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사>배교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키프리안, 노바티안)

작성자KESLL|작성시간17.07.02|조회수943 목록 댓글 1

- 배교자들에 관한 문제 :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데시우스의 박해 기간은 짧았으나 교회에게는 모진 시련이었다. 이는 박해 자체 및 그 후 교회가 직면하게 된 문제들 때문이었다. 교회 앞에 제기된 큰 문제는 배교자즉 박해 때에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저버렸던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모든 이들이 다 같은 정도로, 혹은 같은 형태로 신앙을 저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기꺼이 제사를 지낸 자들과 위조 증명서들을 구입한 자들, 혹은 일시 신앙이 약화되었으나 박해 기간 중에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었다.

 

교인들 중 일부는 당시 크게 존경받고 있던 고백자들에게 이 문제를 처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북아프리카 지방의 일부 고백자들은 이러한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면서 일부 배교자들을 교회로 복귀시켰다. 이것을 보고 많은 감독들이 크게 반발했다. 즉 교회의 기존 체제만 배교지들을 받아들일 권위가 있으며, 원래의 교회 조직만 통일성 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러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어떤 이들은 고백자들과 감독들이 배교자들을 지나치게 두둔한다고 생각했으며, 배교자들을 더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키프리안(Cyplian)과 노바티안(Nobatian)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프리안은 40세쯤 기독교로 개종했고, 얼마 후 카르타고 감독에 선출되었다. 그는 터툴리안을 신학자로서 존경하여 스승이라 불렀다. 그는 터툴리안처럼 수사학을 전공했으므로 유창한 웅변으로 반대자들을 물리치곤 했다. 그의 저술들은 당시 기독교 저술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박해 직전에 감독이 된 키프리안은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방대한 서신 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비겁하다고 간주했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 교회는 박해 때문에 감독을 잃었는데, 그곳의 성직자들이 키프리안의 결정에 의문을 표히는 서신을 보냈다. 키프리안은 자기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피신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용기와 신념은 몇 년 후 순교자의 최후를 맞음으로써 증명되었다. 어쨌든 당시 그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으며, 특히 배교자들의 복원 문제에 있어서 신앙 때문에 곤경을 겪은 카르타고의 고백자들이 키프리안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고백자들 중 일부는 배교자들이 회개를 표시하면 다른 절차 없이 교회로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감독을 싫어한 장로들 중 일부가 고백자들에게 합세함으로써 카르타고 및 인근 지역의 교회가 분열되었다. 키프리안은 이 지역 감독들의 모임을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는 실제 제사에 참여함이 없이 증명서를 구입 혹은 취득한 신자들을 조건 없이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임종 시에, 혹은 새로운 박해가 일어나 이들의 회개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 성도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기로 했다. 제사에 참여했고 그 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다시 교회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 모든 결정들이 고백자들이 아닌 감독들에 의해 내려졌다. 분열이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결정들로 말미암아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키프리안이 배교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가 교회의 계급제도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키프리안 자신도 로마의 교회 체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회의 통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고백자들의 행동이 이러한 통일성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키프리안은 이들의 행위를 거부하고 감독회의에서 배교자 문제를 결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뿐 아니라 키프리안은 터툴리안의 숭배자로서 그의 저술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터툴리안의 엄격한 경향은 키프리안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는 배교자들을 지나치게 쉽게 복귀시켜 준다는 의견에 반대했다. 즉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였으므로 우상 숭배자들과 배교자들은 함께 참여할 수 없었다.

 

노바티안(Novatian)은 키프리안보다 더 엄격했다. 그는 당시 로마 감독이던 코넬리우스(Comelius)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왜냐하면 교회가 너무 쉽게 배교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도 로마에서 유명한 신학자인 히폴리투스와 칼릭스투스 감독 사이에 비슷한 갈등이 있었다. 간음죄를 범한 자가 회개했을 때에 칼릭스투스는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려 했으나 히폴리투스는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문제로 말미암아 분파가 생겨 로마에 두 명의 감독이 존재하게 되었다. 노바티안의 경우도 결과는 동일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건의 핵심은 순수성과 용서하는 사랑 중 무엇이 교회의 특성으로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히폴리투스의 분파는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바티안 분파는 그 후 수세대를 계속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방 교회가 자체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리고 죄를 하나님에 대한 집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유지하면서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법과 관련된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교자들의 복귀는 일찍부터 서방교회의 주된 관심사였다. 세례 받은 후 죄를 범한 신자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그 후에도 서방 교회는 분열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고해제도(penitential system)가 발전했다. 그 후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제도에 대한 반항이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wiki-bible/iD9h/33?q=%B9%E8%B1%B3%C0%DA%20%C3%B3%B8%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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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KESL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7.02 키프리안은 로마 카톨릭성향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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