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올리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진리는 우리의 견해나 교파적 교리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 진리가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고 그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 진리는 우리를 끝내는 영생으로 이끌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은 하나님앞에 너무도 큰 죄라 생각한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내가 재림교회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34년동안 장로교인이었다. 재림교인이 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실 재림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다. 인정하지 안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떠나온 장로교를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들에게 밝은 빛이 비추어졌으면 좋겠다. 종교개혁 후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만들어낸 '제수이트' 이 성공적인(?) 활동으로 종교개혁자들의 피로 얻어낸 성경의 진리들이 많이 왜곡되었다. 마지막때도 또 한번의 피흘림이 있을 것이다.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안는자는 몇이든 죽이라고 할 사형명령이 내려질 시기에 우리는 살고있다. 교파에 대한 선입견과 쓸모없는 소모전과 같은 논쟁뒤에는 항상 굴복되지 못한 자아가 버티고 있다. 우리 지금 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진실을 이야기 하면 그 진실을 경청하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스스로 수정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종교개혁을 계속되어야 한다.
윌리암 밀러의 재림 운동
윌리암 밀러가 2300주야를 해석하기까지윌리암 밀러는 1782년 2월 15일 미국 마사추셋츠 핏츠필드의 한 경건한 침례교회 가정에서 1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상당한 식견을 가진 독서가였으며 매우 규모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때 볼테르(Voltaire), 페인(Paine), 흄(Hume) 등의 자연신론에 쏠려 청소년 시절의 종교적 확신을 상실하였다.
그는 군(軍) 생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인간사들을 경험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 결과 자연신론적인 확신도 흔들리게 되었다. 그가 참전했던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과부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로우 햄튼(Low Hampton)으로 돌아갔다.
아직 종교적 확신은 없었으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외삼촌이 목회하는 시골 침례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였다.
1816년 10월 12일, 밀러는 교회의 한 집사의 요청으로 이사야 53장을 주제로 한 설교문을 낭독하던 중에 참을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경험하고 정식으로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고 자기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하고자 하는 결심을 가지고 조직적인 성경 연구에 착수하였다.
2년에 걸친 집중적인 성경 연구 끝에 밀러는 예수의 재림은 복천년 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있을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니엘 9장의 70주일은 다니엘 8장의 2300일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2300주야 기간은 주전 457년에 시작하여 1843년 마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300주야가 마치는 1843년, 즉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단 8:14)는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밀러의 예언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매우 치밀하게 전개되었으나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하는 마지막 부분의 적용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밀러의 재림운동 전개(1831년~1842년)
밀러가 2300주야에 대한 예언을 해석한 뒤, 그 기별을 전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계속 그의 양심에 부담을 주었으나 농부라고 하는 자격지심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13년간이나 내면적인 갈등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1831년 자신의 서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약 어떤 곳에서든지 강연 초청이 오기만 하면 가서 전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
그는 비록 하나님과 약속은 했지만 아마도 55세나 된 자기에게 강연을 부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의자에 앉은 지 30분이 채 못되어, 그 동안 성경연구에서 발견한 재림 기별을 전해달라는 처남의 전갈을 가지고 조카가 찾아왔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하였다.
그날 오후 드레스덴(Dresden)으로 떠나 다음 날엔 누이 집 부엌에서 이웃의 가정들을 모으고 재림의 기별을 증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재림 운동의 시작이었다.
첫 집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주일을 더 체류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한 결과 12가정이 주님께 헌신하였다.
그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 근처 포울트니(Poultney) 침례 교회로부터 강연 초청장이 와 있었다. 그 때부터 사방 각지에서 강연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1833년 9월에는 그가 사는 지역의 한 침례 교회가 그와 상의도 없이 그를 목사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사로 호칭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1834년 이후 밀러는 그의 모든 시간을 재림 기별을 전파하는 일에 바쳤다. 이리하여 재림을 위한 개인적 준비에 비중을 두는 초교파적 재림 운동이 전개되었고 여러 교회로부터 밀러를 좇는 무리가 나타났는데, 이들을 “밀러주의자”(Millerites)라고 부른다.
밀러 운동은 단순한 시기파 집단의 운동이 아니었다. 재림의 시기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문제였고 1차적인 문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재림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하는 신앙부흥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이 초교파적인 운동의 결과, 1844년에 감리교회는 4만명, 침례교회는 4만 5천명의 새 신자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림운동의 위기와 절정
1843년이 가까이 올수록 밀러주의자들의 선교적 노력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와 탄압도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운동의 지도자들은 동료 신도들에게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에 충실히 다니면서 재림 기별을 전파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탄압이 더욱 커지게 되어 결국 재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출교되거나 이탈해 나오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상했던 재림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밀러주의자들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구체적인 재림의 날짜를 정하고자 시도하였다.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서, 1843년 2월 10일설, 4월 3일설, 10월 24일설 등 여러 날자가 정해졌었다.
얼마 후에는, 주전에서 주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영(0)년이 없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2300주야가 끝나는 해는 1843년에 1년을 더하여 1844년이 된다는 결론을 다시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재림의 날자가 1844년 3월 21일과 4월 18일로 정해졌으나, 그 두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에게 상당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일어나 임박한 재림의 날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회중교회 평신도였던 사무엘 스노우가 유대의 대속죄일인 7월 10일이 태양력으로 10월 22일에 해당함을 연구하여 재림의 날짜가 1844년 10월 22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스노우의 이와 같은 주장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급기야는 ‘제칠월 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844년 10월 22일이 되기 직전에 거의 모든 밀러주의자들이 제칠월 운동에 가담하였다. 장사를 하던 밀러주의자들은 상점문을 닫았으며 직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직업을 포기하였다.
야영회에서는 자복과 기도가 그치지 않았으며 가난한 신도들이 빚을 갚는 데 쓰도록 하는 거액의 희사금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일부 농장들이 추수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출판물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는 일에 바빴다. 그 당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대망’ ‘출판’ ‘준비’ ‘헌신’, 이 네 가지 요소가 그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나 1844년 10월 22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지나갔다. 재림을 기다리던 무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실망을 겪어야 했고 비통하고 쓰라린 가슴을 안은 채 무엇인가 형용할 수 없이 난처한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누가 재림의 시기를 정했는가
1843년과 1844년에 절정을 맞았던 이 재림 운동에는 200여 명의 목사와 5만여 명의 평신도가 가담하였다. 교단별 분포율을 보면, 감리교회가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침례교회가 4분의 1, 그밖에 회중교회, 그리스도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루터교회, 화란개혁교회, 퀘이커 교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안식일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명히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이제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1, 1990년판, 259).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였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재림교파라고 한다. 예수님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김순명, 이단 종파들의 정체, 1986년판, 43).
이러한 비판들은 역사에 대한 식견이 없는 비판자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재림의 날짜가 정해진 상태에서 재림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당시에는 안식일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재림의 날짜를 정했던 일단의 무리들은 위에 열거된 여러 교파들에서 나온 것이다.
******* 위의 내용대로 윌리암 밀러의 운동이 실망으로 끝난후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기다린 신실하고 신중한 신자들이 모여 다시 성경을 연구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가 1844년에 이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1844년에 하늘성소의 둘째칸 즉 지성소에 들어간것을 알게 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조직은 1863년에 설립되었다. (재림운동은 언제? 1844년 이전)
그 때 있지도 안았던 재림교회가 그 운동을 주도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폭로하는 바이며, 또한 그 운동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전락시켜버린 현대 기독교사를 개탄하는 바이다.
모세는 하늘 성소의 모양대로 지상의 성소를 만들었다고 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언약궤가 있는 둘째칸 지성소에 들어가 성소를 정결케했다.일년동안 매일 매일 첫째칸 성소에서 속죄했던 양의 피로 얼룩진 성소를 7월 10일 대속죄일에 정결케 한것이다.
즉 2300주야가 끝나는 해 (1844년)에 성소가 정결케되리라 했으니 그해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성소정결을 위해 땅의 지성소에 들어가듯 하늘 대제사장 예수가 하늘 지성소에 1844년에 들어가 피의 정결 다시말하면 대속으로 얻은 인류의 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대제사장으로서 1844년에 지성소에 들어가 지금까지 속죄받은 이들의 심판을 하고 있는 중이다.즉 인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예수가 지성소에서 나와서 지구에 재림할때는 천국심판을 받은자와 지옥심판을 받은자가 다 결정 되었으니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당시 (재림운동이 실망으로 돌아갔던 당시) 죠셉 베이츠라는 장로가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일반 개신교인으로써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받아들였으며, 이 사업을 위한 활동적인 일꾼이었다. 그는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진실한 그리스도인 신사였다.
베이츠 장로는 주일 중 제칠일인 토요일에 쉬면서, 우리에게도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십계명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분을 분명히 나타내는 유일한 계명임을 성경적으로 풀어내었다.
(지구의 기초가 놓일 그 때에 안식일의 기초도 놓였다. 만일, 참 안식일이 잘 준수되었다면 불신자나 무신론자는 없었을 것이다. 안식일의 준수는 이 세상을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였을 것이다.)
베이츠 장로와 엘렌지 화잇, 제임스 화잇 목사 등이 안식일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며, 종교개혁자들의 바톤을 이어 받아 성경의 빛을 모아서 조직한 교회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재림교회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리를 내세우지 안는다. 이미 종교개혁자들의 밝혀놓은 성경의 진리와 일반 장,감,침례교회 등의 올바른 교리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교회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오해받고 있는 것은, 사단의 맹렬한 활동으로 종교개혁자들이 밝혀놓은 진리들이 다 희석되고 왜곡되어 버려서, 막상 우리는 올바른 성경 해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면 요한 칼빈, 웨슬레, 루터, 쯔빙글리 등이 분명 성경을 제시하며 적그리스도는 교황권이라고 누차 밝혀 두었는데, 지금 우리는 세대주의에 빠져 적그리스도를 미래에 독재자역할을 할 한 인물로 보고있는 것이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