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아르메니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학살의 역사

작성자익투스|작성시간19.02.23|조회수1,177 목록 댓글 1

출처 : http://joonho1202.blog.me/221467945175

기독교를 가장 처음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의 역사

바돌로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어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바돌로매와 다대오가 이 지역에 처음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이기도 하다. AD 301년 아사시드 왕조의 트리다테스 3세 때 성 그레고리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해(313년)보다 12년이나 앞선다. 이란과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이슬람 국가에 둘러싸여 있지만 1700년 넘게 기독교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조상은 고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 속 야벳의 큰아들이자 노아의 손자인 고멜의 한 지파가 아르메니아 땅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은 노아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노아의 방주’가 묻혀 있다는 아라랏산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지금은 터키령에 속해 있지만 사진이나 외부에 공개되는 아라랏산 전경 사진들은 아르메니아 쪽에서 바라본 게 대부분이다. 지금도 수도 예레반 곳곳에는 ‘아라랏’과 ‘노아’ 지명을 딴 각종 상호와 제품들이 즐비하다. 공항에서 내리면 ‘노아의 집(NOAH’S HOME), 아르메니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종교는 아르메니아정교회로 통칭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97% 정도를 차지한다.

1. 아르메니아의 역사의 시작

1)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여건

아르메니아인의 성지 "아라랏산", 터키 영내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아르메니아에서 촬영한 것이다.

“카프카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민족의 주요한 이동통로에 위치해 있었고, 그렇기에 상당한 민족적 갈등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2) 아르메니아인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고대역사

아르메니아의 역사 중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최초의 국가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 시절인 기원전 1270년경, “아르메니아 고지”에 있는 “반 호수의 주위에 중심에 있던 철기시대 우라르투(Urartu)”가 있었으며, “우라르투”의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고원의 패권을 쥐게 된다. 아르메니아에선 고대 유적이 바로 터키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가 자신들의 유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논란이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 역시 원래 원주민인, “아르메니아인”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인정을 받는 분위기는 아니다.

3) 역사적으로 확인이 되는 아르메니아 고대사

"괴베틀리 테페"는 기원전 제10천년기 ~ 제8천년기 사이의 두 개 시대의 유적이 혼재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첫 번째는 토기없는 신석기 시기로 이때 거대한 T자 모양 돌기둥들이 세워졌다.

아르메니아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인데, “예르반드 왕조” 라는 독자 왕조가 있었으나, 메디아 왕국의 속국이었다. 이후 메디아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될 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그 세력권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우리가 아는 알렉산더가 맞다)”에 의해 “페르시아가 망한 후”에야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BC 20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격으로 “예르반드 왕조”는 멸망했다.

4)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힘든 역사를 보내는 “아르메니아”

동 터어키, 코커서스 및 현 시리아와 이라크, 이란 북부를 지배한 "대 아르메니아"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알렉산더제국의 부장 출신인 "셀레코우스에" 의해 건국된 나라)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일종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아르타셰스”(Արտաշես)가 곧 반란을 일으켜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고 “아르타셰스 왕조”(Artaxiad Dynasty)를 세웠다. 카프카스 일대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운 “아르타셰스 왕조”는 기원전 1세기 “티그라네스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영토를 가지고 동방의 강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격에 멸망하였다. 이후 서방의 강국 로마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사이에 끼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예 아르메니아의 지배왕조가 파르티아계인 “아르사케스 왕조”로 교체되기도 했다.

5)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드린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원

“아르메니아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를 신봉하는 등 이란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나, 이란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도 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392년이니 무려 8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자국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교회는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이후 이 나라 옆에 위치한 아라랏산(구약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산)이 위치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들을 노아의 직계 후손이라고 자칭하였다.

6) 기독교를 받아드린후, 더욱 힘들어진 "페르시아"와의 관계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원 입구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장(아르메니아는 서방과는 별도의 기독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힘든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세기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나라에서도 전란이 끝이지 않았다. 결국 페르시아와 로마에 의해 국토가 반동강 나면서 멸망했고, 이후 몇 차례 아르메니아 본토나 소아시아 남부 지역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모두 단명했다.

현대 아르메니아는 동유럽에 가까운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공인 이전 아르메니아는 종교(조로아스터교)와 문화, 습속, 인종 등 등 여러 면해서 이란과 유사했기 때문에,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지대라는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이란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국교화가 시행됨으로써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이 때문에 사산 왕조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중부/동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와 친로마파 귀족들을 억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이란의 일부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대규모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봉기/아바라이르 전투)

전쟁 자체는 이란이 이겼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이 워낙 거셌으므로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어느정도 자치권과 기독교 신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2. 중세의 아르메니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아르메니아 인)

"노아의 방주"라 주장하는 아라랏산의 유적물

1) 이슬람 제국의 물결과 아르메니아

7세기 이후 아르메니아에도 이슬람교의 물결이 밀어닥쳤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지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의 그리스 정교회”와의 갈등과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리엔트 정교회”(일명 콥트교),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더 가까웠던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결국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정교”로 발전하게된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콥트교(단성론)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십자군 전쟁기에 서방 카톨릭 교회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잠시 동안은 아예 가톨릭으로 귀의한 적도 있었다.

2)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아르메니아인”

아르메니아 화폐에도 그려진 아라랏산(현재 터키 영내에 있기는 하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아르메니아인이 황제였던)의 아르메니아

7~13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본토를 떠난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 나갔고, 주류층에 편입된다. 심지어 아르메니아 출신의 황가를 두 차례씩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동로마가 결코 서방의 주장대로,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 줬다는 점”(즉 로마는 여전히 세게제국이라는 의미에서) 의의를 지닌다.

7세기 동로마의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그가 일궈낸 왕조가 아르메니아 출신. 이 왕조가 단절된 후인 9세기에 한번 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 1세”가 등극하면서 “아르메니아계 마케도니아 왕조”가 들어선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인 “아르메니아에 갖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는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아르메니아의 “바그라투니 왕조”(또는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조)는 이웃 조지아의 왕실인 “바그라티온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이 가문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을 거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기도 하다.

3)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된 아르메니아 왕국

현재 축소된 "아르메니아"의 영토

그러나 11세기 이후 아르메니아 왕국이 내분으로 휘청거리자, 동로마 제국이 일부 영토를 합병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소아시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히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결국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남은 영토 역시 “셀주크투르크”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때 일부 피난민들이 “킬리키아 지역”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소(小)아르메니아 왕국 혹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이 왕국은 마침 레반트 지역으로 들이닥쳤던 십자군과 동맹하기도 하고 몽골과도 동맹을 하며 그럭저럭 버티다가 1375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4) “몽골의 아르메니아” 지배와 아르메니아 인들의 상업적 재능 발휘

“아르메니아 본토”는 13세기 몽골의 대공세 이후 몽골 제국인 일 칸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몽골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관대하여 아르메니아 정교도도 간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동서 문화 교류와 경제 교역이 번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시리아-캅카스-이라크-이란을 잇는 무역로를 활용해 많은 활약을 했다.

5)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의 아르메니아인

아르메니아 교회의 대 본당인 "악다마르 대성당" 그러나 현재는 터키 경내에 있다.

이 지역의 몽골 국가가 몰락한 뒤 혼란이 이어지면서 무역이 쇠퇴하여 몰락했으나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패권 아래,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동지중해 근방이 통합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타 종교에 관대한 정책을 펼치면서 아르메니아 인은 상업 민족으로 널리 알려지며 오스만 통치 아래 아시아의 상업은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총괄하여 경쟁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게된다.

프랑스에 커피를 유행시키고 최초의 카페를 개점한 것 또한 아르메니아인으로 전해진다.

당시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비유적으로 헝가리에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령 현대 파키스탄 까지, 남북으로는 러시아에서 예멘 까지 중세~근세의 이슬람 제국의 영역이라면 아르메니아 상업 커뮤니티도 존재했다고 할 만큼 유대인보다도 더 넒은 커넥션과 입지를 자랑했고,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자신들의 부와 재력을 고향인 서부 아르메니아 지방의 수많은 유서 깊은 수도원, 교회들에 투자하면서 현대 터키의 동부 지방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연필 같이 뾰족한 첨탑 수백 개가 들어서 있었다.

3. 근대 러시아와 오스만으로 분열되게된 “아르메니아”의 비극

"오스만인들"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학살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급속히 몰락하면서, 그에 기댄 “아르메니아도 몰락”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이 북방에서 남하해 오면서 강력한 압박을 받은 오스만 제국은 1774년 “현대 아르메니아 지역을 러시아에 넘겼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지나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르메니아인들도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각성했다. 그러나 민족이 러시아 치하와 오스만 치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건과 교육 상태가 열악하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의 분리주의 운동 탄압도 작용했다.

4. 대 학살 당하는 "아르메니아인"

터어키에 의햐,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당한 "아르메니아 사람들"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오스만은 내부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전근대적 체제를 뒤엎고 집권한 터키 군부도 이 부분에선 술탄 시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오히려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터키 군부가 1차 대전 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이전까지 이뤄지던 전근대적 '진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적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대략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 중에 추정치에 따라서는 100만에서 150만에 가까운 숫자가 학살됐다. 이 중 상당수는 대책없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다 병사하거나 아사했다.

5. 소련 연방내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고대 아르메니아인의 깃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에서는, 잠시나마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붉은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소련 치하에서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서방세계로부터 무시되었다.

때문에 NATO 가맹국인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흑역사 취급을 받으며 다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스탈린은 아르메니아 독립 및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대거 학살해버리고, 이 자칭 민족 전문가는 아라라트 산을 터키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으로 넘기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 계속된 어두운 역사를 가져야 했다.

6. 현대의 아르메니아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의회"는 투표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분리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의결했다. 이 문제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은 분쟁 중 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독립을 결의하면서,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야 “아르메니아”는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경제적 여건이 워낙 열악한 데다, 독립하기 직전인 1988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지진이 일어나서 큰 어려을 겪고 있다.

참고문헌) 시사중앙, 중앙썬데이,국민일보, 월간중앙, 나무위키, 네이버 지식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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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엘리야후 | 작성시간 19.06.30 하나님은 알메이아인들을 학살한 국가와 민족들에게 피값을 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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