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joonho1202.blog.me/221467989481
( 참고로 12,000년전이면 한국은 구석기 시대이다. 신석기는 BC 6,000년 경/청동기는 BC1,000년 경)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았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이 공동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T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충격적인 것은 이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가 기원전 80-100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제3계층의 연도는 9100~8600년 전으로 분석되었다. 대략 농업 혁명을 통해 수렵채집에서 농경 사회로 전환되던 즈음으로 여겨진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유적 으로서, 그 후에 만들어진 유적조차 대부분 작은 돌들을 쌓아 올렸거나 규모가 작다는 것을 감안하면 특출난 편이다.
연구자들은 이 유적이 수렵채집 부족에 의해 종교적 의미의 시설로 만들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기존의 가설과는 달리 “수렵 채집인들”도 대규모 시설을 만들 정도의 사회적 역량이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존재 자체로도 놀라운 유적이지만, 현재는 명확한 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괴뵈클리 테베” 유적지에 대하여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과 동물 형상이 양각되었다. 돌기둥들은 T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나 일본의 토라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새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횟대를 형상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일상생활을 위한 장소가 아님이 유력하다. 굳이 중간에 T자형 돌기둥을 세워 몸통 부분에 손 모양을 조각한 점을 볼 때 신앙을 위해 신을 형상화했지만 얼굴은 조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수렵채집에 의존했을 건립집단이 이곳에서 연중 어느 정도는 머무르며 종교적 행사를 치렀으리라 본다. 이는 주변에서 잡아서 이곳으로 가져와 먹고 묻은 야생동물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견된 점에서 유추된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체계적으로 집단화된 인력 5백 명 이상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인데, 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인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생활에 따른 체계적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 나 바퀴, 토기, 청동기의 사용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이나 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사회 구조형성과 충돌한다.
사실 집단사회 형성이 농경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20년 이상 전부터 논의되어 충분히 받아들여진 내용이므로 그 자체가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농경 이전의 집단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대규모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랍다.
2. "괴뵈클리 태페"의 쇠퇴와 몰락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자그마치 약 2천 년 간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세워진 기둥들은 고의적으로 메워진 뒤 인근에 새로운 기둥들로 다시 세워지는 등 몇 번에 걸친 변화가 이루어져 있다.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고, 결국 기원전 8천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히게 된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보통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며 자연스럽게 신전은 묻힐텐데 말이다.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계급에 대한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3. "괴베틀리 테페"에 대한 해석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학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인류 발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유적으로 여겨진다. 다만 문제는 유적의 극히 일부만이 출토된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려면 발굴기술의 발전 등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다만 발굴책임자는, 이 신전의 성격을 돌기둥의 동물 형상들이 수렵의 사냥감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신격화된 형상의 사자나 거미, 뱀, 전갈이라는 점에서 이곳을 사냥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곳보다는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는 장소로 보았다. 또한 새들, 특히 독수리 형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차탈회육(Çatal höyük)과 예리코에서도 많이 보이는 독수리 이미지와 더불어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고대 아나톨리아와 중동권에서 조장 풍습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즉 새가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풍습은 한국의 솟대 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대의 조장 풍습에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사람을 먹어 그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유적지에서는 인골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과 연관된 장소임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돌기둥들의 T자 형태에 대해 교수는 앞서 서술한 내용과 더불어 동물신들이 보호하는 죽은 자들, 즉 당시 사람들의 조상들을 형상화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이러한 괴베클리 테페의 언덕 위 신들의 이미지가 고대 기억으로 남아 수메르인들에게 이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에쿠르 신전 이야기로 전해내려왔다는 가설도 제기했다.
4 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이전에 나온, 신석기 시대 대규모 신전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전에 어떻게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등장했느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 밀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는 1983~1991년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이며 네발리 초리의 밀농사는 최초의 밀 재배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이를 종합하면 집단 사회 체계를 농경 정주 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기존 우리가 알던 상식과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사냥 및 채집을 하는 수렵생활 -> 원시적인 농업활동에 따라 잉여식량의 확보 ->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는 것. 여기에 스토리를 짜 맞추면,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인력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업이 발달한 게 아니냐는 가설로 이어진다.
5.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괴베클리 테페"에 대한 갈등
터키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위에 T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들어가 보관 중이며, 중무장한 군이 배치되어 학자들을 경호하고 있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이다. 그런데 아르메니아는 괴베클리 테베가 있는 지역이,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성경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ike)가 시조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신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알려진 아라라트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있다.
그러나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 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터키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메니아도 이 유적과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여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도 신빙성 없다.
참고문헌: 세계의 역사적 발굴, 중앙썬데이,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