심판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증거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메시아입니다이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죄에 대한 심판과 죄로부터의 구원을 교차적으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이사야의 이러한 전체적 내용을 표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징조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그것이 이사야의 이름과 이사야의 두 아들의 이름입니다.

 

 
<이사야 8장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사야는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들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증거 하고자 하는 계시를 이름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열왕기하 20장 9>: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징조란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임한 징표입니다따라서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임한 징표가 이사야의 이름과 이사야의 두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름의 뜻이 무엇이기에 징조가 되는 것입니까?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그렇다면 이사야의 두 아들의 이름과 그 뜻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7장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 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뜻은각주 1)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이 말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8장 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의 뜻은 각주 1) ‘노략이 속함’이라는 뜻입니다노략이 속이 임하리라는 것입니다이 말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임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곧 이들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 이름 곧 메세지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한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은 자가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이사야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으로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이 일을 응하게 하실 메시아임마누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66장을 꽉 압축하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한 것인데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은 자가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이사야의 전체적 흐름이요내용이며 이사야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9장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어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그렇다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자는 누구입니까그것은 <사 9:1>에서 언급하고 있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입니다.

 

 
<이사야 9장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흑암의 땅으로사망이 그늘진 땅으로멸시를 당한 땅으로 언급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지역은 갈리리 호수 지역입니다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 당했습니다그렇다면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했다면 북이스라엘 속해 있던 스불론과 납달리의 땅도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해 흑암의 땅이며 고통받고 멸시를 받은 것입니다.
 
특히 이 갈릴리 지역들은 사사시대 이래로 주변 이방 나라의 침략으로 시달림을 받아 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이방 색채가 짙었으며 거듭된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항상 압제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대하16:4, 왕하15:29).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도 받게 되었습니다(1:46, 7:41,52, 2:7). 그런데 이런 일을 여호와께서 하셨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후에는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길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그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9장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그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친 것입니다빛이 없었던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큰 빛이 온 것이고 그 빛이 비추어 추수의 즐거움과 전쟁의 승리에서 얻은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 같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영화롭게 하셨는가곧 빛이 비치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사 9:7>은 이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여호와의 열심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하고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을 비추어 영화롭게 하시는 것 곧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여호와의 열심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사야 9장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4>은 그 방식을 ‘미디안의 날’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미디안의 날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디안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미디안의 날이 어떤 날이기에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다는 것입니까?
 
미디안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가 누구입니까바로 기드온입니다기독교인들에게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알려진 이야기가 미디안의 날입니다미디안의 날이란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의 수많은 군대를 물리친 날입니다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사사기 6-8>의 미디안의 날을 비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날과 같이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미디안에서의 구원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고통과 흑암과 멸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그 구원의 방식이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그 여호와의 열심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날과 같이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디안의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침략으로 궁핍이 심하게 되었습니다그 때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사로 세워진 자가 바로 기드온입니다그런데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사 기드온은 겁쟁이였습니다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수차례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한 자가 기드온입니다그래서 몇 번의 표징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그 표징을 보고 전쟁에 겨우 나간 자가 기드온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을 위하여 많은 군대를 소집했으나 기드온에게 주어진 군대는 고작 300명뿐입니다그러나 미디안의 군대는 메뚜기 떼와 같고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히 많아 해변의 모래 같다고 말합니다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께서 작은 숫자 300명만 선택하시고 모두 돌아가게 하십니다그런데 더 큰 문제는 기드온과 300명에게는 무기도 없습니다무기라고 주어진 것은 고작 나팔과 횃불과 빈 항아리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미디안 진영에 들어가서 한 일은 고작 나팔을 불며 손에 있던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면서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고함을 지르니 적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서로 공격하면서 죽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디안의 날이란 기드온과 300명의 열심으로 미디안을 물리친 날이 아닙니다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날 곧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 날이 미디안의 날입니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을 미디안의 날로 비유한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어둠의 땅에 빛을 비추어 구원하시는 것이 미디안의 날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많은 군대가 아닌 겁쟁이 기드온과 300명이라는 적은 숫자를 택하셨습니다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겁쟁이 기드온과 무기 하나 없는 300명을 선택하신  그 이유에 대하여 <삿 7:2>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사기 7장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하여 겁쟁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적은 숫자 300명을 택하시며무기 하나 없이 전쟁을 하게 하신 그 이유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은 곧 하나님의 열심에 인간의 열심을 완전히 배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미디안의 날과 같게 하셨다는 그 의도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열심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만 구원을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인간의 열심을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그 방식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열심입니다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그 열심히 장착된 자로 결코 스스로 자신의 열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입니다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이스라엘입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고 하나님의 열심을 많은 표징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열심을 내세우며 자기 열심으로 산 자들입니다.
 
<신명기 8장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신명기 9장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이스라엘 뿐입니까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이방 나라 앗수르 왕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사야 10장 13-14>: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비단 이것이 이스라엘과 앗수르 왕만의 열심입니까우리도 이 열심을 나의 열심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내 공의로움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모든 일을 행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열심이었습니다.
 
나의 열심이 재물을 얻는 것에 있고땅을 차지하는 것에 있고이 모든 것얻고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은 나의 공의로움으로 발생한 복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대부분의 기독인들입니다그리고 우리 가까이에서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열심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인간의 열심’이란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이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어둠으로 사망의 그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람은 누구나 다 아담의 범죄 이후 자기 의가 장착되어 어둠을 발산하며 사는 자들입니다그래서 부단히 나타나는 그 현상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내 공의로움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모든 일을 행했다’하며 나의 열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열심에는 그 결국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족속은 확실히 알라고 말합니다무엇을 알라는 것입니까‘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너희 이스라엘 온 집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라는 것입니다이들의 열심의 그 결국은 자기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그 열심이 무엇입니까하나님에 대한 열심 곧 율법에 대한 열심입니다율법에 대한 열심 곧 율법으로 말미암은 그 의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며 자기들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자들입니다이런 자들의 원함은 메시아가 오면 미디안의 날과 같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적을 멸하여 버리는 민족의 해방을 이루어 줄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며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니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그 원함이 무엇입니까힘입니다메시아가 오면 미디안과 같이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의 속박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우리에게 힘을 주는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어떤 메시아를 원합니까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세상의 힘을 주는 메시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이것을 원하는 것이 메시아의 상징인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죄에서의 구원을 주는 메시아는 기본이고그 외에 가난에서의 구원질병에서의 구원모든 결핍에서의 구원하시는 힘 있는 메시아를 믿고 있습니다그래서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종교 생활을 아주 열심히 합니다종교 생활의 목적은 오직 나의 공의로움이 세상에서 이길 힘을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인들의 열심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지금도 자신의 원함을 위하여 교회에서 계속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어찌 이런 예수를 죽이고 있는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자기 원함을 위하여 하나님과 흥정을 하고그것에 대하여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자기들의 원함에 대하여 갚을 치르는 곳이 교회입니다오죽하면 교회를 사단의 회당(3:9)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열심은 인간의 열심을 배제하십니다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 인간의 열심이 오히려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인간의 열심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를 죽인 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9장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것은 한 아기로부터입니다용사가 아닌 슈퍼맨이 아닌 한 아기로 태어난 한 아들로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 7:14>에서 임마누엘이라는 한 아이의 출생이 유다에서 구원의 표징이 되었듯이 한 아기가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한 아기는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흑암에 행하던 백성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비친 큰 빛으로 표현하고 있으며그 큰 빛을 평강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이 평강의 왕을 통하여 미디안의 날과 같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빛으로 오신 평강의 왕은 어떻게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시는 것입니까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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