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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 노리마쯔 목사

작성자익투스| 작성시간19.09.24| 조회수9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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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9.09.24 노리마쓰는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가 세운 모임들이 경기도 지역에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형제모임 사람이었기 때문에 < 목사 > 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교계에서는 조지 뮐러도 < 조지뮐러 목사> 로 부릅니다만, 그들은 목사제도를 강력히 부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9.09.24 본문에 나오는 브랜드라는 형제는 인도 총독의 사위였습니다. 그는 장모와 부인을 대동하고 조선에 왔는데, 고종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성문에서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 일없다> 고 해라 해서 보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지 얼마안되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나온 방문시기 보다 조금 먼저 왔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1893- 4년이었을 것입니다.
    노리마쓰, 승송 형제가 개척한 모임들과 후기에 들어온 형제모임이 함께 교제하고 싶어서 모였을 때, 승송 형제가 개척한 모임들의 대표자들은 노인들로서 긴 담뱃대에 담배를 물고 대화를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면에서 함께할수 없다고 판단되어
  • 답댓글 작성자 엘리야후 작성시간19.09.24 교제가 중단되었습니다. 아마 경기도 화성군 사랑리 부근이었을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익투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9.09.24 이 당시 고종은 미, 일, 러, 청들의 거만한 외교관계에 풍전등화같은 조선을 생각하느라 알렌이 세운 병원인 재중원 같이 백성들과 나라를 위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니면 어려워했을 겁니다. 학문적 성향으로 느껴지는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가치관과 대치됨을 넘어서 분쟁의 소지가 생길 수 있어 어려워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그당시 교육과 의료선교에 힘을 썼던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의 활동이 조선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훨씬 더 인지도가 높았을 겁니다.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 순수한 복음을 대면하기는 왕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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