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존스 회개 (3) 죄인의 간절한 욕구
3.죄인의 간절한 욕구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모호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기독교를 구성하는 체계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 이유를 들춰 보면, 궁극적으로 인간이 성경의 독특한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전반적인 입장은 인간이 생각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인의 "그" 자도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에 대해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다윗은 끔찍한 죄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살인죄와 간음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행동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이런 행동에 제동을 걸고, 그가 저지른 범죄를 일깨우면서 자신을 직시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게 된 것은 그때였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자리에 앉아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다른 모든 행동이 참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자신을 직시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가능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세상은 쾌락이나 다른 매력적인 것들을 조직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이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살피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같은 유혹을 다 이겨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던 일을 중단했고 , 자신을 살피고 점검했으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51:1 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두 번째 단계는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자비와 용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 라고 탄원합니다. 스스로 죄의식을 떨쳐 버릴수 없으며 지은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음아프게 했던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하나님만이 제게 안식을 주실수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그 사람을 여러분이 좋다면 도덕적 인간 또는 윤리적 인간으로 아니면 여러분 마음대로 부를수 있습니다. 뭐라 부르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그분께 간구하지 않는 사람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위대하고 고귀한 이름으로 불리기에 걸맞은 필수요소 중 하나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다윗처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경우에서 이러한 단계들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그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제동이 걸립니다. 그는 자신의 죄과와 죄악과 죄를 살핍니다. 죄책감이 들면서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울부짖습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런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다니 나 자신이 끔찍하구나 하고 탄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만 받으면 되지 뭐 라고 생각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행동 그 자체보다는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내면의 그 무언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걱정하며 언제나 자신을 고발하고 점검합니다. 용서받고 못 받고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 정말 중요한 문제는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는 내면의 그 무엇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용서가 문제의 전부인양 거기서 더 진전하지 않는 수박 겉핧기 식의 복음주의를 경계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 용서를 구해야 하는 행위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용서받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내 안의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포착한 다윗은 10절에서 이 처럼 통렬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다윗은 그것이 진짜 제 문제 입니다 잘못된 것은 제 마음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라고 울부짖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상 이렇게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성품, 곧 거듭남-중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용서받고 보다 선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태어나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만져 주시지 않으면 영영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다시 태어나야 하며 새롭게 창조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거듭남의 교리를 마땅찮게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입니다. 존 웨슬리가 회심하고 나서 옥스퍼드대학교로 돌아가 이 교리에 대해 설교했는데, 그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미움을 샀습니다. 옥스퍼드의 신실하며 존경받는 사람들도 이 교리를 못마땅하게 여겨 웨슬리의 설교를 완전히 금지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거듭남과 중생이라는 이 위대하고 탁월한 성경적 교리에 반대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형제자매 됨에 관한 강연이나 설교는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보다 선한 삶을 살라는 권면을 받을때에도 별 문제 없습니다. 백번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충 대충 사는 것을 따끔하게 꼬집는 설교나 훈계를 들으면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앞으로는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전도자가 육에 속한 사람에게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라고 권면하면 무슨 이런 희한한 교리가 다 있지요? 하고 반응합니다. 제가 예전에 잉글랜드 심장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복음을 전할때의 일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저는 어느 농사꾼 부부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농부의 아내가 이웃집 농부의 아내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그 여자만큼 괜찮은 여자도 없을 거예요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부인이거든요 신앙심도 그렇게 깊을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거듭나라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하지 뭡니까? 저를 대접했던 농부의 그 착한 아내는 이웃집 농부의 아내가 성격상 무슨 결함이 있는게 아닐까 의심하는 듯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입버릇처럼 새 생명이니 거듭남이니 하는 이야기는 농부의 아내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녀가 정신 이상자 쯤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어디서나 볼수 있는 현상입니다.
니고데모가 우리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저는 그동안 선생님을 죽 지켜보았고 선생님이 베푸신 기적도 직접 목격했으며 선생님의 설교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이런 기적들을 행할수 없으니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으니라(요3:3).
이후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랍비여 저는 선생님을 눈여겨보았고 말씀도 경청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선생님께는 제게 없는 특별한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명색이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재산도 꽤 많지만 선생님은 저보다 가지신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이다 재산을 더 모을 생각은 그만두고 거듭나는 삶의 토대를 세워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력하며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죄가 많아 개선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고발하는 교리를 생리적으로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는 교리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소득이 없으며 마르틴루터 처럼 금식하고 땀 흘려 기도해도 헛될 뿐이라고 지적하는 교리를 육에 속한 사람은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수도사 마르틴루터는 수도원의 독방에서 금식했고 기도했고 로마 순례여행을 다녀왔으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할수 있는 일은 뭐든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거듭남의 교리를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 없으며 잠잠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거듭남의 교리에 맞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6절에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우리의 관심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순간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얼마나 무력한지를 즉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5절에서 자신의 실상을 "내가 죄악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복음을 뿌리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은 선하기 이를데 없으며 어쩌다 보이는 성격상의결함은 매우 손쉽게 고칠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복음을 거부합니다. 자신이 죄악중에 출생했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했다고 믿는 사람은 , 자신이 부패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교만 자기만족 자긍심 그리고 자기좌신 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우리의 자아는 치명타를 입습니다. 썩 내키는 일이 아니지요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의 교리는 거북한 교리이며 자존심 상하게 하는 교리이지만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 핵심은 다음의 두 구절에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6,10절)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때 거듭남을 절대 필수로 삼아야 하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반역과 위선을 일삼는 우리의 본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보소서 주 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라고 시인합니다.
그것이 골칫거리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밟았던 여러단계들을 알고 있습니다 . 그는 자신을 살폈으며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 안에 내 마음속에 부패한 그 무엇이 있구나 그런데도 나는 손을 쓸수 없다니 내가 나 자신을 믿을수 없기 때문이구나 내 본성 내 존재 깊은 곳에 진실함이 없구나 라고 탄식합니다. 자신에 대한 고백치고는 너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틀림없이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을 것입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고 기록했습니다(렙17:9).
어느 위대한 성인은 인간의 죄성을 찬송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여러분은 자신을 신뢰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일그러지고 빗나갔으며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까? 영혼 저 깊은 곳에 있는 위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위선자들이며 우리는 모두 가면놀이를 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꾸며낸 이야기를 하고있습니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상상이나 은밀한 생각을 스크린에 살짝 띄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과연 편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 인용한 말씀들은 구구절절 사실이며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 가운데서 손을 쓸수 없는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낯을 피할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오 여러분이 그저 죄책감과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골몰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선적으로 자신의 중심이 신실해야 함을 절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살핍니다. 그리스도인은 펼쳐진 책처럼 자신의 모든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압니다. 다른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든 자신을 어찌 생각하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내와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도 살펴보고 계심을 압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음을 압니다.
- 복있는 사람 강봉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