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칼룹토와 페리발라이우
Κατακαλύπτω και Περιβολαιου
고전 11장과 관련하여 이 단어들에 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쓰라는 말이 없이 그냥 덮으라 하지 않았느냐? 하는 반문을 하는 분들이 있으므로
이 기회에 좀 더 공부하고 넘어가기 원하는 뜻에서 살펴봅니다.
한마디로 덮어쓰다, 의 목적어가 없는 이유는, 그 동사안에 목적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동사에 목적어를 추가하면 쓰는 것을 쓴채가 되며,
축구를 차고, 이발을 깎고, 식사를 먹고, 야구를 던지고 라는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베일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베일을 베일쓰기하다, 가 됩니다.
이런 말은 문법상 타당하지 않습니다! 축구를 차야 하겠습니까?
고전 11장 15절 Περιβολαιου 페리볼라이우
15절에 긴머리는 쓰는 것을 위하여(혹은 대신하여) 주어졌음이라, 에서 쓰는 것의 바탕으로 사용된 단어는 페리볼라이우 Περιβολαιου로서 Περιβολαιον 의 단수 소유격 중성명사로 쓰였으며 이것의 어원은 Περιβαλλω(페리발로)로서 이 단어는 둘러 입히다, 두르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리하여 페리볼라이온은 입혀진 것, 둘레입혀진 것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들은 그러한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 분별됩니다.
Perimeter – 주변, 원주위
Pericranium – 두개골막
Peripherial device – 컴퓨터의 주변기기
즉 원둘레와 같이 둥그런 둘레에 관한 접두어가 페리 입니다. 그리고 페리볼라이우는 둘레에 입혀진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제 5,6,7절에서 시용된 카타칼룹토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5절, 6절 7절에 나오는 쓰다는 단어는 카타칼룹토 Κατακαλυπτω 입니다
Κατακαλυπτω
To veil, mid. To veil one’self, be veiled or covered, 1 Cor 11:6, 7 In the Pres act ind., 2nd sg, the personal ending σαι doesn’t simplify as normal, κατακαυχασαι
(설명) 베일을 쓰다, 중간태, 스스로를 베일 씌우다 또는 덮다, 고전 11:6,7. 현재시제, 능동태 직설법2인칭 단수에서 인칭어미는 규칙대로 축약되지 않고 κατακαυχασαι 로 된다.
이것이 이 단어에 대한 헬라어 사전의 해설입니다.
아울러 이것의 반대되는 말은 아포칼룹토( αποκαλυπτω)로서 계시하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은 아포칼륍시스(Αποκαλυψις) 가 됩니다.
여기서 목적어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무엇을 덮어쓰는 것이 아니라, 긴머리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이 단어 자체에 포함된 뜻에 맞지 않고, 앞 구절에서도 그런 동일한 방식으로 동사가 목적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4절에는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 이라고 번역하는데, 무엇이라는 단어도 없고, 쓰고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에콘( 갖고서) 이라는 단어만 있는데, 머리 위에 무엇인가를 갖고서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머리위에 무엇을 쓰고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는 단어는 그 어구에 없습니다.
그에 반하여 카타칼룹토(κατακαλυπτω)는 누가 번역해도 무엇인가를 쓰고, 혹은 덮고로 번역하는 것이며 그것이 머리가 긴 채, 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3-8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모세의 수건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그때 수건이라는 단어는 칼룸마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칼룸마는 칼룹토와 같은 어원이며 칼룹토의 분사형은 칼룸메노 로서 <<덮는>> 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칼룹토란 칼룸마로 덮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룹토의 반대 동사는 아칼룹토도 있지만 아나칼룹토, 아포칼룹토 등이 있습니다. 이 아포칼룹토는 덮어서 보이지 않게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계시하다의 동사입니다. 이것의 명사형은 아포칼립시스로서 계시록을 말함은 이미 밝힌 바있습니다.
다시 칼룹토는 칼룸마에서 원래 파생되었다는 말과 거꾸로 칼룸마가 칼룹토에서 파생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어떻든, 칼룹토는 어떤 물체를 보이지 않게 덮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고전 11장15절에서 사용된 페리볼라유는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하여, 혹은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입혀주는 것을 말합니다. 페리볼라유가 가장 많이 사용된 장은
마태 25장입니다.
36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가 나를 옷입혀주었고(περιεβαλετε), 내가 아팠을 때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감옥에 있었을 때 내게 와주었느니라
38 언제 우리가 당신이 나그네된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또는 헐벗은 것을 보고 우리가 옷입혔나이까(Περιεβαλομεν)? 43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나를 옷입히지(Περιεβαλετε) 않았으며 아프고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도다.’
Κατακαλυπτω 와 Περιβολαιου는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전혀 다릅니다. 그 단어를 똑같이 쓰는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서 수많은 독자들이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글 종씨가 전혀 다른 성씨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음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같은 가문인 것처럼 오해받는 것과 같이 이 번역의 음을 동일하게 함으로서 많은 독자들이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부터 이 페리볼라유의 번역을 둘러씀이 아니라, 둘러입힘으로 번역함을 알려드립니다.
Κατακαλυπτω( 칼룹토) 는 어떤 사물을 가리우고 덮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의 분사형은 καλυμμενω이고 그것은 칼룸마(καλυμμα)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룸마(καλυμμα) 는 수건으로 고후 3장 15-18에서 번역되었습니다.
Περιβολαιου(페리볼라유) 는 입혀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옷입는 것과 덮어버리는 것이 어찌 같은 뜻이며 긴머리가 페리볼라유 기능이 있다하여 어찌 그것이 칼룹토 하겠습니까?
Κατακαλυπτω 는 수건으로 덮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수건은 칼룸마로서 바로 이 동사의 명사형이기 때문입니다. 칼룹토의 분사형은 «덮는» 으로서 칼룸메노(καλυπμμενω) 입니다. 이 분사형과 명사형은 마치 동명사처럼 동일하게 쓰입니다. 덮는 것이 바로 베일이기 때문입니다.
Περιβολαιου – 페리 볼라유- 는 둘레에 입혀주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번역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위에서 칼룹토와 칼룸마 (수건- Καλυμμα)는 항상 같이 움직임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칼룹토 동사에 칼룸마를 굳이 쓰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동일한 단어의 중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후 3장 13-18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글의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다시 중복하여 쓰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구를 찬다, 이발을 깎다, 식사를 먹는다, 가 맞지 않는 한글어법인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아니하도록 자기의 얼굴에 수건(Καλυμμα- 칼룸마)을 덮었던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14 그러나 저희의 마음들이 완고하여졌느니라. 왜냐하면 오늘날까지 옛 언약의 낭독 시에 똑 같은 수건(Καλυμμα- 칼룸마) 이 벗겨지지(ανακαλυπτομενον- 아나칼룹토멘- 칼룹토의 반대어로 수동태 분사) 아니하고 머물러 있음이니, 이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기 때문이라. 15 그러나 오늘날까지 모세가 읽혀질 때마다,수건(Καλυμμα- 칼룸마)이 저희 마음 위에 덮여있느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주께로 돌아설 때마다, 그 수건(Καλυμμα-칼룸마)이 벗겨지느니라. 17 그러나 주는 영이시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얼굴에 벗은 채로(ανακεκαλυμμενω-아나칼룸메노- 칼룹토의 반대어로 수동분사) 주의 영광을 거울로 밝히 보며, 주의 영에 의한 바처럼, 같은 형상을 닮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형되어져 가느니라.
긴머리로 머리수건을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이 결코 인정하지 않는 해석입니다!
긴머리로 덮어쓰는 것을 대신 할 수 없음은 세례로 침례를 대체할 수 없음과 동등한 수준으로 분명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후 2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중 1900년간은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여자들은 예배시간에 예배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 1900년동안 수많은 교회들이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서 머리에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쓰고 있었습니까?
고전 11장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진 것을 믿으십니까? 그 고전 11장을 쓰도록 감동하셨던 성령님께서는 1900년간만 그 성경이 유효하다고 어디에 쓰셨습니까?
아니면 20세기 언제 누구를 통해서 그 성경말씀을 취소한다고 변역하여 계시하여 주셨습니까?
시편 2편
1 어찌하여 열방이 1)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분이 주신 계명과 교훈들을 짓밟음으로서 그 맨 것을 끊어버리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에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모본을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반대로 술집에 가서 방탕하게 노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이며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모본과 법도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보호하심을 받게하는 것으로서 가장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평안하게 해줍니다!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들이 당연히 추구할 길입니다.
은혜 방탕주의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2014. 7. 21 하토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