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아이들
[비록 첫아들은 잃었지만 나는 애가 넷이나 있어. 다섯이나 낳았으니 참 많이도 낳았지. 어쩜 아이들이 그렇게 다르고 제 각각인지. 인생은 고달팠지만 우리 아이들만큼은 내게 행운이고 복덩이야. 큰딸은 부모 같은 자식이고. 차갑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안 하는 애니까. 둘째딸은 태어났는데 어쩜 그리 예쁜지. 하는 짓도 애교가 넘쳤어. 셋째 딸은 내가 힘들 때 낳아서 그런지 너무 작아서 안아 주기도 힘들었고. 그런데 어찌나 깐깐하고 단단하게 크던지 말이야. 그리고 우리 막내아들. 걔한테는 내가 정말 죄인이야. 그 녀석 다 크지도 않았는데 내가 신 받는다고 나가고. 내가 죽는 날까지 다 갚고 살 거야. 내가 사랑을 줄줄 몰라서, 배운 적도 없어서 나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애들한테 해 주고 또 해줬어. 그게 내가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야. 내 사랑이 부족해도 나의 아이들이 참 잘 커 주었어.] - 연화보살
가난은 그녀의 인생을 노상 따라다녔다. 그래도 꽤나 씩씩했고 평범하게 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소 화려하고 꾸미기를 즐겨하는 꿈 많은 여자이고 싶었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고 첫아들을 잃었다. 덜 영글어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을 잠시 떠나 있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엄마의 자리를 결코 세상의 다른 존재에게 내주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무당이 아닌, 엄마로 살고자 부단히 애썼노라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세상을 힘겹게 살다간 부모에게서 사랑이 뭔지 배우지 못했다. 그녀의 배우자인 황 씨 남자 또한 그랬다. 방 씨 여자인 그녀와 황 씨 남자는 사랑에 대해서는 도통 모르는 까막눈들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들에게 늘 성실을 가르쳤다. 성실하기만 하면 그가 이뤄내지 못한 성공이 성큼 다가오리라 믿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인 요리솜씨로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밥 한술이 그녀의 최선이자 애정표현이었다. 모든 행위는 사랑을 모르는 그들만의 사랑 방식이었다.
어떤 재료도 그녀의 손에 들어오면 무장해제가 되었다. 어떤 음식으로 변신을 하던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이 맛있다며 작은 입을 오물거릴 때면, 그녀는 진짜 본연의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손끝에 조미료 봉지가 달린 것처럼 어떤 음식을 하던 제 맛이 나왔다. 그녀는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만만했다. 공사장 인부들을 위한 밥집을 하며 쌓은 내공은 수십 인분의 요리도 뚝딱 만들게 하는 능력을 키웠다.
무뚝뚝하고 살갑지 않은 자신의 성격 탓에 아이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되어 주지는 못했노라고 회상했다. 그녀의 표현되지 못한 다정함은 신선한 소불고기를 타고, 야들야들한 오징어볶음에 업혀, 뜨끈한 북엇국과 콩나물국을 헤엄쳐 아이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겨울이면 소족을 사다가 며칠 밤을 고아서 아기 살결처럼 하얀 국물을 뽑아내었다. 대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후추를 톡톡 쳐주면 아이들은 밥 한 공기에 김치 하나씩을 얻어서 금세 비워버렸다. 폭 삶은 양지머리를 쪽쪽 찢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고기에 한 움큼, 국에 한 사발 얹어져 아이들에게 연일 배달되었다. 아이들은 그녀가 주는 것들을 덥석 받아먹고 잘 자라주었다. 흔들리는 부모를 생각해 보면 그녀의 아이들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가 없었다.
우리는 부모, 특히 무당이 된 엄마의 방황에 비하면 비교적 잘 자란 아이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마의 인생이 평탄치 못한 만큼 우리들도 삶에서 제각각 헤매던 시절이 존재했다. 네 남매는 오로지 자신만의 홍수와 가뭄을 외따로 견뎌 냈다. 시절과 인연을 달리하며 오는 인생의 재해들로 우리들은 하나하나 몸살을 앓았다.
무당은 자신이 무당으로서 감내해야 할 삶의 시기를 가진다. 무당의 자식들 또한 같은 삶의 문양을 갖는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대했고, 우리들도 한껏 웅크리며 자신을 세상에 내놓았을지도 몰랐다.
나의 청춘이 좌충우돌 상처로 물든 채 지쳐 있을 때쯤 나의 바로 밑 여동생은 결혼을 준비 중이었다. 고 3때부터 팔 년을 연애한 동네 친구가 신랑감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쉽지는 않았다. 신랑 어머니는 사귀는 것이야 막지 못했지만 결혼을 한다고 하자 극심한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리 부모와도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집안이었으나 엄마가 무당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나 보다. 더구나 집의 가세가 기울어 그냥 무당의 딸도 아니고 가난한 무당집의 둘째딸이 아닌가. 신랑감은 자기 어머니와 집안 살림을 집어던지며 싸움까지 벌여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그 동생은 부잣집에 시집가서 시댁의 도움도 받아가며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 너머가 있는 법이다. 십삼년 만에 동생은 이혼도장을 찍고야 말았다. 충격적이었으나 동생이나 우리 가족은 그 이혼을 후회한 적은 없다. 이혼 후 직장 생활을 하며 홀로 두 아이를 키워내고 있는 나의 씩씩하고 복스러운 동생. 동생의 이혼을 엄마는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겠으나, 무당인 자신의 삶을 닮는 것만 같다며 엄마는 툭하면 분노했다가, 단념하길 반복했다. 결코 동생의 이혼이, 엄마가 무당이기 때문이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엄마도, 나도, 동생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던 우리 집 셋째딸. 정말 예쁘고 하는 짓도 깜찍하여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런 만큼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줄은 섰으나 골라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매력이 없고 능력도 없었다. 막내까지 결혼식을 올려서 안달이 났던지 스무 살부터 자신을 좋아한다던, 허나 진짜 매력이 없다던 친구를 서른다섯에 꼬여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셋째의 결혼에 있어서도 왜 걸림돌이 없었겠는가. 늘 반복되는 가난과 무당의 굴레를 우리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시누가 셋, 시아버지가 안 계신 홀시어머니. 셋째가 넘어서야 할 산은 높고 높았다. 하지만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하지 않던가. 에베레스트 산처럼 정복하지 못할 것 같던 시댁의 허락이 기어코 떨어지게 되었다. 뱃속의 아이를 지우네 마네 천륜을 저버릴 소리까지 나오고 나서야 둘은 멋들어진 호텔에서 식을 올렸고, 지금은 기똥차게 잘 살아가고 있다.
우리 집의 막내 개똥이. 개똥이 약에 쓰려면 없다는 옛말처럼 아들 구실을 하나도 못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막내 고등학교 때 엄마가 집을 나가고 그 녀석이 하는 짓을 보고는 정말 폐인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 속에 작은 믿음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저 녀석이 그냥 세상을 등져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 장사를 하며 바쁜 부모 밑에서 어느 날 녀석의 학교에서 전해온 이야기가 있다. 막내가 아이큐가 아주 높아서 부모를 학교 오라고 했던 기억이다. 바쁜 부모가 동생의 높은 지능지수에 관심이나 있었겠냐마는, 나는 막둥이가 커서 뭔가 한 자락 하는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모로서가 아닌) 큰누나로서의 기대감이 있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고졸도 아닌 중졸의 녀석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기술직으로 대졸인 나보다도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 때론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분노로 표현하는 녀석이기도 했으나, 막내는 세상을 홀로 헤쳐나감에 있어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연봉이 꽤 높은 직장에 다니는 올케와 둘이 목돈 모아서 고향에 아파트 두 채, 상가 세 개를 갖고 있는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세상은 아무리 봐도 아이러니의 연속,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부모가 삶의 굴레에 시달릴 때, 우리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신의 굴레에 맞서 살았다. 내가 나 자신과 동생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다. 때때로 부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주지 않아서 어린 우리들은 종종 힘들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순간만큼은 부모가 우리들의 창과 방패가 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우리의 부모였다.
무당의 장녀. 나는 막내 남동생처럼 가정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개똥이 남편을 만나 잘 살고 있다. 어쩌면 집안 대소사에서 다 비껴가게 하늘이 돕는지, 남편은 바깥일만 전적으로 아주 잘 해 내고 있는 멋진 사람이다.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며 집안일을 똑부러지게 잘 해 내며 주부로 살고 있다.
무당의 아이들이라고 평범하지 못할 것이라 누가 그랬던가. 그 평범함을 위해 거쳐 온 터널이 비록 어둡고 축축할지라도, 엄마의 음식을 타고 전해진 벙어리 같은 따뜻한 사랑은 마른 볕처럼 우리들의 상처를 아물게 해줬다. 우리는 각자의 홍수와 가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으로 저벅저벅 걸으며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