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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창작이론

우리의 실존은 철학보다 먼저 고통받고 있었다 / 김은중

작성자이혜연|작성시간26.06.11|조회수33 목록 댓글 0

 

 

 

문장의 철학, 사유의 문학 8

 

 

 

우리의 실존은 철학보다 먼저 고통받고 있었다

 

 

 

 

 

 

 

 철학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인간이 먼저 고통받고, 문학과 예술이 다음으로 그런 고통의 형태를 드러낸다. 철학은 한참 뒤에야 그것을 개념으로 정리한다. 그래서 헤겔은 법철학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인간이 먼저 몸부림치면서 살고, 어쩌면 철학은 그 뒤에 평안하게 온다.

 

 실제로 많은 철학은 문학과 예술로부터 태어났다. 니체의 초기 철학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매혹에서 시작되었고,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왕햄릿에서 인간 무의식의 구조를 발견했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에서 존재의 언어를 읽었다. 벤야민은 백화점과 영화관, 광고와 군중 속에서 근대 인간의 의식을 분석했다. 푸코 또한 사드와 아르토, 바타유 같은 작가들을 통해 이성이 밀어낸 광기와 욕망의 영역을 탐색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앞에 이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는 철학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인간 안의 균열을 가장 먼저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에 가깝다. 실존철학이 인간의 불안과 자유, 고독과 책임을 말하기 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그 안에서 병들고 있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를 그저 실존철학의 선구자라고만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실존철학은 철학자들에 의해 뒤늦게 개념화되었을 뿐, 실존 자체의 고통과 구조는 도스토옙스키 문학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옳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가 실존을 철학의 언어로 정리하기 훨씬 이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자유와 죄책감, 불안과 무의미 속에서 침식되고 있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두고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을 하나의 도덕이나 이념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욕망과 자기혐오, 죄책감과 파괴 충동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의 인물들은 자기 의식 속에서 서서히 침몰한다. 행동 이전에 질문이 되어버린 인간들. 그것이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근대 인간의 얼굴이었다.

 

 실존철학은 흔히 인간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철학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그것이 하나의 병이라고 암시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그 의식 때문에 삶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 내부를 잠식하는 열병에 가까웠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 속에 던져졌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는 인간 이성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고, 계몽주의는 인간이 합리성과 과학을 통해 세계를 점점 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고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낙관에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고립시켰다. 사람들은 거대한 도시 속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었다. 과거에는 종교와 공동체가 인간 삶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지탱했다. 그러나 근대인은 더 이상 그런 질서 속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불안, 세계 속에 던져졌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벤야민이 말한 도시의 산책자가 그렇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 다니지만, 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는 도시를 바라보지만 도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그런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인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하나의 문제로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는 급격한 정신적 균열 속에 놓여 있었다. 유럽의 합리주의와 허무주의가 밀려들었고, 전통적 종교 질서는 흔들렸다. 농노제 해방 이후 사회는 오히려 불안정해졌으며,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는 인간이 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니체가 훗날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무신론의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절대적 의미의 보호 아래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갑자기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실존철학은 그 자리에서 태어난다. 자유는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인간을 끝없는 불안 속으로 밀어 넣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그 불안의 시공간에서 살아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철학자들에 앞서 먼저 실존의 구조를 문학 속에서 수행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인간은 실존철학 이전에 등장한 가장 불길한 인간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름조차 분명하지 않은 전직 하급 관리이며, 축축하고 음습한 방 안에 틀어박혀 산다. 그는 자신을 병들고 악의적인 인간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병은 육체의 병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인간이었다.

 

 그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 자기 감정,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들까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해부하듯 바라본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지친다. 생각은 점점 더 깊어지는데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에서 근대 인간의 병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한다. 의식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행동을 마비시켰다. 지하 인간은 자기 의식 속에 갇혀 스스로를 갉아먹는 인간에 가깝다.

 

 그는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합리주의를 경멸한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 행복을 추구할 것이라는 믿음, 사회가 점점 진보하면 인간도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낙관을 그는 조롱한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손해인 줄 알면서도 파괴를 선택할 수 있으며, 행복보다 고통 속에서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지하 인간이 두려워한 것은 단순한 합리주의가 아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인간이 완전히 계산 가능한 존재로 환원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완벽하게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되는 순간, 인간의 변덕과 충동, 비합리성과 욕망 또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자유도 사라진다.

 

 그래서 그는 병적으로 반항한다. 그 반항은 비합리성의 찬양이라기보다, 인간 존재의 예측 불가능성을 지키려는 절규에 가깝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지나치게 의식적인 인간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인간은 계산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며, 때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유를 확인하려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철학적 반항에만 있지 않다. 그는 실제 삶에서도 계속 무너진다. 그는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타인을 경멸한다. 거리에서 자신을 밀쳐 지나간 장교에게 수년 동안 집착한다. 리자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에서도 가장 잔인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지하 인간은 그녀 앞에서 잠시 인간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리자가 그의 말을 믿고 찾아오자 그는 갑자기 냉소와 모욕 속으로 숨어든다. 그는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혐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그것을 파괴해버린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내부의 기묘한 심리를 드러낸다. 인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 자기혐오는 때로 자기보호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 지하 인간은 타인에게 거부당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폐허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근대 인간의 가장 어두운 얼굴 가운데 하나이다. 지나친 자기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모든 것을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지하 인간이 오늘날의 인간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산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지만 실제의 자신이 노출되는 것은 두려워한다.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쉽게 상처받는다.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인간은 어쩌면 지하 인간을 더욱 닮아 있다. 자기 표현은 넘쳐나지만 진짜 고독은 더욱 깊어진다.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완전히 연결되지 못한다. 과잉의식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 속에 점점 더 깊이 갇혀가기 시작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세계는 인간에게 본래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끝없이 의미를 갈망한다. 부조리는 그 충돌 속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그 이전에 같은 문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의미 없음을 견디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끝없이 흔들리고 붕괴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도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사상을 실험하는 인간이다. 위대한 인간은 도덕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인간은 정말 선과 악을 초월할 수 있는가. 그는 나폴레옹 같은 비범한 인간을 꿈꾸지만, 살인 이후 그를 무너뜨리는 것은 법의 처벌이 아닌 자기 안의 붕괴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고 믿고 싶다. 평범한 인간들이 지키는 도덕 위에 설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점점 침식한다. 열병 속을 헤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도 자기 안의 어떤 목소리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죽인 것이다.”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죄를 법률적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죄는 인간 존재 안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공포는 자기 의식에 있다. 그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끝내 자기 자신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것 때문에 그는 균열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는 단순히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을 넘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는 단순한 무신론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가 해체된 세계 앞에 선 인간의 공포를 드러낸다.

 

 이반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신의 질서가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고통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의 사유는 단순한 철학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절규이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이반은 말한다. “나는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반은 점점 자기 안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악마와의 대화장면에서 그는 거의 자기 자신의 분열된 의식과 대화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이렇게 함몰된다. 세계가 그들을 파괴하기 전에 의식이 먼저 자기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철학자들은 훗날 그것을 실존이라고 불렀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 실존을 인간 내부의 고통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실존철학은 어쩌면 철학자들의 책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병든 인간들의 의식 속에서 먼저 태어났다.

 

 중요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을 고통 속으로 그저 던져 넣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유는 설명이 아니라 충돌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서로 다른 욕망과 신념, 절망과 구원의 가능성이 한 인물 안에서 끊임없이 부딪힌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의 안정된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의 감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욕망 사이를 흔들린다. 긴 독백과 불안정한 대화, 자기혐오와 감정의 폭발이 이어지며, 독자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인간 의식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바흐친이 도스토옙스키를 다성성의 소설가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들을 하나의 사상 아래 정리하지 않는다. 각각의 인물은 자기만의 논리와 세계관을 가진 채 충돌하며, 그 충돌은 끝내 완전히 봉합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때문에 도스토옙스키가 지금까지도 현대적인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완결된 의미 속에 가두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늘 흔들리고 모순되며,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문학 속에서 그 균열을 살아 있는 인간의 고통으로 보여준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자기 자신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의식의 어둠.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실존철학은 철학자의 서재에서보다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축축한 지하방에서 태어났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철학의 선도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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