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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닳아가는 것들의 문장 / 하인혜

작성자이혜연|작성시간26.06.05|조회수51 목록 댓글 0

 

 

닳아가는 것들의 문장

 

 

 

 

 

 

 서투르고 느린 걸음이었다. 오래도록 나는 흩어진 생의 부스러기를 종이 위에 주워 담아왔다. 하루를 다 보내고도 한 줄을 쓰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겨우 적어 넣은 한 문장 앞에서 머뭇거리는 날도 있었다. 손끝은 마음보다 늦었고, 감정은 말이 되기 전에 먼저 가슴 밑바닥으로 번져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그 더딘 보폭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였다. 남에게는 쓸모없는 메모였을지 몰라도, 나에게 그것은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작은 버팀목이었다.

 

 어느 늦가을 오후, 낡은 서점에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만났다. 바깥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서점 안에는 묵은 종이와 먼지, 책들의 냄새가 고여 있었다. 책을 펼치자 프라하의 축축한 지하실에서 서른다섯 해 동안 폐지를 압축하며 살아온 남자, 한탸가 나타났다. 그는 버려진 책들을 건져 올려 펼쳐 보고 읽고, 다시 눌러 담는다. 그의 손길은 기계 곁의 노동이라기보다, 오래된 기도에 더 가까워 보였다. 책장을 넘기니 닫아 두었던 마음의 서랍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나를 견뎌온 책상이 있다. 갈색 나뭇결은 세월 속에서 무뎌졌고, 팔이 닿는 자리는 부드럽게 닳아 은은한 윤기가 감돈다. 책상 위에는 몽당연필 몇 자루와 잉크가 굳어가는 만년필, 여러 번 접었다 펴 가장자리가 해어진 공책이 놓여 있다. 원고지 위에 지운 자국이 겹겹이 남은 날도 많았다. 한 줄을 살리기 위해 서너 줄을 지우고,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한 낱장들이 서랍 속에 수북해졌다. 예전에는 그것들을 실패의 흔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국들이 내가 건너온 시간의 매듭이자 포기하지 못한 날들이 새겨놓은 무늬였음을 깨닫는다.

 

 뜻을 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마음속에 머물다 마침내 침묵이 된다. 한탸의 지하실에도 그런 말들이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을 것이다. 버려진 책들 사이에서 그는 한 장의 종이를 펼쳐 읽으며 세상이 밀어낸 문장에 다시 체온을 불어넣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구겨지고 밀려난 것들의 끝에서도 한탸는 손을 뻗었다. 마치 버려진 종이 위에서 온기가 가시지 않은 글 한 줄을 길어 올리듯이. 닳음은 물질에서 시작하지만 언어에서 완성된다.

 

 한탸가 폐지 더미 속에서 빛나는 문장을 수습하듯, 나 역시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고백들 사이에서 진실한 말을 찾으려 애써왔다. 나를 속이지 않는 문장, 모양은 서툴러도 마침내 내 쪽으로 돌아오는 문장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세상은 점점 빠른 대답을 원했지만, 내 마음은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했다. 그 늦음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닳고 닳아 얇아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들리는 말이 있다. 다 말하고 난 뒤에야 곁에 남는 고요가 있다.

 

 나는 이 일을 창조라고 말할 수 없기에 수거(收去)라고 부른다. 저녁마다 책상 앞에 앉아 불을 켜고,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한탸는 프레스를 돌렸고, 나는 만년필을 쥐었다. 그가 버려진 책을 함부로 폐기하지 않았듯, 나 역시 내게 한 번 와 닿은 문장들을 함부로 내칠 수 없었다. 세상이 말을 걸어오지 않던 날에도, 혼자 밥을 먹고 하루의 끝을 맞던 시간에도 중얼거리듯 문장을 이어 붙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하루를 버텨낸 자신에게 건네는 확인의 말에 가까웠다.

 

 한탸는 자기 노동을 두고 "이 일이야말로 나의 러브 스토리이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책을 덮고 앉아 있었다. 내 글쓰기 역시 오래된 애정 고백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다 들려주지 못한 마음은 공책의 여백 속으로 스며들었고, 말로 다 건너지 못한 날들은 눌러쓴 글자 아래에 얇게 가라앉았다. 표지가 벗겨진 공책들은 내 삶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릇이 되었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지나간 감정들이 마른 풀냄새처럼 되살아났다.

 

 한탸의 지하실이 내게 남긴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였다. 저물어가는 것의 마지막 자리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랄까. 글쓰기 또한 다르지 않다. 잘 쓰는 법보다 먼저, 내게 온 말을 끝까지 거두어들이는 일을 배워야 했다. 실패한 문장을 다시 펼쳐 읽고, 아무도 읽지 않을지 모를 행간에 가만히 한 줄을 더 보태는 일. 지루하고 고독한 반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견디는 법을 익혔다. 의미란 번개처럼 오지 않는다. 거두어 안겠다는 간절한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라날 뿐이다.

한탸는 끝내 자신이 사랑한 문장들의 압착 속으로 스스로를 맡겼다. 그 결말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이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지켜온 것에 자신을 놓았다. 끝내 내려놓지 못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식으로. 그의 생은 거기서 멈추었지만, 그가 끌어안고 버텨낸 시간의 무게는 내 문장 밑바닥에 남았다.

 

 저녁 하늘이 낡은 활자 빛으로 붉게 저문다. 책상 위 오래된 상처 같은 잉크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에 외면당한 시간들과 차마 말로 건너지 못한 마음들이 여전히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다. 오늘도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한탸가 멈춘 자리에서 다시 만년필 뚜껑을 연다.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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