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자세히 읽기
잃어버린 시간의 복원과 이야기하기
-김성한의《잉걸불》
이 운 경
1.‘이야기하기’와 역사의 복원
김성한의 수필 속에는 풍경이 있다. 그의 글에서 만나는 풍경은 가난하지만 따스하다. 저 멀리 나지막한 초가집을 향해 동무 이름을 부르면 달려 나올 것처럼 생생하고도 아련하다. 그의 세 번째 수필집《잉걸불》(수필미학, 2014)에는 팔 할이 유년기의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그의 붓끝은 집요하게 과가를 추적한다. 기억과 추억을 샅샅이 뒤지며, 시간이 멈추는 유년기의 고향을 찾아서 친구를 부르고 어머니를 불러낸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기억’이라는 이름의 대하소설과도 같다.
한국전쟁이 나던 해 소작농의 오남매 맏이로 태어난 작가는 사춘기에 천식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여윈다. 도시로 나온 그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J상고 특설반에 장학생으로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녹록하지 않아 중도에 그만 둔다.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 체신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물려받은 거라곤 동생 건사하는 일과 제사 밖에 없었다. 부지런하고 착한 아내를 만나 일가를 이룬다. 아들 둘을 낳고, 단칸 셋방에서 살다가 내 집을 마련하고, 동생들 장가보내고,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면서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한다. 아들 둘을 집 장만하여 장가보내고 영주 우체국장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그는 현재 아내와 함께 전통시장 가는 것을 즐기고, 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함께 막걸리 마시는 일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랑논 여남은 마지기로는 오 남매 일곱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제 강제노역을 피하고자 구주 탄광촌으로, 만주로 늘 떠돌아다니던 분이었다. 예의 역마살 끼가 도졌던지, 당신 맏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
(중략)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두벌 매기 인가, 세벌 매기 인가 여름 한 철 김매기가 얼추 끝나는 지금쯤이면 어머니는 늘 울보네 집에 품삯 일을 하러 다니셨다. 일이라야 따 놓은 복숭아를 손질하여 나무상자에 차곡차곡 쟁여 놓는 일이었다. 그 품삯으로 자식들 학용품도 사 주고 추석에 입을 옷가지라도 사 입히곤 했다.
-〈과수원집 울보〉중에서
이 짧은 글 속에 한국 근·현대사가 다 들어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 청년의 삶과 그 빈자리를 떠맡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작가의 부모님 삶이 그 시대의 전형적 인물의 삶으로 전환된다.
수필도 삶의 총체성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개인의 기억이 역사가 되려면 언어로 기억을 재구성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즉 수필가의 기억으로 재해석된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았던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해 승인되고 보충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거시적 역사가 구체적 사건으로 되살아나는 부분이다. 역사학자들은 사건의 결과만 기술한다. 그 사건과 사건 사이의 공백을 가족사 내지 개인의 전기에서 메운다. 김성한의 수필이 역사로서 자리매김 되는 이유다.
김성한의 수필에는 풍경보다 사람이 중심에 자리한다. 그래서 묘사보다는 설명이 많다. 부모님, 친구, 아내, 시장의 노점상 할머니, 허름한 국밥집에서 만난 사람 등. 그의 시선은 위를 쳐다보기보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서민들을 좇아간다. 그들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 고향 친구를 떠올리고,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고, 누이를 떠올린다. 병마와 가난과 씨름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수시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현재의 인물과 과거의 인물이 만나는 방식은 ‘투사’다. 그 둘을 이어주는 끈은 “욕심 없는 순박한 얼굴에 담긴 진심”이다. 작가가 수필이라는 그물로 건져 올린 인물과 사건은 씨줄 날줄로 만나 새로운 문양을 짠다. 그 문양이 단순하면서도 한량없이 따스하다.
끝님이는 그 길로 대구에 사는 할머니뻘 되는 친척 집으로 갔다. 그 할머니는 일찍 혼자되신 분이었다. 스무 살에 재 너머 거뫼 마을에서 시집을 왔으나, 결혼 후 채 일 년도 되기 전에 남편은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배태(胚胎)도 못 해보고 청춘에 홀로 된 할머니였다. 한번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출가외인(出嫁外人) 풍습에 따라 재혼(再婚)은 언감생심 마음도 먹지 못했다. 그냥 운명이려니 하며 큰집 조카를 양자로 맞아들여 살다가 몇 해 전에는 자식 공부 때문에 대구로 이사했다.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데 방천시장에서 생선구이 장사를 하며 공부를 시키고 있는 할머니다. 끝님이는 그 집에서 먹고 자며 잔일을 거들었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낮에는 봉제공장에,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녔다.
-〈귀향〉에서
이 글에서 우리는 두 여인의 신산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자식도 없이 남편과 사별한 한 여인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 끝님이는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집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나 출생부터 환영받지 못하였다. 주경야독의 삶을 살면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여성 수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개인의 삶은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얽혀 있다. 그런 점에서 수필은 우리 역사를 두텁게 복원하는 중요한 사료로서 역할과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들의 시선에서 비켜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수필가는 기록하고 해석하여 글로 남긴다. 그런 점에서 수필은 굵직한 사건들을 점으로 기록한 연대기에서 누락된 것들을 복원하는 역사의 미시론(micromogy)이라 할 수 있겠다.
60년대 가난한 농촌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도시로 나가 온갖 고생을 한다. 중국집 사장이 된 고향 친구〈메줏덩어리 그 친구〉, 돼지감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지게꾼 상길이〈돼지감자〉, 농부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농투성이 아배〉, 동생과 집안을 위하여 여공 생활을 하며 희생한 우리의 누이들〈앵두누나〉,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양복쟁이로 산 친구의 가난한 삶〈구년묵이 그 친구〉등 모두 경제개발 시대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가난을 운명처럼 타고나서 자식들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곧 지난 시대의 보편적인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이자 역사이다.
일본의 철학자 오에 게이치는 “우리는 기억에 의해 선별된 여러 사실들을 문맥(contex) 속에 재배치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시간 계열에 맞춰 재배열함으로써 마침내 ‘세계’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게이치의 말에 기대어 본다면 김성한의 수필은 ‘이야기-하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선별하여 형태를 부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재배치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와 독자는 기억 속에 축적된 공통의 정서를 환기하면서 공감하고 경험을 공유한다. 마침내 개인적인 경험은 언어 행위인 ‘이야기-하기’를 통해 공통의 경험으로 확대되고, 주변의 인물이나 사건과 결합하면서 역사로 재생산된다.
작가는 “숨어버린 하얀 기억을 더듬는 일은 즐겁다.”라고 말한다. 수필의 본령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이다. 칩에 내장된 기억이나 혹은 경험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불러와 언어행위 즉 이야기-하기를 통해 재현한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의 복원은 바로 자신에 대한 존재의 확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야기’라는 언어행위를 통해 지나가버린 경험 그 자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하기’의 실천 영역인 ‘수필 쓰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의 경험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역사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동화적 판타지와 수필의 연대
김성한의 수필에는 고향의 강이 흐른다. 그 강물에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판타지가 여울물에서 유영하는 송사리 떼처럼 반짝거린다. 동화에서 판타지는 난해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재현과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데 유용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수필에서 금기처럼 여기는 판타지 기법을 차용했는가. 동화적 판타지 세계는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또 다른 세계이다. 김성한의 수필의 시공간은 유년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순을 훌쩍 넘긴 작가가 유년기로 돌아가려면 마술을 부려야 한다. 그 마술 지팡이로 차용한 것이 동화적 판타지다. 작가는 작위적으로 설정한 동화의 세계에서 마음껏 친구들을 호명하고, 그들과 강물에 뛰어들고,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다.
현대 수필 사에서 근대와 주체의 등장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었던 개인의 발견은 ‘자아’와 ‘고백’이라는 새로운 문학 개념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비로소 근대의 주체들은 수필이란 장르에 눈을 뜨게 된다. 김성한의 수필에서의 특이한 사실은 주체인 ‘나’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사실이다. 수필에서 작가와 화자는 동일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그리 특별한 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 자신은 철저히 다른 화자 뒤로 숨어버린다. 즉 ‘타자화 된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이야기 속의 한 인물로 형상화시킨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저히 숨은 화자로 존재 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의 삶을 살펴보면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런 환경과 그의 자리가 주체로서 자기를 내세울 수 없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또 다른 이유는 수필의 기법이 ‘동화적 판타지’를 차용하기 때문이다. 동화 속 공간에서 화자인 ‘나’는 이야기 속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수 있으니까. 주체가 직접 나서서 인물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힘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인물로 타자화하면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진다. 여기서는 뒤의 증거에 무게감을 두고 있다.
소년과 누렁이는 동갑내기다. 소년이 태어난 그해 누렁이도 이 집으로 들어왔다. 햇수로 십 년쯤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작은 집 맏손자 본 기념으로 사준 소다.
-〈농투성이 아배는 직업병 환자〉에서
오뉴월 뻐꾹새 울음소리에 취해 앵두가 익어 가면 우리 꼬맹이들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누나네 담장 밑을 자주 기웃거렸다. 그런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누나는 가끔 앵두를 한주먹 따서 담장 너머로 넘겨주었다.
-〈앵두누나〉에서
오후 내내 우리 꼬맹이들은 신이 났다. 졸졸 흐르는 계곡 물에 발가벗고 목욕을 하기도 하고 편을 갈라 물싸움도 벌였다.
-〈하릅송아지가 돌아오다〉에서
흙 담 벽을 시나브로 타고 오르던 능소화가 뛰어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중얼거린다. “꼬마야 괜찮아, 귀신이 아니야, 너도 크면 다 알아.”
-〈능소화가 웃는 이유〉에서
위 네 편의 작품에서 화자는 ‘꼬맹이들’, ‘소년’, ‘우리’라는 일반 명사 속에 내포된 존재로 등장한다. 화자는 단독자로 나서기보다 보편적 집단 속으로 스며들어가 기억을 재조직한다. ‘꼬맹이’와 ‘소년’, ‘우리’는 그 자리에 다른 누구를 갖다놓아도 무방하다. 이 사실은 작가의 개별적인 삶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역사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차원 변용이 가능한 토대는 차용한 동화의 세계가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여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화 이론에서도 판타지의 세계는 현실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할 때 리얼리티를 획득한다고 말한다. 리얼리티는 문학이 추구하는 진실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장치를 담보하지 못했다면 그의 수필은 태양계에서 이탈한 채 우주를 떠돌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운석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작품의 구성이다. 작품 구성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⑴ ‘현재-과거-현재’의 액자 형 구도를 가진 작품 군과 ⑵ ‘과거-현재’의 병렬식 구도,⑶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복합 식 구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⑴항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메줏덩어리 그 친구〉,〈뻐꾸기의 탁란〉,〈돼지감자〉,〈잉걸불〉,〈부부 우체통〉,〈과수원집 울보〉등 대부분의 작품이 액자 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⑵항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석 덤〉,〈뜬 모 심는 농심으로〉,〈앵두 누나〉등이 있으며, ⑶항의 작품으로는 〈민 과장이 돌아오다〉,〈산골 아이들〉,〈구년묵이 그 친구〉등이 해당된다.
예외적 작품도 많다. 〈하필 그날〉,〈능소화가 웃는 이유〉,〈하릅송아지가 돌아오다〉,〈귀향〉같은 작품은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동화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수필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완전히 무너뜨린 작품들인데. 특이한 구성과 전개방식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 이러한 작위적인 장치들이 그의 수필이 추구하는 진정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현재에서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결미에 아내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회상에 잠긴 화자를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대타자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동화적 판타지와 수필의 관계는 불륜이다. 그러나 작가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 위한 장치로 과감하게 이 둘의 결합을 시도한다. 상식을 깨트리는 도전이 이외의 효과를 낳는다. 본래 우리가 그리는 고향이란 관념 속의 고향이다. 미국의 소설가 토머스 울프의 작품《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도 현대인의 고향 상실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웨브가 다시 찾아간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고향일 뿐이다. 즉 우리 시대의 ‘고향’은 ‘판타지’의 은유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김성한이 시도한 수필과 동화의 연대는 정당하다. 이 둘의 융합은 과거를 현재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흑백사진 같은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려 하지 않고, 아예 작가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다. 이성적 논리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문학이다. 수필의 진화 과정에서 허구성 논쟁은 무의미한 단계로 진입했다. ‘픽션(fiction)/넌픽션(nonfiction)이라는 낡은 체제는 유통기한을 넘어 버렸다. 이미 우리의 일상이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시대가 아닌가. 모름지기 금기에 대한 도전은 저항과 논쟁을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이런 창작자의 도전에 대하여 변호하고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
3. 직선적 시간에서 원형적 시간으로
고도 경주에 가면 둥그런 고분들이 즐비하다. 그것도 반월성 궁궐 앞마당에. 그 생경한 풍경에 이끌려 나는 자주 경주를 찾아간다. 고대인들은 무덤 속에 수많은 부장품을 시신과 함께 묻었다. 그들은 죽음을 블랙홀로 여기기보다 또 다른 세계로 상상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부리던 종도 말도 그릇도 함께 가져가길 원했다. 죽음을 공포 혹은 끝으로 여기는 현대인과는 사뭇 다른 세계관이다. 그들은 태극의 형상처럼 순환적 시간의식을 가졌기에 현실의 삶도 죽음의 공포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합리주의와 과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근대의식은 시간을 직선으로 배치한다. ‘과거현재미래’로 배치된 시간은 근대인의 몸과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과가 즉 지난 시간은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낸다. 직선으로 배치한 시간을 다시 둥근 고리로 연결시켜보면 세 지점은 모두 연결된다. 그래서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다. 그 축적된 지층 속에서 작가는 기억들을 되살려 생명을 불어 넣는다. 비로소 과거의 시간은 현재로 연결 되고, 기억과 그 기억이 자리한 공간도 복원된다.
수필가 김성한은 도시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도시의 시간은 앞만 보고 달린다. 퇴직 후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직선적 시간은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한다.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듯, 작가의 시간의식은 고향으로 달려간다. 그를 고향으로 이끄는 기억은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상기한 기억들은 불규칙하고 비선형적이다. 우연히 마주친 상황에서 기억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산책을 하다가 본 노인, 전통시장에서 만나는 노점상 할머니, 국밥집 노파, 뻐꾸기 울음소리, 과수원에서 만난 복숭아 등 천지사방에서 그는 고향을 만나고 어머니를 본다. 영혼의 주름 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은 수필이라는 그릇에 담겨 아름다운 풍경화로 재현된다.
아득해서 더욱 그리운 어린 시절의 기억.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으니 고향을 떠나온 뒤로 잃어버렸던 추억들이 어항 속 금붕어처럼 뇌리 속을 유영(遊泳)한다. 해 종일 가댁질하며 뛰어놀던 좁다란 골목길, 학교가 일찍 파하는 날이면 주인 몰래 숨어서 밀 서리 해먹던 언덕배기 밀밭, 조랑조랑 매달린 풋감이 지천이던 교장 선생님 사택 뒤편의 감나무밭, 자주색 감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비알 밭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 그곳에 가고 싶다.
-〈뻐꾸기의 탁란〉에서
한 두어 시간 달려가니 고향 마을이 보이더군요, 어미소 잔등이 같은 능선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앞들 논에는 황금빛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곳이 제 고향 마을이 예요. 마치 어미 품속 같은 곳이지요.
-〈민 과장이 돌아오다〉에서
화자의 망향가는 애절하다. 손에 잡힐 듯한 고향의 시간은 아득하고,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은 멀기만 하다. 이성의 시간인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래서 그는 수필이라는 영토 안에서 유년기로 돌아가 마음껏 유영한다. 유년의 시간은 실존의 무게에 짓눌린 채 지고 있던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소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리라. 과거의 고향은 이상향의 기표로 환생한다. 주체(작가 혹은 화자)는 회상의 레일을 타고 과거로 이동한다. 유년기는 화려한 수사학도 정치가의 야망도 없는 순정의 시간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추웠지만 그런 결핍과 상처도 수필이란 난로 속으로 들어와 모두 용해된다. 난로 안을 들여다보면 자잘한 꽃들이 별처럼 피어난다.
작가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시간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무람없이 오고 간다. 그래서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의 경계를 무화시켜 버린다. 작가는 현재에서 과거를 호명하기보다 스스로 과거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주체 즉 ‘나’를 중심에 세우고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주체의 이동은 다채로운 문양을 생성한다. 작가와 주변 인물은 주연과 조연이 아니라 동등한 역할과 직위를 가진다. 그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평면적인 이야기를 입체적인 작품으로 변신시킨다. 김성한의 수필이 차용한 동화적 기법은 ‘현재 / 과거’, ‘주체 / 대상’, ‘중심 / 주변’의 수직적 관계를 원형적 관계로 복원하는 기제로 작품에 충실하게 기여한다.
화가 박수근의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면 잉걸불의 온기처럼 따스함이 느껴진다. 잎이 다 떨어진 나목(裸木)과 그 아래서 무언가를 줍는 아이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여인들, 동생을 업고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누이 등을 만날 수 있다. 김성한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박수근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순박하고 착한 이웃들이 있어 하염없이 그리운 그 시절. 김성한의 수필집《잉걸불》에 실린 작품들은 가난과 상실이 잉태한 상처와 작가 자신을 위한 해원이다.
작품집 뒤쪽에 실린〈내 인생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는 나도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작가는 마침내 순수한 자신의 목소리로 내면을 고백한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대신하여 밥 짓고 어린동생을 보살핀 여동생. 평생 자신의 속내를 표현한 적이 없는 작가는 지면을 빌어 비로소 “미안하다, 누이야. 정말 미안하다.”며 오라비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필의 가치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빛을 발한다. 수필은 거창한 명분과 화려한 명성을 거부한다.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가치를 사유하고, 사소한 것에서 진실을 추구한다. 원래 문학은 상처와 결핍의 제단에 바치는 야생화 한 다발 같은 것이다. 수필집《잉걸불》은 고향과 친구에게 바치는 헌사다. 설사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인들 어쩌라. 날마다 고향을 꿈꾸는 수필가 김성한에게 고향은 영원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