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고래와 창녀: 영화 《고래와 창녀》
작가 베라는 스페인 내전의 사진첩 속에서 한 군인의 빛바랜 연애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갖는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자신의 삶을 정리 중이던 베라는, 그 편지 속 사랑의 궤적을 쫓아 파타고니아로 떠난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그곳에서 그녀는 우연히 로라의 옛 친구를 만난다. 70여 년 전, 사창가에서 함께 지냈던 그 노인의 증언은 이정표가 되었다. 베라는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로라의 비극적인 생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로라는 연인 에밀리오와 함께라면 세상 끝이라도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고물 비행기에 그 맹목적인 사랑을 싣고 도착한 곳은 아르헨티나의 남쪽 끝, 황량한 파타고니아였다.
생경한 풍경 속에서도 에밀리오가 곁에 있어 행복했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에밀리오는 그녀를 눈먼 포주에게 팔아넘기고 홀로 떠나버린다. 곧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을 남긴 채.
낯선 땅의 사창가, 로라는 반도네온의 애절한 탱고 선율에 맞춰 사내들과 춤을 춘다. 단돈 2페소에 몸을 팔아 연명하는, 그녀의 빨간 드레스와 머리 위의 커다란 꽃 장식이 처연하다.
관능적인 춤사위 뒤에 어린 깊은 비애, 그리고 백지처럼 무심한 표정은 그녀가 그곳에 실재하지만 영혼은 부재하는 상실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어느 날 로라는 해변에 상처투성이로 밀려온 거대한 고래를 목격한다. 뭍에 좌초되어 스스로 바다로 돌아갈 수 없는 고래는, 포주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로라 자신의 투영이었다.
그녀는 고래를 바라보며 자신이 갈구하는 자유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70년이 흐른 뒤, 같은 해변에서 베라 역시 좌초된 또 다른 고래와 마주한다. 베라는, 고래와 로라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신의 삶을 겹쳐 보며 그들의 절망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타인이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절대적인 고독 앞에서 베라는 나직이 읊조린다.
“로라도, 고래도,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가라앉든지, 다시 헤엄치든지….”
그것은 고통을 이겨낼 힘은 타인의 연민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나온다는 서늘한 깨달음이었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돌아온 에밀리오는 로라에게 다시 시작하자며 애원한다. 생기를 잃고 먹빛 슬픔에 잠겨 있던 로라는 비행기에 오르며, 자신을 버렸던 에밀리오를 향해 시퍼런 일갈을 가한다.
“날 그들이 보내줘서 자유가 된 게 아니야. 자유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인 거지.”
비행기가 높이 나는 순간, 로라는 창밖의 짙푸른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바다의 심연에서 고래와 로라, 상처 입은 두 존재가 재회한다.
로라가 사라진 바다 위를 잠시 맴돌던 비행기는 제 갈 길을 떠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로라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자유였을까. 어쩌면 갈망하던 자유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임을 깨달은 절망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로라의 투신은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방하려는 실존적 결단이었다고. 세상의 어떤 구속도 닿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 궁극의 도약이었다고.
심연으로 가라앉은 로라와, 다시 생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한 베라. 두 여인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마침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