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수필

조연시대 / 황혜란

작성자이혜연|작성시간26.06.15|조회수28 목록 댓글 0

 

 

조연시대

                                     

 

 

 

 

 

 

 바야흐로 조연시대다.

 

 방구석 1열에 앉아 넷플릭스를 선택할지 티빙으로 넘어갈지, 아니야 오늘은 디즈니로 가 볼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섣불리 드라마를 고르지 않는다. 시즌 1만 보고 싶다고 1회를 플레이했다가는 곧장 밤샘 각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상이 범람하다 못해 수면시간까지 빼앗으려 드니 슬기로운 시청자 생활이 무엇인가 때때로 골몰하게 된다.

 

 비바람이 우산을 흔들어 대는 오늘, 나는 종로 빈대떡집에 앉아 애정 하는 여자 사람들에게 침을 튀기며 이 시대의 조연에 대한 ‘썰’을 풀었다. 우리들의 꿈이며 애로 사항을 잔뜩 막걸리에 타마시며 대화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영상 범람의 부작용이 심각하다지만 순기능도 분명히 있는 법.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펼쳐지던 판타지나 과거에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 영상에서 재현할 수 없던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에이, 저거 CG인데? 가짜인 거 너무 티 난다, 라며 실망으로 내 입을 꽉 다물게 할 어설픈 영상을 되레 찾아 보기 힘든 지경이니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충만하게 매료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조연들의 활약이다. 이제 주인공 원톱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시대는 저물었고, 일상극은 안방극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더 특별하고 이색적이며 진짜인 걸 원한다. 하늘을 날고, 킬러들의 쇼핑몰이 생기고, 시간 여행을 하는 믿지 못할 광경이 현실인 양 눈앞에 펼쳐진다. 그걸 더 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바로 요즘 배우들의 연기 실력이다. 드라마에 그 배우가 나오는 횟수나 출연 시간이 인기도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나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재벌인데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엄마가 죽어서 세상 괴로워하는, 그런 멋진 주인공에게만 쏠리는 서사는 이제 처절하게 재미가 없다. 우리는 뻔한 것들로부터 동떨어져 특별한 기대감 없이 어떤 회차에 나온 한 배우의 열연에 우연히, 하지만 꽤 강렬하게 감화된다. 뭐지? 어디서 진짜 조폭을 데려왔나? 정말 장사꾼인가? 온몸으로 울고 있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 아악, 저 눈빛 어쩔 건데! 배우라기에는 너무 진짜 같다. 게다가 하나의 드라마에 그렇게 이색적인 인물이 하나도 아니고 다수이다. 그런데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인물 하나하나가 주인공인 듯 그들의 연기는 휘발성 있는 가짜가 아니라 내 마음에 꾹꾹 발 도장을 연신 찍어 낸다. 대사는 또 왜 이렇게 감동적이기까지! 영상으로 펼쳐지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해 내고야 마는 그들의 프로 정신에 혀를 내두른다.

 

 그렇게 이 시대의 조연들에 대한 나의 애정도가 극에 치달을 무렵 건너편에 앉아 있는 노신사가 보였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나는 바로 그가 배우임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의 이름을 알 리는 없었다. 다만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던, 내가 조금 전까지 막걸리에 전을 우걱우걱 씹으며 추앙한다던 조연배우가 아니던가. 우리는 결국 그에게 배우가 아니신가요? 입을 모아 묻게 되었고 《글로리》, 《낭만 닥터》, 《죽어야 사는 여자》 등에 출연한 노배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고, 조연을 추앙한다던 나의 마음은 종로 빈대떡집을 가득 메웠다. 하늘이 그걸 아셨는지 그를 여기로 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좋아서 함성을 질렀다. 나의 여자 사람들은 나처럼 신나서 게거품을 물은 암꽃게들 같았다. 그는 자신을 알아 보고 알은체까지 한 우리들을 위해 막걸리를 쏴 주었다. 자신의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고, 출연했던 작품에 대해 말하며 웃음지었다.

 

 그는 1946년생 공호석 배우이다. 우리 아버지보다 두 살 위인 진정한 노신사이다. 아직도 현역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며 추앙하는 조연의 뒤통수로 후광이 비친다.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는데 인간은 살기 힘들어진다고 말들을 한다. 우리들은 왜 행복에 더 가까워지지 못할까? 자본은 똘똘 뭉쳐 우리를 공장에서 찍어 낸 존재가 되라고 위협을 하고, 권위자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도록 당장 달콤한 말들만 쏟아낸다. 그러하지만, 동시에 그래서 나는 이 시대의 조연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1등을 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빛깔을 또렷하게 오랫동안 뿜고 있는 존재들에게서 말이다. 무한 경쟁시대에 낙오자처럼 느껴지는 마음이 그들에 의해 희석되리라 믿는다. 지하철 환승 구간에 촘촘히 들어선 검은 머리 군중을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만의 서사가 없는 사람은 결코 없다. 공호석 배우를 비추던 후광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내 모습 그대로 반짝거리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자체발광! 바야흐로 조연이 뜨는 시대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